발권을 하고 영화가 시작되기까지 30분이고 한 시간이고 마냥 기다리는 일이 두근거리던 시절이 있었다. 아트시네마의 옥상이나 씨네큐브의 조각 앞에서 발끝으로 땅을 툭툭 치며 혼잣말을 하기도 했었다. 이십대였고 처음으로 혼자서 이것저것 해보던 때였다. 혼자 밥 먹기, 혼자 여행 가기, 혼자 영화 보기, 그리고 혼잣말하기. 영화를 보고 집으로 걸어올 때면 늘 길을 잃는 것 같았다. 지워지는 것이 있었다. 동시에 생생해지는 것이 있었다. 영화 속 장면은 아스라해지는데 영화를 보기 전 발끝과 지면이 맞부딪던 느낌은 생생해졌다. 지워지면서 생생해지는 것이 있었다.
그 무렵, 키에슬로프스키를 만났다. <베로니카의 이중생활>은 확실히 지워지는 영화였다. 이 영화는 이상야릇한 감정을 불러일으켜 우리의 의식을 하나씩 지워나간다. 지금껏 이 영화를 예닐곱번쯤 봤는데, 볼 때마다 당혹스러움을 감추기 어려웠다. 지금 보고 있는 장면이 방금 전에 본 장면과 겹쳐졌기 때문이다. 때때로 베로니끄가 등장하는 장면은 베로니카가 등장하는 장면처럼 느껴지는데, 이는 시각적으로는 설명되기 힘든 부분이다. 차라리 이 현상은 촉각적으로 다가오는데, 구슬이나 반지, 악보 파일의 끈, 베개나 인형 같은 사물을 통해서 나는 마치 형체 없음을 ‘만지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음악이 등장하는 타이밍과 그 음악이 주는 느낌 또한 너무나 절묘하고 야릇해서 나는 이 영화에 점점 더 빠져들었다.
폴란드의 베로니카와 프랑스의 베로니끄는 취미, 습관, 생김새, 재능까지 판에 박은 듯 닮았다. 그녀들은 서로의 존재 사실을 알지 못하며 단지 ‘상대이면서 동시에 자기인’ 존재를 이따금 느낄 뿐이다. 이는 베로니카가 무대에 서서 노래를 부르다가 심장마비로 죽을 때 베로니끄가 슬픔과 격정을 느끼는 것에서도 잘 드러난다. 일란성쌍둥이에게서 간혹 보이곤 하는 동시통증 현상처럼 말이다. 살면서 ‘나’가 아닌 ‘나들’을 경험하는 순간이 내게는 더없이 매혹적이었다. 이것이 끈끈한 핏줄이 아닌 불확실한 연대로 드러나 마음이 더욱 기울어졌다. 어디에 있는지는 몰라도 분명히 존재하는 그것.
둘은 딱 한번 서로를 스치는데, 이 스침을 통해 베로니카는 베로니끄의 존재를 인식한다. 베로니끄는 후에 사진을 통해서야 또 다른 자신이 있었음을 알게 된다. 이를 도플갱어의 개념으로 해석하면 좀더 명확해진다. 둘이 처음 만난 곳은 크라쿠프 광장이었는데, 그때 상대를 먼저 발견한 것은 폴란드의 베로니카였다. 그 때문에 베로니카는 얼마 못 가 죽음을 맞이하고 ‘또 다른 나’인 베로니끄는 살아남는다. 베로니카의 존재조차 몰랐던 베로니끄는 불가사의한 상실감에 사로잡힌다. 지워지는 존재가 가져다주는 생생한 느낌, 혹은 지워짐으로써만 역설적으로 드러날 수 있는 존재의 강렬함.
영화는 삶의 주변에 존재하는 또 다른 나와의 운명적인 동반 관계를 설정함으로써 느닷없이 지워지는 의식 속에서 ‘나들’을 발견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해준다. 실제로 베로니끄는 베로니카가 죽고 나서야 스스로를 들여다보게 된다. 요컨대 <베로니카의 이중생활>은 개인의 의식을 하나씩 지워나가며 결국 본연의 나를 찾아가는, 매우 신성하고 영묘한 영화다. 지워지면서 동시에 생생해지는 것이 있다면, 한 사람의 머릿속에 두고두고 남을 것이다. 내게는 <베로니카의 이중생활>이 그렇다. 앞으로도 나는 이 영화를 혼자 보러 갈 것 같다. 또 다른 나를 그려보기에 혼자만큼 좋은 상태는 없으니까.
오은 시인. 2002년 <현대시>로 등단. 시집 <호텔 타셀의 돼지들>(2009), <우리는 분위기를 사랑해>(2013), <유에서 유>(2016) 등을 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