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화정의 다른 나라에서]
[이화정의 다른 나라에서] 쓸쓸한 사랑의 도시
2016-11-03
글 : 이화정
<남과 여>

프랑스 북부 지역 도빌은 노르망디 근처의 조용한 도시로, 노르망디 전통 양식의 가옥들이 여느 프랑스와는 다른 감흥을 안겨주는 곳이다. 바다를 따라 늘어선 목조 다리가 정취를 더하는 곳. 특히 코코 샤넬이 이 지역의 아름다움에 반해 첫 번째 부티크숍을 열었으며, 명품숍과 카지노, 요트 등이 즐비한 럭셔리한 도시로 알려져 있다. 각종 페스티벌의 도시이기도 한데 특히 영화와도 인연이 깊다. 도빌아메리칸영화제, 도빌아시아영화제 등이 열리며, <남과 여>뿐만 아니라 <007 카지노 로얄>의 촬영지이기도 하다.

<남과 여>

프랑스에서 기차로 2시간. 도빌은 북부에 있는 작은 해변 도시다. ‘작은 프랑스’로도 불리는 그곳이 알려진 건 아무래도 클로드 를르슈 감독의 영화 <남과 여>(1966) 때문일 거다. 내게는 프랑수아 레이의 테마곡과 함께 흑백영화처럼 유독 희뿌옇게 인상이 남아 있는 도시다. 한번은 미하엘 하네케의 <아무르>(2012)로 장 루이 트랭티냥이 2012년 칸국제영화제를 찾았다. 영화를 찍은 지 한참 지난 때였으니 카레이서로 분했던 젊고 자신만만하고 핸섬한 프랑스 남자 장의 모습은 오간 데 없었다. 피부에 온통 검버섯이 피고 구부정한 등을 한 초로의 노인이, 죽음을 앞둔 부인을 돌보는 모습을 보면서, 나는 왠지 <남과 여>의 장이 그렇게 늙은 것 같아 좀 씁쓸한 마음이 더해졌다.

<남과 여>

클로드 를르슈 감독 역시 그 아름다웠던 장 루이 트랭티냥의 활기를 다시 보고 싶었던 걸까. 최근 <남과 여>의 속편 소식이 전해져왔고 국내에서는 <사랑이 이끄는 대로>(2015)라는 제목으로 개봉했다. 이번엔 장 루이 트랭티냥 대신 <아티스트>(2011)에 출연한 프랑스의 국민배우 장 뒤자르댕을 캐스팅했고 조금은 코믹한 면모까지 추가했다. 물론 ‘나의 종교는 사랑이다’라는 감독의 사고방식은 마찬가지로 적용된다. <남과 여>에서 남편을 잃은 30대 미망인 안(아누크 에메)과 아내가 자살한 후 혼자 사는 카레이서(장 루이 트랭티냥), 각각 아이들을 도빌에 있는 기숙학교에 보내려 온 둘이 자석처럼 이끌렸다가 먼저 보낸 배우자에 대한 죄책감으로 괴로워하는 것처럼, <사랑이 이끄는 대로>의 남녀 역시 마찬가지의 죄책감에 사로잡힌다. 이번엔 프랑스에 여자친구가 있는 영화음악 작곡가 앙투안(장 뒤자르댕)과 남편이 프랑스 대사인 대사 부인의 사랑 이야기다. 조금 느닷없는 건 클로드 를르슈 감독이 한적한 도빌 같은 프랑스의 도시가 아니라 혼잡한 인도 여행을 택했다는 점이었다. 차와 오토바이와 사람과 소가 한데 엉켜 인도와 차도의 구분이 무의미한 거리에서 카메라를 든 영화 속 감독은 그 도시에 심취해 촬영을 하고, 멜로영화를 제작할 결심을 한다. 복작거리는 그곳에서 용케도 사랑을 발견한 감독은 물론 클로드 를르슈 감독 자신이다. 아예 “인도를 조금만 더 일찍 알았더라면 내 모든 영화를 이곳에서 찍었을 거다”라는 말을 듣고, 갑자기 <남과 여>의 장과 안을 갠지스강에 데려다놓는 상상을 해보고 고개를 저었다.

도빌에 간 건 늦여름이었다. 워낙 작은 도시라 반나절만 다녀와도 도시를 여행하는 데 무리가 없다는 가이드를 얻었다. 이미 피서객이 한 차례 지나간 탓일까, 목조 다리가 있는 쓸쓸한 바닷가가 오히려 겨울이 배경이던 영화 속 모습과 닮아 보였다. 영화를 찍었다고 알려진 목조 다리를 한번 걸어보고, 모래사장을 밟았다. 바닷가 레스토랑에 들어가 홍합과 사과주를 함께 먹었다. 프랑시스 레이의 그 유명한 테마곡이 들리지도 않는데, 그곳에서는 이미 들리는 것 같았다. 사랑한다는 안의 전보에 빗속을 운전해 파리로 간 장은, 안이 딸과 도빌에 있다는 걸 알고, 다시 도빌로 달려간다. 그리고 도빌의 바닷가에서 해후하는 문제의 그 장면. 이후 많은 영화, 드라마, CF에 영향을 미치며 클리셰로 굳건히 자리한 감격의 재회 장면과 두 남녀를 감싸고 회전하는 카메라워킹이 떠올랐다. 홍합 조리가 잘못된 건지 레스토랑을 잘못 골라 들어간 건지 홍합의 비린 냄새가 배어들어 맛을 가늠할 수 없는 감자튀김을 먹으면서 그 장면을 떠올렸다. 아무래도 그때 클로드 를르슈 감독의 카메라워킹은 좀 과했던 것 아닐까. 물론 의도는 알겠지만, 카페에서 서로를 하염없이 끌어안는 연인을 보는 심경처럼 조금은 민망한 장면이랄까. 클로드 를르슈 감독은 휑한 바닷가의 전경에 딸과 함께 있는 안을 위치시킨다. 장이 그녀의 마음을 모르는 것처럼, 관객 역시 안의 표정을 살필 수 없는 그때. 클로드 를르슈 감독은 장의 초조함만큼 안 역시 기다림을 갈구하고 있었다는 걸 확연히 알려준다. 그 확인에서 오는 과한 기쁨을 포착한 시선이 파장을 불러일으켰으리라.

흥미로운 지점은 클로드 를르슈 감독이 영화를 찍던 당시 그는 영화계에 알려지지 않은 29살의 신인감독이었다. 영화 공부를 정식으로 하지도 않은 젊은 감독의 작품이었지만 실험적인 형식이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특히 컬러와 모노크롬을 혼용한 이 영화의 독특한 촬영기법이 주목을 받았고, 칸국제영화제 황금종려상과 아카데미 각본상, 외국어영화상 등을 수상하는 성과를 올렸다. 당시 워낙 자금에 쪼들렸던 그는 각종 아르바이트를 하며 영화를 만들어야 했는데 그렇게 모은 제작비가 부족해 영화를 모두 흑백으로 촬영하려다 나중에 사정이 좋아지면서 일부 장면을 컬러로 촬영했다. 덕분에 크게 덕 본 장면이 <남과 여>에서 회자되는 정사 장면이었으리라. 지금 같은 과감한 노출 장면이 없어 이 장면의 연출방식은 오히려 독특하다. 현재의 장과 안은 흑백으로 처리되는 대신, 정사를 하는 동안 장과 안이 각자의 배우자를 떠올리는 장면만은 컬러로 묘사된다. 애틋하고 아름답기보다 다소 기분이 나빠지는 정사 장면을 통해 감독은 서로를 사랑하는 마음보다는 먼저 떠난 상대에 대한 마음이 두 연인의 머리를 복잡하게 하고 있다는 걸 확인시켜준다.

역시 50년이 지난 <사랑이 이끄는 대로>에서도 다큐멘터리에 가까운 러프한 촬영방식은 그대로다. 마치 여행지를 여행하듯 순서대로 촬영하며 배우들에게 상황을 주고 대사를 구현하도록 한다. 아마 그렇게, 마음이 이끄는 대로, 그의 다음 작품 역시 또 다른 도시에서 시작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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