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수민의 오독의 라이브러리]
[박수민의 오독의 라이브러리] <아수라>를 보고 나서 떠올린 <악의 손길>
2016-10-18
글 : 박수민 (영화감독)

한 영화를 사랑하는 일은 가끔, 실은 아무것도 사랑하지 않는 사람이 달리 줄 곳 없는 마음을 일생에서 겨우 찾아낸 한 대상을 향해 애써 쏟아붓는 일처럼 느껴질 때가 있다. 예를 들어 내가 경외하는 영화에 대한 누군가의 비웃음을 들을 때. 나는 그 영화가 굉장했고 마음에 들었는데 다른 사람들은 혹평하며 심지어 업신여길 때. 나만의 굉장한 발견을 남이 몰라주는 억울함이 아니라 내 감각이 타인과 공명하지 않는 것에 대한 슬픔. 대다수가 그다지 칭송하지 않는 영화를 개인의 성전(聖殿)에 올려두는 일은 마이너한 자신의 취향을 재발견하는 것이며 혼자서만 하는 사랑이다. 모든 외사랑은 쓸쓸하고 편협하다. 편협함은 결코 자랑스러워할 것이 못 된다. 하지만 바로 이 외사랑이 가능한 점 때문에 영화를 예술이라고 부를 수 있는 것 아닐까? 모두가 좋아/싫어한다는 말보다 ‘호불호가 갈린다’는 말은 얼마나 매력적인가.

‘지금 영화를 보고 있다’는 감각

1997년, 고교 1학년이었던 나는 이미 완벽한 속물 영화광의 태도를 갖추고 있었다. ‘절대로 방화(邦畫) 따위는 보지 않는다’는 걸 자랑스러워할 정도였다. 한국영화는 그저 여자 옷이나 벗기는 저질로 여겨졌고 비디오 가게에서 외국영화를 뒤지는 일만으로 충분히 꼬꼬마 비평가적인 발견의 욕구는 충족되었다. 그러다가 처음으로 방화를 보러 극장에 갔던 영화가 바로 <비트>(1997)였다. 보러간 이유는 첫째로 원작 만화의 팬이었기 때문이고, 둘째로 당연히 얼마나 못 만들었을까 눈으로 확인하고 싶었던 것이다. 한국영화로서는 홍콩과 할리우드영화에 필적할 정도로 많은 양의 필름을 썼고 또 그만큼 컷이 많다는 전단지의 글귀를 읽고 피식 웃었지만, 막상 영화를 보고 나선 솔직히 이렇게 재미있게 본 한국영화가 있었던가 싶었다. 그러나 나는 속물 영화광 소년이었기에 기어이 흠을 찾아냈다. 나는 주인공 민(정우성)이 죽는 영화의 결말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가 늘 하던 말처럼 정말로 ‘가늘고 길게’ 살고 있는 민을 로미가 멀리서 지켜보다 고개를 돌려버리고 마는 원작 만화의 결말이 훨씬 더 쓸쓸해서 좋다고 생각했다.

이제 20여년이 지나 감독과 배우가 그만큼의 세월을 머금고 만든 <아수라>(2016)를 극장에서 보면서, 오랜만에 ‘지금 영화를 보고 있다’는 감각에 스스로 흠칫 놀랐다. 영화를 보고 있으니 당연한 소리지만, 개인적으로는 최근의 주류 한국영화에서 좀체 느끼기 어려운 감각이었다. 숏과 컷의 연결에 영화적인 전략과 설계가 느껴지지 않는― 그냥 큰 스크린으로 보는 TV드라마 같은 여느 영화들과는 달랐다. 애초 캐릭터와 그들 각자의 목적으로 인해 연쇄하는 상황만이 스토리의 전부인 이 영화에서 나는 서사의 개연성에 문제가 있다고는 느끼지 못했다. 설명하기 위해 멈칫거리지 않고 캐릭터가 처한 상황을 오로지 액션으로 표현하면서 무서울 정도의 박력을 뿜어내는 영화의 에너지가 솟구치는 정점은 카체이스 신이다. 이 시퀀스의 기술적 성취는 물론이고, 이전까지 갈팡질팡 끌려다니기만 하던 한도경(정우성)이 갑자기 튀어나온 외국인 조무래기들에게까지 흠씬 얻어맞고 고막이 먹먹하게 된 상황에서 “내 총 내놔!” 하고 소리 지르며 드디어 본인만의 목적성을 가지고 미친 듯이 차를 몰아가는 감정의 폭발이 그대로 장면에 구현된 것이 더욱 대단했다. 감정과 액션의 텐션은 관객이 감당할 수 있는 한계를 시험한다. 영화가 뿜어내는 일방적인 에너지에 휘둘릴 수밖에 없는 관객은 내내 불편하다 못해 안절부절못할 지경이고, 피바다 세례식을 치러야 할 결말의 장례식장에 들어서면 끝내 나가떨어지고 말 것을 각오해야 한다. 이 시점에서 영화에 대해 관객이 슬슬 속으로 정해놓을 답은 사랑과 경멸 외에는 없다. 악당들이 드디어 만나 빈 영정 앞에 모여 카메라를 등지고 선, 악이 철철 넘치는 새카만 숏에서 나는 <아수라>가 올해의 시네마가 될 것임을 의심하지 않았다.

영화 편집의 위대한 장인 월터 머치가 쓴 책 <눈 깜박할 사이: 영화편집에 대한 연구>에서는 과거 할리우드에서 있었다는 어떤 테스트 시사(최근의 ‘블라인드 시사’와 같은 것)의 방법에 대한 일화가 나온다. 관객에게 영화를 본 즉각적인 감상을 묻는 대신, 며칠 후에도 이 영화에 대해 하고픈 말이 있다면 전화번호를 남겨달라고 했다는 것이다. 어쩌면 그냥 농담일지 모르는 이 일화에 내가 더하고픈 한 실화. 1957년, 어느 감독이 촬영을 끝내고 1차 편집본을 만든다. 이어진 테스트 시사에서 관객은 영화를 보고 경악했고, 어느 여성관객은 이 사악하고 추잡한 영화를 만든 작자들의 뺨을 때려주고 싶다며 분통을 터트렸다. 관객의 날선 반응에 깜짝 놀란 스튜디오는 곧장 감독 없이 추가촬영을 더해 새롭게 편집했고, 새 편집본을 본 감독은 영화의 편집을 본래의 것으로 되돌려놓길 간곡히 요청하는 58페이지 분량의 메모를 작성한다. “제가 오랜 시간 공들인 이 간결한 시각적 패턴을 받아들여주실 것을 간절히 바라는 마음으로” 써내려간 그의 요청은 전혀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이 메모에 따라 월터 머치가 영화를 재편집한 것은 감독이 이미 세상을 떠난 지 한참 뒤인 1998년. 내가 <아수라>를 보고 돌아와 이후 인터넷의 반응들을 보고는 고개를 갸웃하며 다시 라이브러리에서 꺼내본 영화. 오슨 웰스의 <악의 손길>(1958)이다.

안락한 의자에 앉아 감상하는 불편한 예술

멕시코에서 출발한 차가 국경을 넘어 미국에 도달하는 순간 ‘쾅!’ 하고 폭발한다. 아내 수지(재닛 리)와 신혼여행을 즐기던 멕시코 마약 단속 특임 검사 바르가스(찰턴 헤스턴)가 마침 사건의 현장에 있었다. 국경지대를 담당하는 베테랑 경찰 퀸란(오슨 웰스)이 그의 오랜 파트너 피트(조셉 칼리아)와 함께 사건을 맡는데, 용의자인 멕시코 청년을 손쉽게 유죄로 만들려고 증거 조작도 서슴지 않는 것을 목격한 바르가스는 오랫동안 지속된 퀸란의 부정한 행위를 밝히려 한다. 한편, 멕시코 마약 조직 그란데 패밀리의 엉클 조(아킴 타미로프)는 체포되어 구금 중인 형에게 불리한 증언을 막기 위해 바르가스의 아내를 협박하려고 접근한다. <악의 손길> 역시 캐릭터와 그들 각자의 이해관계로 부딪히는 상황이 이야기의 전부인 영화이다. 이 영화의 서사적 개연성은 영화 자체의 완결성과 별로 관련이 없다. 별 역할 아닌 것 같았던 피트는 퀸란과 엉클 조가 만나 가까운 술집으로 향하는 장면에서 의미 모를 눈물을 흘리더니 영화의 결말에서 가장 중요한 인물이 된다. 바르가스가 주인공인 것처럼 시작한 영화가 사실은 퀸란이 주인공인 영화로 끝난다. 퀸란은 그의 부정에 대한 증거를 얻으려 몰래 녹취를 하는 바르가스의 비겁함을 비난한다. 영화 마지막에 가장 중요한 대사를 말하는 것은 모든 장면을 다 합쳐 몇분 나오지도 않는 집시 여인 타냐(마를렌 디트리히)다. 영화를 보고나면 관객은 캐릭터들이 애초에 자신의 할 일만 하고 남의 일에 끼어들거나 계획을 바꾸지 않았더라면 그 모든 사태가 일어나지 않았을 것임을 깨닫는다. 그런데도 영화는 대단한 에너지와 영화적인 쾌감으로 가득하다. 카메라는 크레인을 이용한 롱테이크는 물론 핸드헬드까지, 요즘 영화에 뒤지지 않는 현란한 기교를 과시한다. 오슨 웰스 스스로 분한 퀸란의 광기어린 아우라는 이후에 나온 어떤 영화의 비리경찰도 상대가 되지 않을 것 같다. 편협함과 확신에 갇혀 오로지 자기 말만 하던 거구의 괴물이 동료의 피가 손에 묻자 허둥대며 쓰레기가 떠다니는 더러운 검은 물에 손을 씻는 이미지는 좀처럼 잊히지 않는다. 모텔에서 갱들이 재닛 리를 습격하는 장면은 정말로 소름끼친다. <악의 손길>은 하드보일드가 아니라 하드코어다. 오슨 웰스는 당시로는 가장 과격한 영화적 표현을 스튜디오와 관객과 검열을 향해 밀어붙였다. 이유는 단순하다. 그러지 않고서는 그가 그리려는 악을 표현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가 그린 악은 모두 자기 말만 하는 세상이다. 타냐의 대사처럼, 우리가 남들에 대해 뭐라고 말한들 대체 무슨 소용이 있는가?(What does it matter what you say about people?) 모든 인간은 자기 말만 하다 죽는다.

영화는 안락한 의자에 편안한 자세로 앉아 감상하는 불편한 예술이다. 가끔 예술은 감상만 하려는 자에게 불편한 경험을 요구한다. 영화가 관객에게 내미는 이런 손길이 때로는 악의 손길처럼 느껴진다. 이 생경함에 즉각적으로 반응하는 나의 반감에만 머물지 않고 좀더 시간을 갖고 곱씹어보는 일이 영화를 제대로 즐기는 방법이자 훈련이라고 나는 믿는다. 비록 지금 당장의 반응을 계속 전시하길 요구하는 SNS가 지배하는 세상에 살고 있을지라도. 정말로 사악한 영화들은 관객에게 온통 꿀 발린 부드러운 손길을 내밀고선 얼른 빨아줄 것을 원한다. 관객을 불편하게 만들면 돈을 못 버니까. 나는 <아수라>의 영화다움이 좋았다. 이 영화는 이전에 만들어진 비슷한 영화들이 자꾸만 바깥의 현실을 극장 안으로 끌고 와서 스크린 위에 덧씌우려는 노력을 하지 않는다. 서로 연애를 못해 안달인 남자들의 브로맨스가 악당에 맞설 정의이며 또 다른 짬짜미가 현실의 불공정과 비리를 해결할 수 있을 거라는 사기를 치지 않는다. 하드보일드가 아니라 하드코어인 <아수라>는 자기 선에서 가능한 영화적 해결만을 한다. 누구 하나 살려두질 않고 모든 악당들을 데리고 같이 죽어버리는 것. 오로지 영화에서만 가능한 해결책. 이런 영화가 지금 우리의 영화 시스템 안에서 만들어졌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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