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2]
[스페셜] 페드로 알모도바르의 변화를 짐작할 수 있는 신작 <줄리에타>
2016-11-16
글 : 장영엽 (편집장)

페드로 알모도바르의 어머니가 돌아왔다. 11월17일 개봉예정인 알모도바르의 신작 <줄리에타>는 <귀향>(2006) 이후 10여년 만에 그가 선보이는 모녀지간의 드라마다. 하지만 올해 칸국제영화제 경쟁부문에서 이 영화가 처음으로 공개된 뒤, 많은 이들이 놀라움을 표했다. 알모도바르의 어머니가 변했기 때문이다. 강인하고, 자애롭고, 매혹적인 그의 여인들에게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걸까. 페드로 알모도바르의 변화를 짐작할 수 있는 <줄리에타>를 좀더 자세히 들여다보면, 그에 대한 답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안티아. 아들 둘과 딸 하나. 코모 호수로 쇼핑을 나왔었다. 호수 근처 스위스쪽에 살지도 모른다. 이탈리아 물가가 싸서 나왔을지도 모르지.” 조각난 사진을 보며 여자는 글을 쓴다. 마치 실종된 여인의 행방을 쫓으며 조심스럽게 사건일지를 쓰는 탐정처럼. 하지만 이건 디텍티브 스토리가 아니라 자식을 되찾고자 하는 한 어머니의 이야기다. 그녀의 이름은 줄리에타(에마 수아레스). 12년째 딸 안티아(아드리아나 우가르테)와 연을 끊고 살아가던 이 어머니는 연인 로렌조(다리오 그란디네티)와 함께 포르투갈로 떠나려던 참이었다. 하지만 마드리드의 시내에서 우연히 만난 딸의 친구 베아의 한마디가 줄리에타의 모든 것을 흔들어놓는다. “지난주에 코모 호수에서 안티아를 만났어요. 절 몰라보기에 제가 말을 걸었지요.” 딸의 근황은커녕 행방조차 알 수 없었던 어머니는 더이상 딸이 없어도 괜찮다고 스스로를 위로하며 살아갈 수 없다. 페드로 알모도바르의 뭇 영화 속 등장인물들이 그랬듯, 줄리에타는 공백으로 남겨둔 과거의 거대한 괄호를 채우기 위해 새로운 여정을 떠나야 한다. 그 끝에 무엇이 기다리고 있을지 잘 알지도 못하면서.

고독하고 슬픈 여인의 초상

알모도바르의 신작 <줄리에타>는 <귀향>(2006) 이후 그가 10여년 만에 선보이는 모녀간의 드라마다. 진창 같은 삶 속에서 남성성의 폭력으로부터 스스로를 지켜내며 아름다운 연대를 이루었던 라만차 지역의 강인한 여성들을 그려낸 뒤, 알모도바르는 멜로와 스릴러(<브로큰 임브레이스>와 <내가 사는 피부>), 코미디(<아임 소 익사이티드>)를 유랑하며 장르적인 실험과 유희에 보다 주목했던 것 같다. <줄리에타>는 좀 다르다. 영화의 제목이 사건이나 테마와 관련된 것이 아니라 한 어머니의 이름, 줄리에타를 겨냥하고 있다는 건 이 작품이 나아갈 방향에 대한 중요한 힌트다(알모도바르가 극중 캐릭터의 이름을 영화의 제목으로 정한 건 그의 장편 데뷔작 <페피, 루시, 봄>(1980)과 <키카>(1993) 이후 참으로 오랜만의 일이다). 흔히 페드로 알모도바르의 영화를 얘기할 때 자연스럽게 연상되는 어떤 기교와 현란함- 복잡한 플롯, 복합적인 성정체성, 노골적인 페티시즘, 글래머러스한 음악 등-이 이 작품에는 없다. 알모도바르를 알모도바르답게 만드는 영화적 요소들을 최대한 배제했을 때 어떤 결과물이 탄생할 것인가. <줄리에타>는 이 질문에 대한 알모도바르의 답변처럼 보인다. 대신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줄리에타를 연기하는 두 여인의 얼굴이다. 에마 수아레스가 연기하는 고독하고 슬픈 중년 여인의 얼굴, 그리고 아드리아나 우가르테가 분한 아름답고 매혹적인 젊은 줄리에타의 얼굴. 페드로 알모도바르는 마치 이 두 여인의 얼굴 속에 이 영화의 모든 이야기가 담겨 있다고 말하려는 듯하다.

먼저 <줄리에타>의 포문을 여는 건 중년의 줄리에타다. 그녀는 마드리드 시내에서 딸 안티아의 친구를 만나 12년 만에 딸의 근황을 들은 뒤, 오래전 안티아와 함께 살았던 집으로 다시 이사를 간다. 애써 잊으려 했던 과거의 기억은 다시 찾은 그곳에서 봇물처럼 터져 흐르고, 줄리에타는 어디로 편지를 보내야 할지 알 수 없으면서도 딸 안티아에게 그동안 하지 못했던 이야기를 글로 쓴다. 줄리에타의 편지가 그녀의 목소리로 낭송되며 영화는 젊은 시절의 줄리에타를 비춘다. 지적이고 아름다운 줄리에타는 고전문학을 가르치는 파트타임 강사다. 그녀는 우연히 탄 기차에서 소안(다니엘 그라오)이라는 남자를 만나 이야기를 나눈다. 소안에게는 5년째 뇌사상태인 아내 아나가 있지만 줄리에타와 소안은 걷잡을 수 없는 열정에 사로잡혀 기차에서 사랑을 나누고, 줄리에타는 안티아를 임신한다. 갈리시아에서 소안, 안티아와 함께 단란하게 살아가고 있던 줄리에타는 소안의 가정부 마리안(로시 드 팔마)을 통해, 자신이 집을 비운 동안 남편이 그의 오랜 친구 아바와 외도를 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줄리에타는 이 문제로 소안과 다투고, 하필이면 줄리에타가 그에게 화를 내고 집을 나선 그날 거센 파도가 소안의 배를 집어삼킨다. 폐인이 된 줄리에타를 돌본 건 딸 안티아였다. 줄리에타가 점점 소안을 잃은 슬픔을 치유해나갈 때쯤, 안티아는 영성 학교에 가겠다며 집을 나선다. 그리고 영영 돌아오지 않는다.

운명론적 정서

<줄리에타>는 캐나다 작가 앨리스 먼로의 단편소설집 <떠남>에 수록된 세개의 단편, <우연> <머지않아> <침묵>을 영화화한 작품이다. 먼로의 이 세 단편은 줄리엣이라는 인물이 주인공으로 등장한다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는데, 각각의 작품은 서로 다른 장소와 상황을 기반으로 전개되면서도 모아놓으면 하나의 중편소설로 볼 수도 있을 법한 연관성을 가진다. 이를테면 <우연>의 줄리엣이 기차에서 만난 남자(소설 속 이름은 소안이 아니라 에릭이다)에게 설렘을 느끼고 그가 있는 바닷가 마을로 찾아갔다면 <머지않아>의 줄리엣은 에릭과의 사이에서 낳은 딸 페넬로페를 데리고 부모를 찾아간다는 식이다. 알모도바르는 수년 전부터 먼로의 이 세 단편소설의 영화화를 염두에 두고 있었다고 말한다. 하지만 먼로의 소설을 그만의 방식으로 각색하는 과정은 생각보다 쉽지 않았다. “<줄리에타>의 초본은 이야기의 배경을 캐나다에서 미국으로만 옮긴 채 스페인어로 작업했다. 세개의 이야기를 내 것으로 만들려고 노력하면서도 어떤 부분에서는 각색중이라는 사실을 잊고 자유롭게 작업하려고 했다. 하지만 결국은 불확실성 때문에 무너져버렸다. 각본에 대한 확신이 없었는지 아니면 영어로 감독하는 것에 대한 자신이 없었는지 모르겠다. 언어와 문화, 장소를 낯선 곳으로 바꾸는 것에 겁이 났을지도 모른다. 어쨌든 구체적인 계획이 세워지기 전까지 초본을 계속 지니고만 있었다.”

알모도바르가 그렇게 보류 중이던 <줄리에타>를 다시 마음속에 떠올린 건 지금으로부터 2년 전의 일이다. 영화의 배경을 미국으로부터 그의 나라이자 예술적 영감의 원천인 스페인으로 재설정하면서 비로소 <줄리에타>의 영화화 작업도 속도를 낼 수 있었다고 알모도바르는 말한다. 앨리스 먼로의 원작과 알모도바르 영화의 가장 큰 차이는 운명론적인 정서에 있는 것 같다. 줄리에타의 직업이 그리스 고전문학을 가르치는 강사라는 점은 소설과 영화가 다르지 않으나, 먼로의 소설이 그리스 신화를 등장인물의 대화 주제 또는 여주인공의 직업적 배경을 설명해주는 정보 정도로 활용하고 있는 반면, 알모도바르는 이것을 <줄리에타>의 운명론적 무드를 더욱 견고히 하는 소재로 차용하고 있다.

영화의 초반부, 젊은 시절의 줄리에타는 기차에서 한 남자를 만난다(소안과 함께 탔던 그 기차다). 줄리에타의 맞은편에 앉은 그는 끊임없이 그녀에게 말을 걸며 줄리에타의 심기를 불편하게 한다. 남자를 피해 식당칸으로 자리를 옮긴 줄리에타는 머지않아 자신이 대화를 거부했던 그 남자가 열차에 몸을 던졌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그의 말에 반응했더라면, 남자는 자살하지 않았을 수도 있었다는 생각이 줄리에타를 괴롭히고 그런 그녀를 소안이 위로해주며 두 사람은 가까워지게 된다. 그런데 이 에피소드에는 기묘한 장면이 포함되어 있다. 달리는 기차의 차창 밖으로 사슴이 달려오는 장면이다. 사슴이 줄리에타와 소안의 시야에서 사라진 지 머지않아 기차가 멈추고 두 사람은 남자가 선로에 몸을 던졌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줄리에타가 자리를 비운 사이 감쪽같이 사라진 남자와 행방을 알 수 없는 사슴의 실종은 기묘하게도 신화적 뉘앙스를 풍긴다. 마치 줄리에타와 소안의 ‘우연’한 만남을 주선하기 위해 인간으로 분한 신이 비련의 죽음을 연기하는 느낌이랄까. 소안의 집을 찾아간 줄리에타가 가정부 마리안을 만나는 장면도 의미심장하다. 소안의 아내 아나의 죽음을 줄리에타에게 알리며, 소안이 그의 친구 아바와 은밀한 관계를 맺고 있다고 전하는 마리안의 강인한 얼굴은 앞으로 줄리에타에게 일어날 비극을 예고하는 심판자의 이미지로 다가온다(언제나처럼 알모도바르의 영화 속 로시 드 팔마의 연기는 압권이다).

건조하고 미니멀한 비극

알모도바르는 이 영화가 ‘비극’에 대한 이야기라고 말한다. <줄리에타>는 “숙명에 대한 이야기임과 동시에, 죄책감에 대한” 이야기라는 것이다. 물론 드라마틱한 운명과 죄책감의 테마는 그간 알모도바르 영화의 주요한 소재가 되어왔다. 하지만 이번 영화에서 다른 점이 있다면 이 숙명과 죄책감이 알모도바르의 여성 캐릭터를 무겁게 짓누르고 있다는 점이다. 페드로 알모도바르의 영화에서 여성, 그 가운데에서도 어머니는 대개의 경우 승리자였다. <내 어머니의 모든 것>과 <귀향> 등의 영화를 통해 알 수 있듯, 그녀 혹은 어머니들은 모진 운명 가운데서도 강인한 생명력으로 살아남아 주변의 모든 등장인물들을 포용하는 존재였다. 그 인물들이 남편의 새 연인이건, 자신을 떠난 남편이건, 남편이 새살림을 차려 얻은 자식이건 말이다. 하지만 이 영화 속 줄리에타는 그리스 비극의 여주인공마냥 극적으로 무너져내리는 존재다. 많은 장면에서 혼자인 중년의 줄리에타에게는 돌봐야 할 자식도, 갈등을 겪을 만한 드라마틱한 사건도 일어나지 않는다. 그녀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곤 고독과 슬픔을 견디며 행방을 알 수 없는 딸에게 자신이 그녀에게 느낀 애증의 감정과 과거의 죄책감을 고백하는 편지를 쓰는 것뿐이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는 것의 공포, 어머니의 몰락. 페드로 알모도바르의 영화에서 이런 방식의 두려움을 느껴본 적이 있었나 싶다. 바로 이러한 변화가 영화 <줄리에타>를 만들게 된 계기라고 알모도바르는 말한다. “줄리에타는 내가 만들어낸 인물들 중 가장 나약한 어머니다. 그동안 내가 창조해낸 영화 속 어머니들은 모두 유머를 지니고 있었다. 그 이유는 어머니 캐릭터를 구상하며 늘 나의 어머니로부터 영감을 받았기 때문이었다. 줄리에타에게는 유머가 없다. 이건 의도한 것이었다. 그녀가 아파트에서 자리를 잡고 글을 쓰기 시작할 때부터, 내게 영감을 준 건 나의 어머니가 아니라 나 자신과 내가 겪고 있는 고독이었다.”

본래 이 영화의 제목은 ‘줄리에타’가 아니라 ‘침묵’이 될 뻔했다고 알모도바르는 말한 적이 있다. 먼로가 집필한 동명 단편의 내용(영성 학교에 갔다가 돌아오지 않는 딸의 이야기다)이 이 영화의 가장 핵심적인 서사이기도 한 데다 ‘침묵’이라는 소재가 극중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의 말대로 줄리에타와 딸 안티아의 관계뿐만 아니라 이 영화에서 등장인물들이 맺고 있는 수많은 관계들의 행간 속에는 침묵이 존재하고 있다. 관객은 이 영화를 끝까지 보아도 등장인물들을 온전히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소안이 어떤 마음으로 외도를 했는지, 소안의 외도 상대인 아바를 줄리에타는 어떻게 생각했는지, 안티아는 왜 줄리에타를 떠나야 했는지 영화는 구체적인 답변을 피한다. “시나리오 집필부터 촬영, 편집에 이르기까지 이 단순함을 지키기 위해 수많은 노력을 했다”는 알모도바르의 말대로, 그리스 비극을 닮은 <줄리에타>는 그의 가장 미니멀한 영화로 기억될 듯하다. 동시에 가장 건조한 작품으로 기억될 것도 같다. <브로큰 임브레이스>나 <내가 사는 피부> 등의 근작에서 체감할 수 있었던 화려한 영화적 수식들을 걷어낸 이 영화는 페드로 알모도바르의 현재적 변화를 짐작할 수 있는 작품으로 손색이 없다. 혹독한 운명의 수레에 탑승한 알모도바르의 여인들은 어디로 나아갈까. <줄리에타>의 마지막 장면이 그 힌트가 될 수도 있겠다.

두명의 줄리에타, 아드리아나 우가르테(위)와 에마 수아레스(아래).

알모도바르의 여인들

에마 수아레스와 아드리아나 우가르테

페드로 알모도바르는 <줄리에타>의 가장 큰 위험요소 중 하나가 “줄리에타라는 인물을 위해 두 여배우를 캐스팅한 것”이라고 말한 적이 있다. 동일한 배우가 한 인물의 다양한 연령대를 연기하는 걸 선호하지 않는 그의 취향에 따른 선택이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두 배우가 한 인물을 연기한다는 건 정교한 밸런스가 필요한 작업이기 때문이다. 보는 입장에서는 서로 다른 정서와 매력을 가진 두 여배우의 교차되는 연기를 감상하는 즐거움이 쏠쏠하다. 먼저 줄리에타의 20대를 연기하는 배우는 마드리드 출신의 아드리아나 우가르테다. 루이스 브뉘엘 영화의 세트 디자이너였던 에두아르도 우가르테의 손녀딸인 그녀는 스페인 TV시리즈 <라 세뇨라>의 주연배우로 자국 관객에게 이름을 알렸다. 그녀의 호기심 가득한 눈빛과 매력적인 미소는 페드로 알모도바르의 전작에서 볼 수 있었던, 생기 넘치는 여성들의 계보 아래 그녀를 위치시키는 동시에 자신도 알지 못한 채 잔혹한 운명 속으로 걸어들어가는 한 젊은 여인의 모습을 구현하기에 안성맞춤이었다. 우가르테는 줄리에타의 트레이드마크인 금발 머리를 구현하기 위해 짙은 갈색 머리를 물들여야 했다고 말한다. 40대의 줄리에타를 연기하는 배우는 에마 수아레스다. <붉은 다람쥐>(1993), <대지>(1996) 등 1990년대 훌리오 메뎀의 영화 속 페르소나로 활약했던 그녀는 아드리아나 우가르테가 분한 20대의 줄리에타와 달리 고독하고 지친 여인의 얼굴로 등장한다. 줄리에타의 공허함을 표현하기 위해 루이 말의 <사형대의 엘레베이터>, 버지니아 울프의 삶을 재구성한 <디아워스> 등을 챙겨봤다는 그녀는 두 아이의 엄마라는 경험이 딸을 잃은 어머니의 고독감을 표현하는데 중요한 도움이 되었다고 말한다. 더불어 그녀에 따르면, 알모도바르는 루이스 브뉘엘의 <욕망의 모호한 대상>에 오마주를 바치는 의미로 그 영화 속 앙헬라 몰리나와 캐롤 부케라는 두 인물이 하나의 캐릭터를 연기하는 방식을 <줄리에타>에 그대로 차용했다고 한다. 한 인물의 드라마틱한 변화를 반영하기 위해 아드리아나 우가르테와 에마 수아레스는 의도적으로 영화 촬영현장에서 마주치지 않았다. 그녀들이 만난 날은 단 하루 뿐이었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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