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웃음하고 설움은 그야말로 종이 한장 차이라고, 눈물을 알지 못하면 웃음 또한 알 수 없는 거지. 눈물 스민 웃음을 끌어내는 것이 진짜 코미디인 거야.” 전쟁의 폐허와 재건의 욕망이 공존하던, 그렇게 모두가 가난했던 시절, 무대와 영화, 라디오와 TV를 종횡무진 누비며 서민들의 고단하고 눈물겨운 삶에 따스한 웃음을 불어넣었던 ‘막둥이’ 구봉서가 지난 8월27일 세상과 영원한 이별을 고했다. 향년 90살. ‘김수한무 거북이와 두루미…’, ‘형님 먼저, 아우 먼저’ 같은 불세출의 유행어를 남기며 오랜 세월 남녀노소 모두에게 두루 사랑받았고, 코미디를 평가함에 유달리 인색했던 이 땅에서 코미디에 대한 애정을 놓지 않으며 평생을 희극인으로 살다갔던 그. 존재 자체로 한국 코미디의 역사라 할 수 있었던 그의 삶과 흔적을 더듬으며 ‘눈물이 있는 진짜 코미디’의 세계를 추구했던 우리 시대 원조 희극지왕, 구봉서를 떠나보내고자 한다.
막둥이, 코미디의 별이 되다
얼굴만으로 웃음을 자아내는 다른 동료 희극배우들에 비해 비교적 준수한 외모와 건장한 체구, 정확한 표준어, 볼록한 양 볼 가득 바람을 불어넣은 채 눈동자를 굴리며 만들어내던 우스꽝스러운 표정. 1960~70년대 ‘여장남자’ 시리즈 등으로 환상의 콤비를 이루었던 심우섭 감독의 표현대로 “잘생긴 얼굴로 엉뚱한 행동을 하니 웃겼던” 구봉서는 한국 코미디사에서 가장 오랫동안, 가장 많은 코미디영화의 주연을 맡은 배우이자 시대를 풍미한 대중스타였다.
알려진 것처럼 그의 연예계 입문 과정은 우연인 동시에 운명적이었다. 비교적 유복한 환경에서 성장한 그는 유치원 무렵 방송국 동화구연과 낭독 프로그램에 출연할 정도로 끼 많은 소년이었다. 공부보다는 음악과 독서를 좋아해 음악학원에서 성악을 배우기도 했던 그는 중학생 무렵, 친구들과 아코디언을 들고 어울려 다니다 악사를 찾던 태평양가극단 관계자의 눈에 띄어 길거리 캐스팅되었다. 태평양가극단은 <눈물 젖은 두만강>으로 유명한 김정구와 김용환 형제가 운영하던 당대 최고 가극단 중 하나였다. 의사가 되기를 원했던 부친에게 딱 사흘만 하고 그만두기로 약속하고는 극단을 따라나섰지만 그 사흘은 열흘이 되고 한달이 되었다. 그러던 어느 날 공연 직전 갑자기 사라진 배우를 대신해 정신없이 올랐던 무대에서 관객의 호응을 얻으며, 그렇게 희극배우 구봉서의 평생이 시작되었다. 포스터에 이름만 걸어도 관객이 몰릴 정도로 최고의 인기를 구가하던 그는 전쟁 시기 부산과 제주도 등에서의 군예대 생활을 거쳐, 당시 많은 악극단 스타들이 그러했듯 자연스럽게 무대에서 영화계로 활동 무대를 옮긴다.
1956년 <애정파도>로 영화 데뷔한 그는 1958년 권영순 감독의 <오부자>가 흥행에서 대성공을 거두면서 대중의 사랑을 한몸에 받는 코미디 스타로 떠오르게 된다. <신라의 달밤> <굳세어라 금순아> 등으로 유명한 가요계의 히트제조기 박시춘이 음악을 맡은 <오부자>는 무수한 아류작을 양산시키며 한국영화에서 처음으로 코미디 장르를 촉발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그리고 여기서 구봉서가 연기한 귀엽고 익살스러운 막내 ‘막둥이’는 이후 ‘살살이 서영춘’, ‘비실이 배삼룡’처럼 온 국민이 부르는 그만의 애칭이 되었다. 이후 400여편의 영화에서 주연 혹은 비중 있는 조연으로 활약한 그의 연기는 비단 코미디뿐 아니라 이만희 감독의 <돌아오지 않는 해병>(1963)이나 유현목 감독의 <수학여행>(1969) 같은 정극에서도 빛을 발했다. 특히 <돌아오지 않는 해병>에서 코믹한 언행과 장난으로 전쟁의 긴장감을 늦추고 전우애를 돈독히 하는 사병으로 분한 그의 능청스러운 연기는 역설적이게도 전쟁의 참혹상과 죽음과 마주한 인간의 본능을 담고자 한 영화의 의도를 가장 잘 보여주는 것이기도 했다.
이후 구봉서는 동아방송, 문화방송 같은 상업 방송국의 개국과 함께 또 다른 전성기를 만들어갔다. <안녕하세요 구봉서입니다> <막둥이 가요만보>처럼 방송국마다 그의 이름이나 별명을 내건 프로그램들이 생겨났다. 공개 코미디 프로그램의 원조 격인 MBC의 <웃으면 복이 와요>는 1969년부터 1985년까지 무려 15년간이나 지속됐는데, 그가 출연했던 프로그램 개수만 70~80개에 달한다고 한다. 전성기 그의 인기는 매일 아침 그가 진행하는 시사 프로그램을 듣기 위해 회사원들이 출근시간을 늦췄다거나 <웃으면 복이 와요>가 방영되는 날은 술집이 한산했다는 등의 일화를 남기기도 했다. <막동이 신혼 10개월>(감독 심우섭, 1969), <구봉서의 벼락부자>(감독 김수용, 1961), <구봉서의 구혼작전>(감독 심우섭, 1970)처럼 그의 별명이나 이름을 전면에 내세우거나 <이거 됩니까 이거 안됩니다>(감독 박종호, 1964), <형님 먼저 아우 먼저>(감독 심우섭, 1980)처럼 유행어를 제목으로 삼은 영화들 역시 당시 그의 대중적 인지도를 방증하는 것이리라.
장르로서의 구봉서, 남자는 괴로워
구봉서가 선보인 영화 속 인물들은 양훈이나 김희갑, 송해, 배삼룡 등 동시대 활약했던 다른 희극배우들과는 조금은 다른 모습이었다. 여러 주인공들이 등장해 좌충우돌 연애담을 벌이다 결국 모두 합동결혼식을 올리는 것으로 끝나는 영화의 ‘막둥이’ 캐릭터나 시골에서 상경해 취업과 사랑을 모두 이루려 고군분투하는 시골청년 캐릭터가 그것이었다. 예컨대 강부자의 젊은 모습을 만날 수 있는 <구봉서의 구혼작전>에서처럼 씨름에서 우승해 소를 탈 정도로 힘센 시골 처녀에게 번번이 당하는 약골 남자 운전기사라든지 뜨개질이 취미인 회사원같이 통념적인 성역할에서 벗어난 모습들을 다수 선보였다. 이렇듯 그의 조금은 다른 이미지는 심우섭 감독과 콤비를 이뤄 코미디 전통이 드문 한국영화사에서 하나의 독특한 장르를 형성한 ‘여장남자’ 시리즈에서 더욱 두드러졌다.
1965년 김기풍 감독의 <여자가 더 좋아>의 폭발적인 성공 이후 한국 코미디영화의 인기 소재가 된 ‘여장남자’는 심우섭 감독, 구봉서 콤비의 <남자 식모>(1968), <남자미용사>(1968) <남자와 기생>(1969) 등 이른바 ‘남자’ 시리즈와 <팔푼이 사위>(1968), <팔푼며느리(팔푼이 며느리)>(1968), <팔푼이 부부>(1969) 같은 ‘팔푼이’ 시리즈 등으로 성공적으로 이어졌다. 특히 ‘남자’ 시리즈에서 구봉서는 여장을 하고 기생이나 미용사, 식모 등 전통적으로 여성의 영역으로 인식되던 직업에 뛰어들면서 온갖 소동의 중심에 선다. 그런데 그가 여장을 하고 새로운 직업을 갖게 되는 것은 가족을 돌봐야 하지만 남자로서 취직할 곳이 없기 때문이다. 이 과정에서 그는 스스로 소동을 일으키거나 휘말리지만, 중심을 잃고 세태에 마구잡이로 휘둘리는 다른 인물들을 타이르고 질서를 바로잡는 이는 결국 구봉서 자신이었다.
한국영화연구자 박선영이 명명하듯 ‘구봉서 장르’ 혹은 ‘구봉서 코미디’로 부를 수 있는 이 특별한 코미디영화들은 성역할 전도라는 전복적이며 풍자적인 소재로 시작하지만 결말은 대개 여장을 벗고 기존의 성역할로 돌아가 건전한 가정을 이루는 식의 다분히 교훈적이며 보수적인 내용이 대부분이었다. 그리고 이는 전복된 상식을 바로잡으면서 결혼을 통한 건전한 신분상승을 이루고자 하는 당시 제도 사회의 요구에 부합되는 것이었다. 무엇보다 그 중심에 로맨스가 가능한 준수한 외모와 평소 엄격하고 가정적인 사생활로 다져진 ‘건전하고 명랑한 소시민’으로서의 ‘구봉서’가 있었다. 하지만 동시에 여장남자를 통한 성역할 전도의 욕망과 새롭게 요구되기 시작한 여성의 사회적 진출, 취직을 위해 도시로 올라오는 시골 청년, 근대화 과정에서 조금씩 부각되기 시작한 빈부격차와 신분상승의 욕망 같은 당대 대중의 욕망과 의도치 않은 균열을 엿볼 수 있었던 것 또한 사실일 것이다.
“내가 지금 죽으면 누가 너희들을 웃기지”
그 자신이 한국 대중문화의 변천사라 할 정도로 극단에서 영화, 방송으로 무대를 옮기며 대중에게 건전한 웃음을 선사했고, 그 역시 대중의 사랑을 한몸에 받은 스타였지만 동시에 세상은 그가 평생 전하고자 했던 웃음에 항상 너그러웠던 것만은 아니었다. 난생처음 서울로 수학여행 온 낙도 어린이들과 아이들을 돌보는 교사의 감동적인 이야기를 다룬 유현목 감독의 <수학여행>(1969)은 배우 구봉서의 진가가 빛을 발하는 작품이다. 이제는 찾기 힘든 아이들의 순수한 모습과 열정적인 교사의 진심 그 자체가 감동적인 이 작품은 테헤란아동영화제에서 작품상을 수상하기도 했지만 정작 국내에서는 코미디 배우가 주연을 맡았다는 이유로 저급영화 취급을 받았다고 전해진다. 당시 초등학교 아이들에게 가장 존경하는 인물로 뽑혔다고 문화공보부 장관에게 불려가 조심하라는 주의를 들었다는 일화 역시 코미디에 대한 세간의 편견이 어떠했는가를 방증하는 사례 중 하나일 것이다. 그는 종종 기회가 될 때마다 후배들의 처우에 대해 안타까운 심경을 비치곤 했는데, 어쩌면 이 역시 대중의 넘치는 사랑을 받았지만 동시에 보이지 않는 편견 속에 상처받았을 자신의 지난날을 향한 회한이 투영된 것이 아닐는지.
고백하자면 언젠가 그를 만날 기회가 있었더랬다. 2008년 <청춘의 십자로>라는 무성영화를 변사 공연으로 재구성하면서 김태용 감독, 조희봉 배우 등과 이것저것 모색하던 무렵 한 신문사에서 선배 배우와 신진 변사를 꿈꾸는 젊은 배우의 조합으로 구봉서 선생과 조희봉 배우의 만남을 주선한 자리였다. 그리 길지 않은 시간이었지만 악극단 시절의 이야기와 어린 시절 경험했던 변사의 존재, 그리고 라디오 프로그램에서 직접 변사를 진행하기도 했던 이야기를 들려주며 영화와 웃음의 의미를 이야기하던 그의 눈빛은 코미디와 연기에 대한 애정으로 여전히 빛나고 있었다. 생각하면 짧은 인연이었지만 그 시간들은 흑백영화와 TV 브라운관 속 인기 코미디언으로만 존재했던 추억의 스타가 영화라는 통로를 통해 개인적으로는 영원히 잊을 수 없는 존재로 각인되는 순간이기도 했다.
“내가 지금 죽으면 누가 너희들을 웃기지.” 영화 <돌아오지 않는 해병>에서 죽음 직전 그가 남긴 마지막 대사는 가뜩이나 척박한 한국 코미디영화의 계보에서 원조 희극지왕들이 하나둘씩 떠나고 있는 지금, 더욱 사무치는 말인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사람들이 구봉서를 떠올리면서 그래 옛날에 구봉서가 있었지, 그 사람 코미디할 때 좋았어”라고 말하는 것을 듣고 싶다 했던 그의 평소 바람처럼 가끔은 스크린을 통해 혹은 오래된 기억을 통해 한국영화에서 처음이자 어쩌면 앞으로도 유례를 찾기 힘들 코미디 전성시대를 열어갔던 한가운데에 그가 있었음을 기억하고 웃을 수 있기를 바라본다.
* 본 내용은 박선영의 논문 <한국 코미디영화 형성과정 연구>(중앙대학교 박사학위 논문, 2011)를 참고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