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비평]
[김영진의 영화비평] <아수라>가 표현한 깊은 단념의 정조
2016-10-18
글 : 김영진 (영화평론가)

난 <아수라>가 김성수 감독의 회심의 역작이라 생각한다. 어린애스러운 남자들의 진면목을 탈탈 털어 보여줬다는 점에서 유아적이라고 여기는 사람도 있는 모양이지만 남자들의 어린애스러움을 어린애스러움 그대로 보여준 것은 대단한 용기다. 그리고 현재의 한국영화계 상황에서 스타 배우들을 데리고 이런 영화를 만들어낸 감독과 제작자의 솔직함과 결기에 탄복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현실을 경계 끝까지 밀어붙인 배짱

<아수라>는 어떤 면에서는 기시감을 불러일으키고 어떤 면에서는 그 기시감을 통째로 부정하는 영화이다. 사람들은 이 영화가 모두 다 알고 있는 것을 모르는 체 되풀이하거나 의기양양 자랑하는 것으로 오해한다. 이를테면 평소 남자들의 작태가 스크린에 비장하게 펼쳐지는 것을 싫어하는 듀나 평론가는 이 영화에 질리도록 표현된 마초주의의 이면에 심드렁하게 반응한다. ‘허핑턴포스트코리아’에 실린 칼럼니스트 허경의 글은 아예 이 영화가 남들이 다 알고 있는 것을 대충대충 아저씨들끼리만 알고 있는 기호로 뭉개고 넘어간다고 비판한다. 이는 이상한 일인데 보통의 경우, 관객이 작품에 기시감을 느낄 때는 동시에 전능감도 느낀다. 다음에 어떻게 전개가 될지 알고 있다는 느낌이 올라오면 그게 전폭적으로 공감이 가는 경우, 그 기시감은 일종의 숙명성의 징표가 되고 적어도 이야기의 세계 내에서는 관객이 전능감을 느끼게 마련이다. 이게 좋은 작품을 대하며 느끼는 관객의 공감을 설명할 수 있는 현상이지만 <아수라>의 경우에는 정반대다. 많은 사람들이 이 영화가 예상할 수 있는 대로 전개되는 데다 신물나게 보아온 마초 아저씨들의 숙명적인 비극을 극단적으로 과장하고 있다고 여긴다.

나는 좀 다르게 보고 싶다. 이 영화는 기시감을 반복해 재현하는 것이 아니라 기시감을 주는 상황을 전개하는 척하면서 우리가 보고 싶지 않거나 인정하고 싶지 않은 현실을 경계 끝까지 밀어붙인 배짱의 산물이다. 정치판의 전후맥락보다는 낯뜨겁고 민망한 정치판 내부의 맨살을 보여줌으로써 정치 포르노라는 비판을 받았던 <내부자들>(2015) 이래 어떤 수위의 묘사를 해도 한국의 현실을 과장한다는 비판은 무의미해져버렸다. 기득권 블록의 내부 동맹을 매우 어설프게 다뤘다는 <내부자들>에 대한 개봉 당시의 일부 비판은 그 뒤로 실제 벌어진 현실의 풍경 앞에서 속절없이 무너졌다. 한국의 실제 현실은 정치 포르노로 극화된 영화의 상상력을 이미 초월해버렸다. <아수라>는 더 나아간다. 이 영화의 후반부에 펼쳐지는 40여분간의 장례식장 살육 시퀀스는 우리가 현실에서 보는 것보다 더 심할 것 같은 아수라장을 담는다. 반대로 감독은 그런 일들이 충분히 극화될 수 있다고 생각하고 심지어 현실이 그보다 나을 것도 없다고 여기는 듯하다. 이 극화된 악의 아수라장에는 선과 악의 윤리적 판단이 들어설 여지가 전혀 없다. 이건 그때까지 타락한 시장과 억압적이고 무능한 검찰 관계자들, 그리고 그들에게 봉사하는 수많은 하수인들이 서로 얽혀들어가며 보여줬던 사건들에 대한 우리의 기시감들을 완전히 무너뜨려버린다.

영화의 주요 등장인물들이 예외 없이 다 척살당하는 결말을 제시하는 것은 서사적 작법 면에서 보면 이해하기 힘든 장치다. 남자들의 죽음을 다루며 비장미를 추구하는 영화들이라도 대개의 경우 결말에는 살아남는 누군가가 있기 마련이다. 생존자들은 남자들의 애인일 수도, 친구일 수도 있지만 관객은 그들과 동등한 증인의 위치에서 남자주인공들의 죽음을 애도한다. 관객은 영화 속의 생존자와 마찬가지로 살아남은 인간들이 마땅히 해야 할 일, 장례의 의무를 깨닫는다. 그럼으로써 슬픔이 지속되고 상징적인 장례를 치르는 사람으로 새롭게 자기를 규정하는 가운데 관객은 영화가 준 여운을 곱씹는다. <아수라>에는 그런 장치의 여운이 없다. 남자들의 아수라장에서 비교적 거리를 두고 있었던 거의 유일한 여성, 여자 경찰(윤지혜)도 처참하게 죽임을 당한다. <아수라>에서 등장인물들의 죽음은 증인이 필요하지 않은 죽음, 개죽음이다. 이런 죽음의 무가치성은 영화 첫 장면에서부터 이미 당당하게 공표됐는데, 한도경(정우성)이 정보원(김원해)에게 준 돈을 탐내던 한도경의 상사(윤제문)는 한도경과 격렬하게 싸우다가 우발적 사고로 죽는다. 그의 죽음에 대한 형식적인 애도 절차도 없이 한도경은 상사를 죽인 자신의 죄를 은폐하기 위해 더 많은 악행을 저질러야 하는 것이 이후 전개되는 영화의 내용이다.

관객 자신들의 거울을 보라고 권유하는 감독

<아수라>가 생존자 증인들을 영화 속에 남겨두지 않고 그럼으로써 상징적 장례를 치러야 할 관객과의 공모관계를 만들지 않은 이유는 자명하다. 여기에는 우리가 애도해야 할 의인이 전혀 없다. 우연적으로 의인이 된다고 하는 사건의 개연성 자체도 아예 차단해버린다. 정우성이 연기하는 주인공 한도경은 진화하는 주인공이 아니라 점점 더 수렁에 빠지고 타락하는 인물이다. 그는 겉치레뿐인 의리조차도 지킬 수 없는, 인간으로서 가장 처참하고 가련한 처지에 내몰려 자신을 이용하려고 하는 권력의 쌍방 진영을 향해 어느 쪽을 배신하지 않으면 좋겠느냐고, 화투로 치면 ‘쇼부’를 치는 상황을 연출하고서야, 곧 배신자임을 만천하에 공표하고 나서야 비로소 자신의 정체를 확인하는 인물이다. 한도경이 자신의 정체를 내외부적으로 확인하는 건 어느 편에 서든 자신을 살려주는 쪽을 택하겠다는 생존본능을 드러냈을 때뿐이다. 그는 카드 패를 먼저 보여줄 수밖에 없었다. 자신의 배신을 들키지 않고 아예 먼저 스스로 폭로해버리는 행위를 통해서만 그는 자신을 증명할 수 있었다. 이런 인물을 우리는 불쌍히 여길지언정 좋아할 수는 없다. 그는 영웅의 자질이 없었던 인물이고 서사적으로 영웅이 되는 우연적 계기를 부여받을 기회를 전혀 잡지 못한다. 김성수 감독은 잔인하게도 그런 한도경의 모습에서 관객 자신들의 거울을 보라고 권유한다. 감독이 우리게 내린 유일한 은혜는 그 인물을 연기하는 배우가 잘생긴 정우성이라는 것뿐이다.

이는 감독이 사디스트라는 말이 아니다. 한도경은 보통의 영웅상과는 거리가 멀지만 관점을 달리하면 그에게는 또 다른 비범함이 있다. 명시적으로 한도경은 죽어가는 아내를 살리기 위해 안남 시장 박성배(황정민)를 대신해 악행을 저지른다. 인간이 지닌 모든 사악한 기질을 체화한 듯한 악당 박성배는 자신의 이복동생이기도 한 한도경의 아내의 병원비를 비롯한 일체의 비용을 지불하면서 한도경을 노예처럼 부린다. 한도경에게 보호자인 박성배는 아버지의 대리인이며 그가 대표하는 시스템 역시 한도경이 의탁하는 가치일 테지만 한도경은 가짜 아버지 박성배를 처음부터 끝까지 믿지 않는다. 한도경은 박성배가 자신을 해치지 않을까 늘 두려워한다. 그는 박성배 앞에서 충성을 연기하지만 자신의 충성을 증명하기 위해 새롭게 임무를 부여받을 때마다 그는 자신의 부족한 연기 역량에 힘겨워한다. 이런 인물이기 때문에 그는 서사적 반전의 계기를 잡지 못한다. 가짜 아버지를 믿지 못할뿐더러 그 가짜 아버지가 지휘하는 시스템의 타락에도 전혀 동조하지 않지만 그걸 감추는 연기력도 부족한 데다 박성배 시장을 잡으려는 검찰 권력으로부터도 이용당하는 한도경은 사면초가의 인물이며 자신이 왜 이런 삶을 살게 됐는지 스스로 설명할 수 있는 언어가 없다. 이 영화에서 한도경이 가장 많이 하는 말은 ‘씨발’이라는 욕설이다. 그는 그를 그렇게 살게끔 만든 위로부터의 질서를 원망하지 않는데 역설적이지만 그럼으로써 아버지/시스템으로부터 벗어날 기회가 찾아온다. 그가 전혀 존경하지 않는 권력의 양축을 대하며 영화의 마지막 클라이맥스 장면에서 한도경은 그들끼리 서로 싸우게 만드는 지휘자로 올라서며 기꺼이 자기 목숨마저 제물로 내놓는다.

자기에게 주어진 악의의 소용돌이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그것을 분석할 수 있는 언어를 갖지 못한 채 욕설만을 내뱉으며 어떻게든 견디는 한 남자의 이야기를 다루면서 이 영화는 전락, 악의의 감염, 폭력의 전이라는 순환구조를 되풀이한다. 형, 동생 관계였던 형사 한도경과 문선모(주지훈)는 나란히 박성배의 노예로 전락하고 그들간의 우정은 생존을 위한 악의로 감염되며 원치 않는 폭력을 행사하는 가운데 함께 파멸한다. 이는 그들 두 사람을 제외한 다른 모든 이들에게도 똑같이 공유되는 경험이다. 김차인 검사(곽도원)나 그의 부하인 도창학(정만식), 박성배 시장, 그와 한통속이었던 조직폭력배 두목 태병조(김해곤), 심지어 공생관계였던 한도경과 악어라는 별명으로 불리는 약물중독자 정보원의 관계도 그렇다. 한도경은 초인적인 인내심으로 순수한 악의와 조우한 가운데 그 속에서 살아남으려 애쓴다. 이 세계가 놀라운 것은 자기들의 이익을 위해 사람을 훼손시키는 행위들이 만연해 있지만 사람을 치유하고 위로하는 그 반대편의 힘이 전혀 없다는 것이다. 이들의 반대편에서 그나마 유일하게 비난할 수 있는 인물이 있다면 한도경에게 당신이 한 나쁜 일의 죗값을 자신이 받고 있다고 힐난하는 한도경의 아픈 아내뿐이다.

구원의 부재

한국 사회의 축도처럼 제시된 안남시의 범죄 사회를 일별하면서 사악한 것으로서의 폭력이 횡행할 때, 그에 반하는 대립적인 힘으로 영웅이나 치유적인 결말을 제시하지 않은 것이 영화적 관습의 운용 면에서 어리석은 전략이고 심지어 영화적 지성 면에서도 유치한 것이라고 언뜻 비난할 수 있겠지만 나는 거의 실어증에 걸린 듯한 한도경의 모습을 통해 전혀 징징대지 않는 인물상을 그려냈다는 점에서 오히려 이 영화가 어른스럽다고 본다. 사회가, 제도가, 권력이 잔인하고 탐욕스럽고 무정하다고 비난하고 저주하고 이윽고 징징거리기는 쉽다. 아니면 그걸 훨씬 세련된 형태로 포장해 치유의 가능성을 암시하기도 쉽다. 김성수 감독의 입장에서는 이해하기 어려운 현상을 값싸고 단순한 서사의 틀로 회수하는 것을 철지난 응급조치로 생각하는 것 같다. 그보다는 우리가 당면한 이 폭력적인 세상을 저주하면서 그것을 장렬한 푸닥거리로 몰아낼 필요가 있다고 이 영화는 대담하게 선언한다. 더이상의 말은 통하지 않기 때문에 스스로 피해자나 수난자라는 자의식도 없이, 곧 어린애처럼 징징대지 않고 누군가가 권력자의 자리를 대신 차지해도 폭력의 순환구조는 끊기지 않을 것이라고 아예 체념하고 그 살육의 순환을 한계 너머까지 보여주는 선택을 함으로써 이 영화는 깊은 단념을 표현하고 있다. 너 대신 내가 그 자리를 차지하겠다는 살부 욕망 따위는 아예 안중에도 없고 부정한 너 대신 내가 그 자리에 정의의 인과응보를 심어놓겠다는 도덕률도 의식하지 않은 채 이 영화는 악당이 죽는 스펙터클조차도 실은 무의미한 것에 불과하다는 단념의 정조를 화면에 가득 심어놓는다.

영화 속 한 장면에서 박성배 시장은 손님들이 다 나간 좌담회장에서 물이 쏟아진 바지와 팬티를 벗고 서성대는데 이는 남자들의 권력욕에 대한 가장 직접적인 묘사일 것이다. 덜렁대는 자지를 과시하며 으스대는 것을 권력욕의 표현으로 삼는 것, 이 권력욕에 어떤 미사여구를 들이대도 본질은 변하지 않는다는 것, 거기에 굴종하는 모든 사내들의 내면 역시 그만큼 유치하다는 것, 그들 사이의 폭력에는 어떤 도덕률이나 윤리적 필터도 무의미하다는 것을 보여주는 조잡한 세계의 잔혹한 조감도로서 <아수라>는 갈 데까지 간다. 엄청난 비관주의의 산물로서 묘사된 세계지만 이 세계가 보여주지 않은 것은 영화 바깥의 현실 세계에서도 결여로 남아 있다. 극장을 벗어난 우리에게도 도덕이나 윤리 따위는 땅에 떨어진 지 오래인 황폐한 세상만이 남아 있다. 이 영화는 자지를 상징적 권력인 남근으로 오해하고 살아가는 남자들의 맨살을 드러내면서 영화 바깥의 세상에 대해 깊은 한숨을 토해낸다. 나는 구원의 부재를 다룰 만큼 김성수 감독의 스타일과 구성력이 인정받을 만한 수준에 올라선 것이라고 생각한다.

얼굴의 스펙터클

이제 마지막으로 정우성의 얼굴에 대해 논할 차례다. <아수라>의 빛나는 성취는 정우성의 얼굴이 없었으면 불가능했을 것이다. 이 영화에서 신의 축복으로 빚어진 정우성의 잘생긴 얼굴은 고난의 기호로 표상된다. 정우성이 연기하는 한도경의 얼굴은 과도하게 짓이겨지고 상처입고 밴드로 덧대어진 상태로 전시된다. 젊었을 적 정우성의 얼굴은 잘생겼으되 그 잘생김을 저 자신도 어쩌지 못해 숨기지 못하는 나르시시즘의 기운으로 충만했다. 그의 젊은 시절 대표작인 <비트>(1997)는 이런 자기도취적 기운을 청춘의 분위기에 실어 낭만성으로 포장했지만 그 미모가 스러져갈 운명임을 예감조차 하지 못하는 듯 느껴지기 때문에 백치미에 갇히는 위험을 극복하지 못했다. 저의 운명이 어찌될 줄 모르는 듯 보이는 그 숙명적인 백치미는 그 이후로도 오랫동안 정우성의 잘생긴 얼굴이 짊어져야 할 부담이었다. <무사>(2001)에서의 비장한 호위무사 역에서도, <좋은 놈, 나쁜 놈, 이상한 놈>(2008)에서 보여준 호방한 미모에서도, 심지어 일부러 어리벙벙한 촌놈을 연기한 그의 또 다른 대표작 <똥개>(2003)에서도 정우성의 자기도취적 백치미의 부담은 지워지지 않았다.

<아수라>에서 정우성은 전혀 다른 것을 보여준다. 중년이 된 실패자로서의 형사의 얼굴, 남을 이유 없이 때리고 그 이유 없는 폭력의 대가를 자신의 얼굴을 통해 고스란히 되돌려받는 조종당하는 자로서의 아픔을 드러내는 얼굴, 이제 중년이 된 정우성의 얼굴은 자기도취적 백치미를 완전하게 거두어내고 패배의 숙명을 감내해야 하고 할 수 있다고 다짐하는 자의 그늘을 만들어낸다. 한도경은 영화 내내 상대를 제압하는 것이 아니라 상대의 기운을 끝까지 받아내고야 말겠다는 눈빛으로 일관하는데 뱃속 깊은 곳에서 끌어낸 그런 자신의 기운도 결국은 상대의 권력 앞에서 소진하고야 말 것이라는 체념을 감추지 못하는 표정을, 정우성의 한도경은 연기한다. 극중 한도경도 연기하고 그런 한도경 역의 정우성도 연기한다. 이 이중의 연기를 관객이 체감하게 하면서 정우성은 자신의 배우 인생에서 새로운 전기를 맞이했다. 이 영화를 통해 비로소 획득한 이 존재감, 배우의 기운이 인물의 기운과 겹치는 단계로 올라선 이것은 영화 속 어떤 액션 장면보다 볼만한 얼굴의 스펙터클을 만들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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