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2]
[스페셜] 닛카쓰 스튜디오의 ‘로망 포르노 리부트 프로젝트’가 보여주는 일본 로망 포르노 장르의 새로운 가능성
2016-09-21
글 : 윤혜지
사진 : 최성열
<사랑과 욕망의 짐노페디>

올봄, 일본의 닛카쓰 스튜디오가 ‘로망 포르노 리부트 프로젝트’ 계획안을 발표했다. 현재 일본에서 왕성하게 활동하고 있는 다섯 감독들, 나카타 히데오, 소노 시온, 유키사다 이사오, 시라이시 가즈야, 시오타 아키히코가 지금은 사양된 장르인 ‘닛카쓰 로망 포르노’를 오리지널 시나리오로 다시 제작한다는 소식이었다. 그리고 8월24일, 도쿄에서 로망 포르노 리부트 프로젝트 제작발표 기자회견이 열렸다. 닛카쓰 스튜디오의 사토 나오키 사장이 프로젝트를 소개했고, 다섯 감독들이 각자의 영화에 대해 질의응답 시간을 가졌다. 이날의 기자회견 내용을 지면에 옮기며 닛카쓰 로망 포르노가 이 시점에서 왜 다시 제작되는지도 살펴보았다. 시오타 아키히코 감독과의 개별 인터뷰도 덧붙인다.

닛카쓰 로망 포르노가 부활한다. 1960년대 후반, 일본의 영화 스튜디오들은 텔레비전의 보급으로 점차 불황에 접어들었다. 닛카쓰도 그 무렵 도산 위기에 처했다. 닛카쓰 스탭 노조는 회사의 위기를 극복하고자 ‘저비용 고효율’을 모토로 극장용 성애영화를 제작하기 시작했다. 이것이 닛카쓰 로망 포르노의 시발이다. 닛카쓰는 첫 작품으로 중산층 주부의 부도덕한 성생활을 그린 <단지처: 오후의 정사>(1971)를 만들었고 영화가 흥행하자 로망 포르노 제작에 더욱 박차를 가했다. 로망 포르노를 만드는 감독들은 스튜디오에 월 2회 이상 배급을 목표로 편당 평균 제작비 750만엔, 70분의 러닝타임으로 열흘 안에 순발력 있게 영화를 내놓아야 했다. 성애영화인 만큼 10분마다 한번씩 섹스 신이 등장해야 한다는 조건도 있었다. 이를 뒤집으면, 기본적인 제작 조건만 지키면 어떤 이야기를 어떻게 해도 관계없었다는 얘기가 된다. 그래서 저예산으로 제작된 성애영화이지만 스튜디오의 전문 인력과 시스템 덕에 비교적 완성도 높은 드라마와 작가적 개성을 갖춘 영화가 다수 배출될 수 있었다. <이치조 사유리의 젖은 욕망>(1972), <방황하는 연인들>(1973), <빨강머리의 여자>(1977) 등을 만든 구마시로 다쓰미와 <창녀 고문 지옥>(1973), <실록 아베 사다>(1975) 등을 연출한 다나카 노보루가 닛카쓰 로망 포르노의 대표 감독들이다. 포르노영화는 아니지만 이마무라 쇼헤이의 <신들의 깊은 욕망>(1968), <복수는 나의 것>(1979) 등은 이 시기 로망 포르노에 깊이 영향을 준 작품이다. 와타나베 마모루, 히가시 요이치, 소마이 신지, 모리타 요시미쓰, 다키타 요지로, 구로사와 기요시 등 현재 그 이름이 익히 알려진 감독들도 커리어 초반엔 로망 포르노를 만들며 창작력을 다듬었다. 그렇게 성애영화의 탈을 쓴 명작이 숱하게 탄생했다. 그러나 1980년대 후반 비디오 대여점 등을 유통망으로 장악한 AV시장이 확대되면서 로망 포르노는 시장에서 사장되었고, 닛카쓰는 18년간 제작한 1100여편의 작품을 남기고 1988년 로망 포르노 제작을 중단했다.

<화이트 릴리: 백합>

로망 포르노 시장을 새롭게 발견하다

그리고 올해 닛카쓰는 로망 포르노를 다시 제작하겠다는 계획을 발표했다. 이번 기자회견에서 사토 나오키 사장은 “2012년 닛카쓰 100주년을 기념해 일본과 뉴욕, 유럽 등지에서 로망 포르노 상영회를 열었다. 예상치 못한 큰 반향이 있었다. 새로운 세대의 젊은 관객이 대거 극장을 찾았다는 점, 그 관객의 60%가 여성 관객이라는 점이 뜻밖이었다. 우리는 로망 포르노의 시장 가능성을 새롭게 발견했다”는 말로 로망 포르노를 리부트하게 된 계기를 설명했다. 이어 나카타 히데오, 소노 시온, 유키사다 이사오, 시라이시 가즈야, 시오타 아키히코 감독은 각자 사랑과 관련된 키워드를 하나씩 가지고 과거 닛카쓰 로망 포르노의 규칙을 활용해 만든 신작을 발표했다. 촬영기간은 단 일주일이었다. 나카타 히데오는 ‘레즈비언’으로 <화이트 릴리: 백합>을, 소노 시온은 ‘예술’로 <안티 포르노>(가제)를, 유키사다 이사오는 ‘로맨스’로 <사랑과 욕망의 짐노페디>를, 시라이시 가즈야는 ‘사회’로 <암고양이들>(가제)을, 시오타 아키히코는 ‘싸움’으로 <바람에 젖은 여자>를 연출했다.

나카타 히데오의 레즈비언 로맨스 <화이트 릴리: 백합>은 도예가 도키코와 견습생 하루카의 성애를 다룬다. 과거의 남자로 트라우마가 생긴 도키코는 하루카의 사랑을 시험하듯 여러 남자와 난잡한 잠자리를 갖는다. 하루카는 인내와 관용으로 도키코를 지켜본다. 그런데 공방에 젊고 잘생긴 남자 견습생 사토루가 들어오면서 도키코와 하루카의 관계는 변한다. 나카타 히데오와 닛카쓰의 인연은 깊다. 나카타 히데오는, 1961년 닛카쓰에 입사해 <꽃의 유혹>(1971)으로 데뷔 후 꾸준히 리얼리즘 계열의 로망 포르노를 만들었던 감독 고누마 마사루의 조감독 출신이며 고누마 마사루에 관한 다큐멘터리 <새디스틱 마조히스틱>(2000)을 연출한 경력도 있다. 그는 레즈비언을 주제로 영화를 찍은 이유에 관해 “<새디스틱 마조히스틱> 상영회의 관객 절반 이상이 여성이었다. 로망 포르노가 여성에게 주요하게 호소하는 지점이 있음을 알게 되었다”고 말했다.

<안티 포르노>(가제)

소노 시온은 “굳이 포르노를 찍을 필요가 없다고 판단해 닛카쓰의 제안을 거절했다. 재차 ‘그렇다면 내가 안티 포르노를 찍겠다’고 하자 마음대로 하라더라. (웃음) 이 시장에서 여성의 몸이 어떻게 소비되고 있는가를 고민하며 <안티 포르노>를 만들었다”는 연출의 변을 밝혔다. <안티 포르노>는 액자 구성을 취하고 있다. 자기애 넘치는 21살의 젊은 예술가 교코는 언제나 36살의 어시스턴트 노리코에게 ‘여왕’으로 군림한다. 그런데 갑자기 어디선가 “컷!” 소리가 들려오고, 교코와 노리코가 배우들이었음이 드러난다. 실제 상황에선 노리코를 연기한 배우가 교코를 연기한 배우보다 선배다. 두 여자는 ‘여왕과 노예’로서 위치 바꾸기를 반복한다.

유키사다 이사오는 “에릭 사티의 피아노곡 <짐노페디>를 들으며 시나리오를 썼기 때문에 제목을 비슷하게 지었다”고 한다. <사랑과 욕망의 짐노페디>는 영화감독 신지가 낯선 여자의 등장으로 무기력에서 벗어나 열정을 되찾는 한편, 아내에 대한 죄책감과 다시 그의 내면을 채우게 될 슬픔과 우울감에 괴로워한다는 내용이다. 유키사다 이사오는 “처음의 시나리오는 지나치게 남성 중심적이었다. 나는 만족스러웠지만 닛카쓰에선 여성 작가와 여성 프로듀서를 내게 붙여주었다. 덕분에 여성성이 주인공을 어떻게 구원하는지가 더욱 잘 드러나게 됐다”는 비화를 언급했다.

<암고양이들>(가제)

시라이시 가즈야의 <암고양이들>은 이케부쿠로의 가난한 세 여자를 주인공으로 한다. 마사코는 큰 빚을 안고 있고 리에는 나이 든 홀아비를 돌보는 주부이며 유이는 두 아이를 데리고 사는 싱글맘이다. 세 여자가 사랑의 역설과 삶의 활력을 찾아가는 과정을 통해 혐오와 불만 등 부정적 감정을 주요하게 그린다. 경제적 문제로 고통받는 여성들의 사연은 현재 일본에서도 심각한 사회문제로 여겨지고 있기에 <암고양이들>은 다큐멘터리에 가깝게 촬영됐다. 시라이시 가즈야도 다른 영화사에서 핑크영화를 만든 경력이 있는 와카마쓰 고지의 조감독으로 일하며 일정 부분 성애영화와 연을 맺은 전력이 있다. 그런 의미에서 <암고양이들>은 “다나카 노보루의 <고양이들의 밤>(1972)으로부터 ‘세 여자’란 설정을 빌려오며 다나카 노보루에게 경의를 표하는 작품이었다”고 한다.

<바람에 젖은 여자>

오리지널 창작물 제작에 힘이 실리다

사토 사장은 이번 프로젝트를 통해 “영화 제작의 다양성에 관해 다시 생각한다. 자유가 재능을 배출한다. 닛카쓰는 젊은 감독들에게 다양한 영화를 만들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며 영화적 자유로움을 허락하는 스튜디오로 발돋움하고 싶다”는 포부를 강조했다. 그의 말마따나 새로 리부트되는 로망 포르노 프로젝트의 두 가지 의의는 오리지널 시나리오로 영화 찍기가 힘들어진 일본영화계에서 감독의 온전한 창작물을 만들 수 있는 바탕이 마련됐다는 것과 여성 관객을 타깃으로 한 작가영화, 성애영화 시장의 가능성을 발견했다는 것이다. 일본영화계에서 작가들의 오리지널 창작물이 다시 예전의 활기를 되찾는 것은 여전히 힘겨워 보인다. 다만 104년 전통을 가진 대형 스튜디오가 창작자들을 위한 발판을 구축하려 노력한다는 점은 일본영화계에 약간의 환기가 될 수도 있겠다. 이날 시오타 아키히코는 “감독 자신의 오리지널 기획물을 영화화하는 것은 현재 일본에서 무척 힘들다. 닛카쓰는, 마치 하이쿠처럼 장르영화의 틀 안에서 마음껏 작가성을 드러낼 수 있도록 우리에게 기회를 준 셈이다”라고 발언했다. 일본의 메이저 남성 감독들이 ‘포르노’라는 장르 안에서 여성 관객을 위한 영화를 만들겠노라 선언한 일 또한 유의미하다. 남성들의 전유물로 취급돼온 성애영화 장르의 확장 가능성을 모색하는 일이기도 하지만 일본영화계의 유리천장을 두들기는 신선한 시도로도 읽힌다. 닛카쓰 로망 포르노 프로젝트 신작들은 시오타 아키히코의 <바람에 젖은 여자>를 필두로 11월부터 순차적으로 공개된다. 오는 10월에 열리는 제21회 부산국제영화제에도 <화이트 릴리: 백합> <사랑과 욕망의 짐노페디> <바람에 젖은 여자> 세편이 미드나잇 패션 상영작으로 초청돼 국내 관객과 만날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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