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씨네 인터뷰] "나는 아직도 꿈이 있다, 문화적 결과물을 누구하고나 나누고 싶다는" - <그랜드 파더> 배우 박근형
2016-09-01
글 : 윤혜지
사진 : 손홍주 (사진팀 선임기자)

“꼭 점심 같이 먹고 가거라.” 박근형은 앞서 인터뷰를 마치고 나가는 고보결에게 다정히 말했다. 손녀의 식사를 살뜰히 챙기는 <그랜드 파더>의 기광이 거기 있었다. <그랜드 파더>에서 박근형이 연기하는 기광은 과거 유능한 군인으로서 베트남전에 참전했으나 전쟁 트라우마와 고엽제 후유증만을 안고 돌아온 외로운 노인이다. 자식과의 불화 탓에 기광은 아들의 자살 소식조차 남의 입을 통해 듣는다. 기광은 아들의 장례식장에서 손녀 보람(고보결)을 만난 뒤 기댈 곳 하나 없는 작은 새 같은 보람을 자신이 돌보기로 결심한다. 기광이 아니고도 그동안 많은 ‘아버지’들이 박근형을 거쳐갔다. 드라마 <형제의 강>(1996)에선 장남만 애지중지하는 가부장적인 아버지 복만 역으로 SBS 연기대상을 수상했고, 최근 마친 연극 <아버지 Le Père>에선 치매로 모든 걸 상실해가는 늙은 아버지를 열연해 박수를 받았다. <탐정 홍길동: 사라진 마을>(2016)에서도 그에겐 끔찍이 아끼는 어린 손녀들이 있었다. 박근형 자신도 연기를 해온 57년간 1년도 쉬지 않고 끊임없이 스스로를 채찍질해왔다. 세상 많은 아버지들처럼. 연극, 영화, 드라마를 불문하고 어느 곳에서나 연기하는 후배들에게 ‘위대한 아버지’(Grand Father)로 통하는 배우 박근형을 만났다.

-제작자인 정윤철 감독의 권유로 <그랜드 파더>에 출연하게 되었다고.

=시나리오를 처음 읽고는 흔한 이야기가 아닌가 싶었다. 그런데 정 감독이 “그렇게 생각하면 그렇게 보일 수도 있다. 스치기만 해도 인연이라는데 평범한 사람들이 가까운 서로에게 너무 위해를 가하고 사는 건 아닌지 생각해보라”고 하더라. 가만히 생각하니 어릴적에 본 이탈리아영화들이 생각났다. 노인을 주인공으로 한, 신선한 영화인 것도 같아서 하겠다고 했다. 그렇지만 내가 바꾸길 요구한 여러 가지가 있어서 이서 감독이 중간에서 애를 많이 먹었을 거다. (웃음) 일단 출연을 결심하고 나니 한여름에 매일 촬영하는 50회차 일정을 내가 어떻게 견딜까 싶었다. 촬영 한달 반 전부터 운동을 시작했다. 버스를 몰고 다니는 노인역이라 운전면허도 갱신했고, 근력도 키워야 했기에 근력 운동도 열심히 했다. 삼복더위에 다들 고생해서 찍은 영화라 애정이 많다.

-<테이큰>(2002), <그랜 토리노>(2008) 등과 비교하는 시선도 있다.

=<테이큰>은 정보부 요원들끼리 싸우는 얘기고, <그랜 토리노>는 이민자에게 마음을 여는 노인 얘기인데 <그랜드 파더>는 할아버지과 손녀 사이를 밀도 있게 그리는 드라마다. 전혀 비슷하지 않다.

-시나리오에선 어떤 것들을 바꾸길 요구했나.

=논리적으로 예상할 수 없는 장면들을 찍길 바라서 그 부분을 조율하는 데 애를 썼다. 그런데 내가 미처 생각지 못한 게 있었다. 영화엔 편집 기술이 있다는 거였다. 영 이상하다고 생각한 몇몇 장면을 감독이 요구하기에 일단 찍었는데 나중에 편집으로 다른 장면하고 붙여놓고 보니 기가 막히게 영화에 도움이 되더라. 예를 들자면, 기광이 엽총을 만지는 장면들이었다. 내가 오랫동안 연극을 해와서 캐릭터를 잡는 데 신경을 많이 쓰는 편이다. 기광이 총신을 자르고 나서 턱 겨눠보는 장면이 노인이 할 만한 행동치고는 너무 유치하지 않은가 싶었는데, 나중에 편집본을 보니 영화적인 무드를 만드는 데 절대적으로 필요한 장면이더라. 뒤늦게 또 하나 배웠다.

-이만한 배우가 뭔가를 새로 배웠다고 하는 것이 새삼 인상적이다. 시나리오 속 기광을 대하고서는 어떤 인물을 상상했나.

=베트남전쟁 후유증과 가족 문제로 아픔을 짊어지고 사는 노인이다. 인물을 잘 보여주기 위해 의상에도 꼼꼼히 신경 썼다. 왜 시장 같은 데 가면 그물망 조끼 입고 군복처럼 포켓 줄줄이 달린 바지를 입고 있는 노인들을 본다. 그게 노인에 대한 어떤 고정적인 이미지가 됐다. 나는 그게 싫었다. 굳이 삶에서마저 ‘퇴역’한 사람처럼 구질구질하게 표현할 필요가 있을까 싶었다. 유럽 노인들 의상을 많이 참고했는데 무채색에 슬림한 핏의 의상으로 결정했다. 어느 나라에 갖다놔도 자주 보일 듯한 보편적인 인상이잖나.

-과연 의상만 봐도 기광은 주관이 뚜렷한 사람인 게 드러난다. 동네 노인들과는 달라 보이잖나.

=나이 먹었다고 뒷방에 들어앉아서 이상한 전단지나 뿌리고 고집부리고 그러면 안 된다. 요즘 노인들은 상상이 없고 공상만 있다. ‘과거에 내가~’라고 하면서 패악부리고 다니지 말고 나이 먹어서 현역에서 물러나더라도 가정과 사회에 봉사한다는 마음으로 살아야 한다. 그 마음이 소박한 개인적 꿈으로 나와야지 이상한 패거리나 만들고 그러면 안 된다. 나는 아직도 꿈이 있다. 아흔쯤 돼서 은퇴해 고향에 가면 서당 같은 것 차려두고 아이들이나 동네 사람들하고 연기 얘기를 하고 싶다. 같이 각본 읽고 하는 모임 말이다. 우리 어릴 땐 콩밭에서 물가에서 뛰놀고 살았는데 요즘 어린애들은 획일화된 교육 때문에 피폐해져가는 것 같다. 막 내놓고 길러야 알아서들 적성을 찾아갈 텐데 경쟁하는 것만 가르치니 누군가를 딛고 일어서는 것밖에 못 배운다. 인간성이 사라지고 없는 거다. 내가 연기 교실 열겠다는 것도 인력 양성이 목적이 아니라 노인이나 아이나 주부나, 누구나 요만큼이라도 꿈을 갖고 있다면 같이 뭘 해보자는 거다. 내가 지금까지 쌓아온 문화적 결과물을 여기저기 뿌리고 다니면 참 좋지 않겠나. 그런 데 열정을 쏟으면 노후에도 활력있는 삶을 살 수 있다고 생각한다.

-액션 연기를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액션 합도 경제적이고 현실적이다.

=완전히 생각 밖이었던 연출이다. (웃음) 감독이 가스통을 쏘라고 하기에 의아했다. 엽총으로 가스통을 뚫기도 힘들거니와 그걸 쏘면 집이 다 날아가는 건데. 그런데 편집으로 다른 장면들하고 이어붙여두니 영화적으로 해결이 되더라. (웃음) 보통 영화 안에 액션이 들어갈 때 스펙터클을 위한 경우가 많은데 참 새로웠다. 공사장 장면은 실제 15층쯤 되는 공사 현장에서 찍었는데 난간도 없어 무척 힘들고 위험했다. 그래도 내 액션은 나이를 감안해 단순하고 기습적인 액션 위주로 쉽게 짜주어서 다행히 대역을 쓰지 않고 직접 해낼 수 있었다.

-가스통 장면은 어버이연합의 가스통 시위가 자연스레 연상된다.

=원래는 그보다 더했다. 기광을 소개하기 위한 장면 중 두어개 신이 빠졌다. 원래 버스로 시위 현장에 노인들 실어다놓고 기광 자신도 거기 가담해서 시위 참가자를 때리고 물대포 쏘는 장면도 있었다. 그 뒤에 버스 빌려준 값, 시위에 참여한 값까지 챙겨받는 장면도 있었는데 너무 노골적이라 적당히 편집한 것 같다.

-슬픈 사회 드라마이기도 하지만 할아버지와 손녀의 멜로드라마이기도 하다. 특히 고물 버스를 끌고 손녀를 학교에 데려다주는 장면이 로맨틱하고 따뜻했다.

=아마 그 둘의 가장 행복한 순간이지 않았을까. 찰나의 행복에 겨워서 창밖으로 손을 내밀며 바람을 느끼는 아이가 얼마나 천진한가. 그 애를 보고 있는 기광은 절정의 행복을 느꼈을 거다. 거기서 손녀는 휴대폰으로 할아버지의 뒷모습을 찍는데, 아주 섬세한 설정인 것 같다. 처음엔 만나기만 하면 틱틱거리던 비행소녀가 그런 마음의 여유가 있을까 싶었는데 요새 젊은 사람들은 잘 그러더라고. (웃음)

-지난해 한여름인 8월에 50회차를 매일 촬영하느라 무척 힘들었겠다. 이서 감독도 “현장에서 박근형 선생님이 쓰러지실까 내내 걱정스러웠다”고 하더라.

=보람 집 촬영 장면은 방을 밀폐하고 찍어서 바깥 온도가 33도면 내부 온도는 37도쯤 됐다. 밤이 돼서 바깥에서 촬영할 때면 피로하기도 해서 온열 질환이 생기더라. 어느 날 어지럼증이 확 느껴져서 바로 병원에 가 주사 맞으며 쉬다가 다시 와서 촬영했다. 요즘 날씨 같았으면 정말 큰 사고 났을 거다.

-최근 연극 <아버지 Le Pere>도 마무리했다.

=그간 연극으로 돌아가려고 무진 애를 쓰고 기회를 엿보았다. 고 백성희 선생님과는 서로를 어머니, 아들이라 부르는 사이다. 어느 날 어머니께서 전화를 하셨다. “아범아, 나다. 너 연극 좀 해야겠다. 엄마가 하고 있는 건데 원래 하시려던 장민호 선생님이 아프시니까 나와서 네가 해라.” 바로 “네, 알았습니다”라고 답했다. 돌아가려고 벼르던 국립극단 연극에 그렇게 갑자기 복귀했는데 잘못된 복귀가 된 것 같다. (웃음) 그러다 또 김윤철 국립극단 예술감독이 작품 하나 책 보내준다고 하기에 봤다. 연극에 대한 열망이 끓는 판에 참 난해한 작품을 만난 거다. 찾아보니 또 엄청난 작품이라, 보통 연습은 한달이면 되는데 <아버지 Le Pere>는 두달을 연습했다.

-주인공 앙드레의 혼돈과 착오와 사라짐의 과정을 그리는 방식이 인상적인 작품이다. 실제로 노년의 단계를 거치는 중인 배우로서도 소감이 남달랐겠다.

=이 작품에 한해선 ‘소멸’이란 말을 쓰는 게 맞는 것 같다. 인간이 소멸돼가는 과정을 그리는 연극이다. 아마도 이 분야에서 나를 필요로 하지 않을 때가 나의 은퇴 시기일 거다. 연기 외길만 걸어와서 나 아니면 안된다는 생각을 늘 갖고 있으니 하는 데까진 최선을 다할 생각이다.

-드라마든 영화든 작품들을 헤아려 보면, 57년간 연기를 해오며 한번도 1년 이상 쉰 적이 없는 것 같다.

=작품 끝나면 3개월, 5개월 정도는 쉬었다. 그 정도면 충분하다. 그러면서 언제든 기다렸다. 그래도 내 장점중 끊임없이 도전하려고 한다는 게 제일인 것 같다. 시나리오 보고 마음에 들어서 출연을 결정하면 열심히 하면 되는 거고, 그 작품이 성공하든 실패하든 그건 연기를 잘하고 못하는 것과는 별개의 일이다. 앞으로 연기를 더 꾸준히 하려고 매일 잠자리에서 일어나면 30분씩 스트레칭한다. 몸에 유연성을 기르려고 1980년대부터 골프를 시작했다. 큰 데엔 가진 않고 동네 지하 골프장에서 하루 두 시간씩 좌우로 스윙 연습을 한다. 겨울에도 힘들어 땀이 뚝뚝 떨어지도록 한다. 아내가 몸이 약해서 자연식을 하고 있는데 나도 따라서 먹고 있다. 그중에서도 특히 토마토를 권하고 싶다. 20년은 쭉 먹은 것 같은데 피부도 좋아지고 젊어지는 기분이다. (웃음) 아내가 아침마다 살짝 데쳐서 껍질 벗기고 으깨서 주는데 한 사발 마시면 식사를 안 해도 든든하다. 어젯밤엔 집에 가서 세안을 하고 나왔는데 아내가 “당신 분장했어?” 그러더라고. (웃음)

-<그랜드 파더>와 <아버지 Le Pere>도 그렇지만 지금까지 누군가의 아버지를 연기한 적이 많다.

=많은 남자 배우들이 거치는 과정이다. 하지만 가장 중요한 건 인물의 진실성이다. 어떤 캐릭터든 타당하고 논리적 질서가 있어야 연기할 수 있다. 그래서 예전엔 소위 ‘막장 드라마’에서 소리나 지르고 얼토당토않게 행동하는 캐릭터가 아주 불쾌했고, 심지어 그런 캐릭터를 만든 작가를 비난한 적도 있다. 하지만 나이를 먹으며 보니 ‘타당함’이란 걸 그렇게 쉽게 단정할 수는 없더라. 그 캐릭터 자체의 성격만 분명하면 되는 거였다. 기광도 처음 보았을 때 이렇게나 지각 없이 행동하는 노인이 있나 싶었는데 앞뒤 이야기를 연결 해보면 정당성이 부여가 되더라고.

-몇년 전, 드라마 <추적자 THE CHASER>(2012)로 배우 손현주가 SBS 연기대상을 수상했을 때의 소감이 기억난다. “우리 드라마엔 아이돌도, 스타도 없어서 죽기 살기로 했다. 그런데 우리 드라마에 뭐가 있냐면 박근형 선배님이 계신다. 선배님 감사합니다”라고 했다. 후배 배우들 사이에서 ‘박근형’이라는 선배가 어떤 존재인지 짐작하고도 남을 멘트다.

=후배들이 존경을 표해주는 것이 오히려 감지덕지할 일이다. (웃음) 학문적, 이론적으로도 풍부한 얘기를 해줄 만한 자격을 갖추지 못해 송구스럽다. 다만 끝없이 도전하고 정진하려는 모습을 후배들이 따라해보고 싶어 한 것 같다. 창조도 모방에서부터 시작한다. 일종의 방법론일 거다. 모범이 되어야 할 텐데. 스스로는 나를 그저 공인이 아닌, 자영업자라고 생각한다. 그러니 장인 정신을 가져야지. 내 연기를 봐주시는 분들이 내가 장인 정신을 갖고 연기하고 있다고 봐준다면 참 좋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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