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2]
[스페셜] <연인과 독재자>, 신상옥 감독과 배우 최은희의 영화보다 영화 같은 삶을 돌아보다
2016-10-26
글 : 조준형 (한국영상자료원 한국영화사연구소 소장)
1994년 유럽여행 중 헝가리 시내에서.

온갖 역경과 사건들로 점철된 한국현대사를 감안하면 ‘영화 같은 삶’이라는 제목은 70대 이상 한국의 어떤 갑남을녀에게도 해당할 법한, 범박하다 못해 클리셰로 느껴질 만하다. 그러나 아무리 생각해보아도 이 범박하게 과장된 표현 이외에 최은희와 신상옥이라는 한국영화사의 두 거목의 다사다난한 인생 역정에 붙일 적절한 제목이 떠오르지 않는다. 이 두 사람의 인생은 그들이 만들고 출연한 그 어떤 영화보다 극적이었으니 말이다.

<연인과 독재자>

만남, 그리고 고난의 연애

미술학도를 거쳐 해방 직후 영화계로 들어와 1952년 <악야>를 통해 데뷔한 신상옥과 일제강점기부터 연극 작업을 하다 해방 이후 영화배우로 자리를 잡아가던 1926년생 동갑내기 두 사람(이 부분에 대해서는 해명이 필요하다. 최은희는 줄곧 자신이 1930년생이라 주장했으나 몇해 전부터 1926년생임을 인정한 바 있다. 신상옥은 1925년생이라는 설도 있다)이 만나게 된 것은 1950년대 초의 일이다. 1954년에 발표된 <코리아>라는 신상옥의 세미 다큐멘터리영화에 최은희가 첫 출연을 하면서라고 한다.

씨네21

이 만남 이후 둘은 연인관계로 발전한다. 문제는 최은희가 유부녀, 그것도 일제강점기부터 활동한 촬영감독 김학성의 부인이었다는 사실이다. 최은희는 물론, 신상옥 역시 선배 영화인의 부인을 가로챈 파렴치한으로 영화계에서 기피 대상이 된다. 1950년대 초·중반 한국영화계는 좁은 바닥이었다. 이는 영화인들의 관계가 직업적이거나 상업적인 이해관계보다 인정과 의리로 움직이는 판이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즉 신상옥은 충무로의 ‘왕따’가 되었다. 길거리에서 난데없이 동료 영화인들로부터 뺨을 맞고 폭력을 당하는 일도 생길 정도였다고 하니 말이다. 그 가운데 그들은 어렵사리 영화작업을 꾸려가야 했다. 영화계를 적으로 돌리면서 결합한 이 커플은 단순한 부부 이상, 영화를 매개로 한 동반자로 굳게 맺어진다. <코리아>에서 <꿈>(1955), <젊은 그들>(1955)로 시작해 <지옥화>(1958), <자매의 화원>(1959), <동심초>(1959) 등으로 이어진 50년대 그들의 협업 과정에서, 신상옥은 단순히 가능성 있는 신예 감독에서 한국 영화산업에 영향을 미칠 거물 감독이 되고, 최은희는 대표적인 여배우의 지위에 오른다.

<연인과 독재자>

신필름이라는 제국을 일군 신상옥 감독

신상옥은 우리에게 단순히 유명 감독 정도로만 알려져 있지만, 그가 한때 (비록 상당한 과장이 섞인 표현이기는 하지만) 한국 영화산업의 절반이라 일컬어졌던 신필름을 이끈 제작자이기도 했다는 사실은 잘 알려져 있지 않다. 그런데 신필름이라는 명칭에 대해서는 다소의 설명이 필요하다. 많은 영화인들이 신상옥의 영화사 이름으로 신필름만 기억하지만 실제 신상옥의 영화인생에서 신필름이 공식적인 회사명(‘신필림’)으로 존재했던 기간은 그리 길지 않다. 납북 이전 1952년에서 1975년까지 20여년 동안 신상옥은 영상예술협회, 신상옥 푸로덕슌 , 서울영화사, 신필림, 안양필림, 신아필림, 안양영화주식회사, 신프로덕션 등 다양한 이름의 영화사로 활동했다. 나아가 1984년에서 87년 사이 평양에서 역시 신필림이라는 회사명으로, 탈북 후 미국에서는 ‘신프로덕션’(Sheen Production Inc)으로 활동했다. 남한만으로 한정할 경우 ‘신필림’이라는 영화사명은 정확히 1961년에서 1970년, 즉 신상옥 영화 활동의 최전성기 10년 동안만 쓰였는데, 그 대표성으로 인해 신상옥과 신필림이 동일시된 것이다.

신필름 제국의 근간이자 물적 토대가 되었던 작품은 <성춘향>(1961)이다. 동시에 제작되어 화제를 일으켰던 홍성기의 <춘향전>과 함께 한국 최초의 컬러 시네마스코프 영화로 기록된 이 영화는 당시까지 한국영화 흥행 스코어를 압도적으로 뛰어넘은, 서울 개봉관 36만명이라는 동원 기록을 세웠다. 신상옥과 최은희 커플은 이 시기 <성춘향> 외에도 <로맨스 빠빠>(1960), <상록수>(1960), <사랑방 손님과 어머니>(1961), <연산군> 연작(1962), <로맨스 그레이>(1963), <벙어리 삼룡>(1964), <빨간 마후라>(1964) 등을 연속적으로 히트시켰다.

<연인과 독재자>

신필름이 제국에 가까운 면모를 본격화하게 된 것은 정치인 김종필의 배려하에 1966년에 동양 최대의 스튜디오인 안양촬영소를 헐값으로 인수하면서부터였다. 한때 전속 감독과 배우, 촬영과 편집, 기획에 이르기까지 200명에 가까운 직원을 두었다고 전해지는 이 영화사는 많게는 한해 30편 이상의 영화를 빵처럼 찍어냈다. 가히 한국식 꿈의 공장이었던 셈이다. 그러나 이같은 대량생산 시스템은 오래가지 못했다. 1960년대 말 이후 영화산업은 불황에 빠져들었고 엄청난 인건비와 운영비를 감당해야 하는 대형 촬영소와 인력 시스템은 위험을 수반하게 마련이었다. 신상옥이 국내의 영화시장에 머물지 않고 해외로의 진출을 염원했던 것은 어쩌면 한국이라는 좁은 영화시장에 머무르기에 그의 그릇이 너무 컸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연인과 독재자>

세계사에 기록된 납북사건의 전말

위기는 점점 커졌다. 1960년대 말부터 영화사는 상시적인 부도의 위기를 맞았고, 박정희 체제가 완고해지고 정부의 규제와 검열이 강화되면서 신상옥의 불만 역시 높아져갔다. 이에 따라 박정희, 김종필과의 돈독한 우애관계는 1970년대로 접어들며 소원해졌다. 결국 1975년 <장미와 들개>라는 영화 예고편에 검열에 없던 키스 신이 삽입되었다는 사소한 이유로 정권은 신상옥의 영화사를 폐업해버린다. 설상가상으로 이 시기에 최은희와 신상옥의 관계 역시 파탄이 났다. 신상옥과 영화배우 오수미의 ‘불륜’에 대해 최은희는 한때의 바람이라 여겼지만 그들 사이에 아이가 둘이나 생기고서야 파탄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1975년 영화사가 문을 닫은 후에도 신상옥은 재기의 꿈을 버리지 않았다. 그는 일본과 미국, 홍콩 등을 다니며 재기의 가능성을 모색했으나 뚜렷한 성과를 거두지는 못했다. 그사이 최은희는 안양예술학교의 교장으로 교육자의 길을 걷게 된다.

그러나 1978년 뜻밖의 사건이 이 두 부부를 운명처럼 다시 만나게 만들었다. 1978년 1월, 안양예술학교의 후원자를 만나기 위해 홍콩으로 건너간 최은희가 납북된다. 그리고 외국을 떠돌며 재기를 모색하던 신상옥 역시 최은희를 찾아 홍콩으로 갔다가 7월에 납북된다. 한국은 물론 전세계를 떠들썩하게 만들었던 최은희-신상옥의 납북사건이 발생한 것이다. 흥미로운 점은 한국 영화인 중 상당수가 최은희는 몰라도 신상옥은 자진 월북했을 것이라 짐작하기도 했다는 사실이다. 영화만 만들 수 있다면 북한이라도 자진해서 월북할 사람이었다는 것이 추정의 근거였다. 어쨌든 이 부분에 대해서는 이번에 개봉한 영화 <연인과 독재자>에서 상당 부분 해명이 이루어지고 있는데, 가장 중요한 근거는 최은희, 신상옥 두 사람을 납북해왔다는 김정일의 육성녹취다(자세한 내용은 영화를 통해 들을 수 있다).

흔한 예측과 달리 신상옥과 최은희가 북한에서 바로 조우한 것은 아니었다. 먼저 납북된 최은희가 북한에 도착하자마자 김정일과 만나 비교적 안락한(?) 환경에서 연금생활을 한 반면, 신상옥은 북한에 도착해 3번에 걸쳐 탈출을 시도했고 거의 5년을 수용소에서 보냈기 때문이다(이 사실만으로도 신상옥이 자진 월북했다는 세간의 평판에 오류가 있을 수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북한영화 <돌아오지 않는 밀사>(1984) 촬영현장.

어쨌든 둘은 납북된 지 5년 후인 1983년에야 조우한다. 김정일은 최은희와 신상옥을 예고 없이 해후하게 한 깜짝쇼를 벌였고, 그 자리에서 신상옥을 자신의 영화 고문이라 선언했다. 그리고 신상옥과 최은희는 남한과도 비교할 수 없는 대규모의 지원하에 북한 신필림을 만들었다. 신상옥은 1986년 탈북에 성공하기까지 3년이 채 안 되는 기간 동안 무려 7편의 영화를 연출했고, 10편의 영화를 제작 지휘했다. 그중 <돌아오지 않는 밀사>(1984)와 <소금>(1985)이 카를로비바리 영화제와 모스크바국제영화제에서 수상함으로써 북한영화의 국제적 위상을 높이고자 했던 김정일의 기대는 채워졌고, 부부에 대한 김정일의 신뢰 역시 높아졌다. 어쩌면 충분한 재정적, 정책적 지원하에 상업적 부담 없이 제작과 연출에 몰두할 수 있었던 북한에서의 영화작업은 영화인으로서 신상옥에게 더할 나위 없는 기회이기도 했을 것이다.

북한영화 <탈출기>(1984) 촬영현장.

극적인 탈북, 그리고 할리우드에서의 재기

파란만장한 부부의 모험에 찬 인생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1986년 3월13일 그들은 공동제작 논의를 위해 오스트리아로 향했다 빈 주재 미 대사관으로 극적으로 탈출, 미국으로 망명했다. 그리고 3년간 워싱턴의 안가에서 생활했다. 최은희는 이 3년이 인생에서 비로소 평온함을 찾았던 기간이라 회고한다.

3년이 지나자 그들은 LA로 이주했다. 그리고 영화에 대한 열정을 잃지 않은, 아니 잃을 수 없는 신상옥은 할리우드에 도전했다. 사실 신상옥이 할리우드에 도전하여 어느 정도의 성취를 이루었다는 사실은 많이 알려지지 않았다. 그는 할리우드에서 필생의 프로젝트인 칭기즈칸에 몰두했다. 그러나 한 일본인 지인의 후원으로 제작에 들어갔던 야심작 <칭기즈칸>이 일본 거품경제의 붕괴와 함께 좌절되고 남은 돈 300만달러로 가까스로 만든 저예산 아동영화 <3 Ninjas>가 신필름 (Sheen Production Inc.)의 첫 할리우드 작품이 되었다. 어렵사리 만든 이 영화는 디즈니의 배급으로 개봉 첫주 박스오피스 6위에 오르며 그해 제작비 대비 가장 큰 수익을 남긴 영화로 기록되었고, 신상옥은 이 영화로 투자금과 배급비용을 제하고도 1천만달러를 벌어들이며 할리우드에 안착했다. 하지만 이후에 만든 속편들이나 <갈가메스>(1996), <가드너>(1998) 등은 흥행이 신통찮았다. 그는 미국의 영화 시스템을 몰랐고, 동원할 수 있는 자본도 적었으며, 무엇보다 할리우드에 적응 하기에는 너무 나이가 많았다.

그리고… 신상옥과 최은희 부부는 1999년 이후 한국으로 돌아왔다. 여전히 신상옥은 칭기즈칸이나 함흥철수작전 등 자신의 필생의 프로젝트에 정열을 불태웠으나, 70이 넘은 노영화인에게 기회가 오지는 않았다. 그저 저예산으로 만든 <겨울 이야기>(2004)를 유작으로 남긴 채 2006년 작고했다. 작고 이듬해인 자서전 <난 영화였다>가 출간되었다. 최은희는 신상옥의 유산을 기리는 사업을 후원하며 살고있다. 최은희 역시 2007년 자서전 <최은희의 고백>을 출간했다. 남한과 북한, 홍콩과 미국에서 작업한 세계 유일의 영화인이라는 신상옥이 그의 영화사를 통해 만들어낸 영화는 거의 240편을 상회한다.

사진제공 신상옥감독기념사업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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