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냥은 고양이의 본능이다. 하지만 본능이라고 해서 그걸 반드시 잘한다는 의미는 아니다. 만약 본능이 곧 재능이었다면 나는 맛있는 걸 먹고자 하는 본능으로 타고난 곰손이라는 유전적 한계를 극복하고 매끼 <한식대첩> 파이널에 필적하는 밥상을 차려 먹었겠지, 안 되면 <삼시세끼>라도. 하지만 장조림을 만들겠다고 간을 보다가 간장물만 한 사발을 마시고는 배가 불러 널브러지는 것이야말로 재능이 본능을 따라잡지 못하는 자의 슬픈 운명이다.
우리집 고양이 마요도 비슷하다. 사냥 본능이 매우 발달한 마요는 내가 쥐돌이를 던지면 초속 5m의 속도로 돌진하곤 한다. 그렇게 일직선을 그리며 달리고 달리고 달리다가 사냥감도 지나치고… 까먹는다, 자신이 무엇을 위해 그 굵은 다리를 티코 바퀴처럼 돌리며 달려왔는지를. 그러고는 잠깐 어리둥절해하며 두리번거리다가 마치 원래 이런 볼일이 있어 현관까지 뛰어왔다는 듯이 그루밍을 두어번 하고는 머쓱해져서 돌아온다. 아아, 우리 마요, 5초 만에 사냥감의 존재 자체를 잊다니, 이름을 도리라고 지을걸 그랬어.
하지만 인간 사냥꾼은 그러면 안 된다. 꼬마 적부터 장총 쥐고 아빠 따라다닌 <대호>의 최민식 아들 석이가 말하듯이 포수는 “짐승 잡아 먹고사는” 운명이다. 누구도 포수에게 귀엽다며 사료나 닭가슴살 따위는 주지 않는다.
웬 백인 모험가가 오세아니아 탄나섬의 나말족에게 사냥을 배우는 다큐멘터리 <맨 헌트>를 보면 처음엔 야심차게 멧돼지 사냥을 나가지만 잘 안 돼서 나중엔 박쥐도 잡고 땅 파서 호저도 잡고 나무 털어 벌레도 잡고 강에 나가 물고기도 잡는다. 그럼 사냥꾼이 아니라 낚시꾼일 텐데. (그런데 자꾸 “매우 위험한 일이지요”를 연발하는 바람에 <정글의 법칙>이 생각나면서 백인 모험가님이 한번은 웃겨주기를 자꾸 바라게 된다.)
어쨌든 멧돼지를 먹고 싶은 본능은 벌레나 까서 먹어야 하는 재능 앞에 헛되고 헛된 것이니, 맛있는 고기를 향한 사냥꾼의 도(道)란 과연 어느 하늘 아래 놓인 것인지 고뇌하지 않을 수가 없는 것이다.
사실 사냥이란 매우 위험한 일이다. 다 자란 수컷 멧돼지는 몸무게가 100kg에 시속 70km까지 내달린다. (내가 다리 짧고 통통해서 100m를 20초에 달리는 거라고 누가 그랬어.) 그러므로 멧돼지를 만나면 이게 진짜 지리산 흑돼지라며 달려들 것이 아니라 소리치거나 움직이지 말고 우산을 펼친 다음 그걸로 몸을 가려 바위인 척하라고, 멧돼지 사냥 영화 <차우>가 그랬다. 돼지 무시하는 영화군. 거기에다 움직이지 않고 어떻게 우산을 펼쳐서 몸을 가릴 수 있는지는 알려주지도 않는 미스터리한 영화가 <차우>다.
멧돼지만으로도 이미 충분히 위험하지만 그래도 사냥이라면 역시 호랑이 사냥이다. <산척, 조선의 사냥꾼>이라는 책은 “호랑이는 화살 세발을 명중시키고도 창으로 세번이나 찔러야 제압할 수 있다는 기록이 있다”고 전한다. 에이, 좀더 써야 할 거 같은데, 세번으로 안 될 거 같은데. <대호>의 대호는 일본군 수십명이 총알을 퍼붓는데도 신경 쓰지 않고 한놈씩 깨물어주는 범 크러시, 호랑이계의 주윤발 같은 존재다. 저 많은 총알이 주윤발만 봤다 하면 알아서 비켜가지, <매트릭스>의 네오는 헛고생했다니까.
하지만 호랑이만 사람을 보고 눈 하나 깜짝하지 않는 건 아니다. 사람도 호랑이를 보고 눈 하나 깜짝하지 않는다. <산척, 조선의 사냥꾼>에 의하면 병인양요 최후의 결전을 위해 모인 군인 중에는 800명의 호랑이 사냥꾼 부대가 있었는데 “이들은 일찍이 호랑이와 대적하여 눈도 끔적하지 않을 사람들”이었다고 한다. 이 호랑이 사냥꾼들은 조선을 침략한 프랑스군을 격파하고 미군을 두렵게 했으며 훗날 홍범도 부대와 합류하여 일본군을 위협했다. 어찌 보면 이것이 진정한 사냥, 영역을 지키는 호랑이의 도(道). 미군에 맞서 처절한 패배를 눈앞에 둔 사냥꾼 부대는 “침울한 노래”를 부르며 “아무런 두려움 없이 흉장 위로 상체를 노출시킨 채 항전”했다지.
그런데 사냥꾼이 사냥을 하려면 무엇이 필요할까, 사냥터가 필요하다. 아니, 필요한 거야 많겠지만 총 없이 사냥터에서 맨주먹으로 사냥을 할 수는 있어도 사냥터 없이 총 들고 설치다가는 잡혀가니까, 그건 그냥 범인. 그게 <사냥>의 사냥꾼들이 사냥꾼일 수 없고 제목은 사냥이면서 사냥 영화일 수 없는 딜레마의 이유다.
산림녹화 사업의 중요성을 설파하는 <사냥>은 눈앞이 시원하게 뚫린 헐벗은 산야에서 사냥꾼들이 한치 앞이 안 보이는 울창한 산속에 들어온 척하며 여기저기 헛방을 쏴대는 영화다. 그렇지만 여기에도 진정한 사냥꾼이 한명 있으니, 왕년에 <무사>에서 모래언덕 타며 화살 쏘던 실력으로 이번엔 산을 타며 총을 쏘는 안성기다. 좀전에는 분명히 산속에서 총을 쐈는데 갑자기 계곡물 아래서 산신령 스타일로 솟아오르는 안성기, 탄광 사고에서 혼자 살아남은 상처를 안고 사격술이 아니라 도술을 연마했음이 분명하다.
이처럼 마음만 외로운 사냥꾼들은 어찌 살면 좋단 말인가. 먹고자 하는 본능이 매우 강한 마요 동생 마루. 나는 그런 방법이 통할 리가 없다며 고양이 무시하냐며 수의사가 비웃는데도 그냥 한번 마루 사료에 약을 섞어봤다. 그랬더니 아아, 우리 마루, 싹싹 핥아먹는구나. 마루는 행복한 고양이, 뭐든 먹고 싶은 본능이 뭐든 먹을 수 있는 재능과 합일을 이루었지.
세상에 사냥하고 싶은 건 많다. 돈이건 명예건 사람이건 좋은 게 보이면 낚아채고 싶은 게 인간의 본능이다. 하지만 낚아챌 능력이 없다면 그냥 마루처럼 맛은 없어도 배는 부른 행복한 고양이로 살아도 되지 않을까, 아니면 마요처럼 사냥감의 존재 자체를 잊어버리든지.
개인기가 사냥감을 부른다
사냥터를 확보한 사냥꾼들이 좀더 보태면 좋을 두세 가지 것들
첨단 장비
호랑이를 잡던 <대호>의 사냥꾼들은 발자국을 보고 배설물을 확인하며 호랑이를 뒤쫓지만 고작 멧돼지를 잡는 <차우>의 사냥꾼은 이런 걸 준비한다. 동작 감지기, GPS, 다이너마이트. 하지만 이 멧돼지는 300kg, 움직였다 하면 나무가 흔들리고 땅이 울려서 온 세상이 동작 감지기던데 쓸데없이 돈 자랑하던 그 사냥꾼은 결국….
개인기
<사냥>에는 안성기만 있는 게 아니다, 조진웅도 있다. 헐벗은 산을 헤매며 넘어지고 긁히고 동료들은 전부 죽어나가고 몸싸움을 벌이다가 물에 빠지기까지 하는데도 최후의 순간 그의 얼굴에 남은 건 작은 생채기 하나, 심지어 그새 옷도 바짝 말랐음. 당신이 인간계의 대호, 현실계의 주윤발입니다. 하지만 사냥꾼에겐 진정 개인기가 필요하다. <어얼구나강의 오른쪽>에 나오는 중국의 소수민족 어원커의 사냥꾼들은 나무로 피리를 만들어 사슴 우는 소리를 흉내낸다. 동작 감지기와 GPS는 사슴을 찾지만 피리는 사슴을 부르니 게으르고 싶은 사냥꾼이라면 개인기를 연마하는 것이 좋겠다.
사람 고르는 안목
<고스트 앤 다크니스>에서는 사자를 잡으려고 사냥꾼을 우리 안에 미끼로 넣어둔다. 마침내 신출귀몰한다더니 의외로 잘 속는 사자가 나타나지만 이 사냥꾼들은 코앞에 사자를 두고 총으로 창살만 골라 맞히는 신기를 발휘한다. 여기서 한 가지 의문, 창살을 맞히는 게 어려울까요, 창살 사이를 맞히는 게 어려울까요? 어디서 이런 것들을 골라온 거지. 사냥꾼은 마음은 외로울지 몰라도 몸은 외롭지 않아 보통 무리를 지어 사냥을 한다. 그러므로 짐승 찾는 안목만큼이나 중요한 것이 사람 고르는 안목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