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비리아는 예쁘지 않고, 목소리가 크고, 남자처럼 걷는다. 신경질적이지만 부자에겐 온순하고 바보이며 동시에 속물이다. 교양과 지성은 없고 늘 남을 깎아내리며, 무언가를 이루려는 열정도 노력도 희미하다. 카비리아는 영화 주인공의 미덕을 찾아볼 수 없는 인물이다. 하지만 이 영화를 본 관객 중 정말로 그녀가 보잘것없다고 느끼는 이가 있을까? 카비리아는 눈물나게 사랑스럽다. 게다가 나는 그녀에게서 거대함과 숭고함까지 느낀다.
<카비리아의 밤>(1957)은 사무실에서 항상 라디오처럼 틀어놓는 영화 중 하나이다. 처음 보고 완전 반해 노트에 대사를 베껴 적고, 며칠 동안 줄리에타 마시나 특유의 이탈리아 제스처와 끝을 올리는 말투를 연습했다(연습을 왜 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이 영화가 좋은 것은 근사한 배우와 더불어 이 작품이 약간 특수한 상황에서 탄생했기 때문이기도 하다. 엄청난 집중력으로 쓴 경이로운 대본은 줄리에타 마시나로부터 시작되었음이 분명하다. 페데리코 펠리니는 그녀의 매력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을 테니까. 아내에 대한 감독의 사랑이 모든 화면 속에 절절하다. 그래도 그게 다가 아닌데, 난 그녀에게서 도대체 무얼 본 것일까? 형편없는 이 여자는 보통 사람들로부터 무엇을 초월했나?
카비리아는 사실적인 인물은 아니다. 그녀에겐 묘한 평면성이 있다. 아무것도 숨기지 않는 카비리아는 드러나는 것과 내밀한 것이 일치하기에 관객이 그녀의 마음을 짐작할 기회가 없다. 진짜 인간은 서로에게 진실을 원하지 않는다. 진실이 모두 밖으로 드러나면 세계는 지옥이 될 테니까. 하지만 카비리아는 조롱받아도 감정을 장식하지 않고 순간을 살아도 망설이지 않는다. 그럼에도 그녀는 아무것도 망가뜨리지 않는다. 그녀의 말에 상처받은 사람이 하나라도 있었던가. 최면에서 꺼낸 그녀의 소망에 담배 연기를 뿜은 건 극장의 관객이었다. 야만성은 그녀의 진심을 비웃고 있는 우리에게 있다.
카비리아는 자신을 물속으로 떠민 남자친구 사진을 보며 웃는다. 이 미소는 내 마음속 ‘영화’가 뭔지에 대한 진짜 이미지이다. 명료하고 원시적인 마음이 그 안에 있다. 이건 복수를 참고 자비를 베푼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증오가 불가능한 자의 미소이다. 이 역시 실제 세상에는 없는 것이다. 우린 현실의 땅 위에서 카비리아를 찾을 수 없고, 카비리아가 원하는 것은 밤거리에서 발견할 수 없다. 그녀는 세상과 분리되어 위로 올라서며 이야기는 다른 차원의 입체성을 획득한다. 카비리아는 자신의 허름한 집을 자랑하지만 알베르토(아메데오 나차리)는 대궐에 살면서 애인 때문에 괴로워한다. 그녀는 언제나 당당하지만 오스카(프랑수아 페리에)는 진실이 두려워 식은땀을 흘린다. “날 사랑하나요?” 이 물음에 관객은 답할 수 없으며, 무결한 그녀의 고해성사는 감히 수도사가 들을 수 없다. 카비리아의 모난 성격은 사실 위악이고 그녀에 대한 세상의 태도는 위선이다.
이 이야기가 슬픈 건 카비리아가 딱해서가 아니다. <카비리아의 밤>은 불쌍한 여자의 인생을 구경시켜주는 여러 이야기들과 도달한 곳이 다르다. 그녀의 본명인 ‘마리아’는 스스로에게 근거를 가지는 자다. 우리가 그녀를 구원하는 건 처음부터 불가능했다. 성녀를 벼랑 밖으로 미는 건 출구의 유일한 열쇠를 던져버리는 것과 같다. 다행히 오스카는 실패했고 카비리아는 다시 일어나 걸었다. 그리고 내 눈을 보며 ‘괜찮다’라고 웃어주었다. 제발 그녀가 우리에게 한번 더 희망을 가지기를….
조성희 영화감독. 단편 <남매의 집>(2008), 장편 <짐승의 끝>(2010), <늑대소년>(2012), <탐정 홍길동: 사라진 마을>(2016)을 연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