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슥슥 스케치만 되어 있는 그림 속으로 걸어들어가 하나씩 색을 입히고 형태를 완성해가는 과정과 비슷하다. 만들어가는 재미가 큰 대신 난이도가 높다고 해야 되나.” 송강호는 김지운 감독과의 작업을 회화에 비유하며 이렇게 설명했다. <조용한 가족>(1998), <반칙왕>(2000), <좋은 놈, 나쁜 놈, 이상한 놈>(2008), <밀정>(2016), 여기에 단편 <사랑의 힘>(1998)까지 포함하면 김지운 감독과 5번 협업한 송강호다. “매 작품 새로운 경험을 안겨준” 김지운 감독과 <좋은 놈, 나쁜 놈, 이상한 놈> 이후 8년 만에 만나 찍은 <밀정> 역시 난도 높은 작업이었음은 물론이다.
<밀정>은 밀정의 정체를 놓고 관객과 게임을 하는 영화가 아니다. 대신 조선인 일본 경찰 이정출의 딜레마를 따라간다. <밀정>의 플롯 역시 서스펜스를 고조하는 방식이 아니라 인물의 딜레마를 극대화하는 방향으로 짜여 있다. 이때 이정출의 딜레마는 일제강점기라는 시대와 맞닿아 있다. 송강호가 <밀정>을 매력적으로 느낀 지점도 그 시대를 바라보는 차별적 ‘시선’에 있었다. “<밀정>은 좌절과 어둠의 흑색, 뜨거운 붉은색, 현실도피적인 노란색이 아니라 회색의 느낌을 주는 영화다. 아픈 역사를 회색으로 표현한다는 것이 신선하고 매력적으로 다가왔다.” 김지운 감독이 송강호에게 이정출의 옷을 입힌 건 그가 대한민국에서 회색 연기를 가장 잘 소화할 수 있는 배우라는 믿음이 있었기 때문일 거다. 역시나 송강호는 회색 물감을 머금은 탄성 좋은 붓이 되어 매 장면 영화의 채도를 바꿔 나간다.
“촬영 들어가기 전에 누군가가 물었다. ‘그래서 이정출이 의열단이에요? 일본 앞잡이예요?’ ‘글쎄, 나도 모르겠는데.’ 그 말을 들은 김지운 감독님이 많이 웃으셨다.” 영화의 첫 장면부터 관객은 이정출의 말과 행동을 의심하게 된다. 일제에 충성하기로 한 인물인지 의열단이 심은 밀정인지. 송강호는 “열길 물속은 알아도 한길 사람 속은 알 수 없듯이, 이정출의 갈등과 고뇌를 따라가는 게 이 영화의 재미”라고 말했다. 그는 또 이정출이 의열단의 김우진(공유)과 정채산(이병헌), 일본 경찰 하시모토(엄태구) 등 입장이 분명한 캐릭터들과 달리 “입장의 표현이 아니라 알 수 없는 마음을 표현”해야 하는 캐릭터라고 설명했다. 그들의 입장과 에너지를 모두 흡수하면서 밸런스를 맞춰가는 송강호의 연기는 영화에 다양한 결을 새겨 넣는다. 특히 겹겹의 응축된 감정을 분출하는 이정출의 재판정 장면은 송강호의 연기만으로도 꽉 찬 느낌을 준다. 재판정 장면의 경우 애초 시나리오에선 일본어가 아니라 한국어로 대사가 쓰여 있었다고 한다. 그걸 송강호가 일본어로 고치자고 제안했다. “말이 안 되지 않나. 일본 재판정에서 일본을 위해 헌신했던 사람이 ‘나는 의열단이 아니다, 억울하다’는 얘기를 조선말로 한다는 게.” 대사를 체화하기 위해 수개월 동안 매일 아침 눈뜨자마자 일본어 대사를 외우고 또 외워 “심지어 지금도 그 대사를 외우고 있다”고. 나무가 아닌 숲을 보는 배우 송강호는 김우진과 탐색전을 펼치는 첫 술자리 장면 등 1차 편집에서 빠진 장면도 김지운 감독에게 건의해 넣었다고 한다. 자신의 연기가 아니라 작품을 책임지고자 하는 태도가 지금의 송강호를 있게 한 건 아닌가 싶다.
<밀정> 이후엔 <의형제>(2010)를 함께한 장훈 감독의 신작 <택시운전사> 촬영에 돌입했다. 1980년 광주민주화운동을 전세계에 알린 독일 기자 위르겐 힌츠페터(토마스 크레치만)와 택시기사(송강호)의 실화를 극화한 영화다. <택시운전사> 촬영이 늦가을쯤 끝나면 곧이어 원신연 감독의 <제5열>에 합류해 군 수사관이 될 예정이다.“다작하는 배우가 아닌데 거 참… 내년에도 자주 뵐 수 있을 것 같다. (웃음)” 끊임없이 자신을 넘어서려는 배우 송강호의 다작 소식이 반갑지 아니한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