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스트 인 더스트>의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위스키 탱고 폭스트롯>의 킴(티나 페이)은 뉴스룸에서 의례적인 멘트를 쓰는 한직에 있다가 싱글이라는 이유로 아프가니스탄에 특파된 종군기자다. 위험지역을 취재하기 위해 청색 부르카로 전신을 감싼 그녀는 거울을 향해 내뱉는다. “아이구, 예뻐라. 투표권 같은 건 안 줘도 좋겠네.” 보다 풍자적인 연출은, 파랗게 ‘포장’된 킴이 밖으로 나오자 몸이 보이지 않는데도, 나이 불문하고 그녀에게 욕망의 시선을 던지는 남자들의 반응. 흥청대는 보사노바 음악을 배경으로 찍힌 이 장면은, 아무런 개성도 표현도 드러내지 않고 ‘여성’이라는 표식만 드러낸 여자에게 각자의 환상을 투사하며 편안히 탐하는 문화를 짓궂게 드러낸다. 물론, 그러는 동안 부르카 안의 킴은 가운뎃손가락을 쳐들고 있다.
10/22
칸국제영화제 상영관 앞에 늘어선 기자들의 긴 줄은, 미처 못 본 비경쟁부문 영화에 대한 정보 수집의 장이기도 하다. 올해 ‘주목할 만한 시선’ 부문 출품작 <로스트 인 더스트>는 서너 차례나 제목이 귀에 들어온 영화 중 한편이었다. 결국 오늘에야 본 데이비드 매켄지 감독의 <로스트 인 더스트>는, <빅 쇼트> 시대의 <우리에게 내일은 없다>라고 불러도 크게 어긋나지 않는다. 카우보이, 퇴임을 앞둔 보안관, ‘인디언’ , 은행 강도 등 서부극을 구성하는 블록들이 고스란히 들어 있고 텍사스의 풍광도 같은 자리에서 같은 표정으로 초연히 그들을 굽어본다. 다만 이 여일한 요소들이 맺는 관계와 결과가 그간의 역사와 동시대 미국 사회를 반영한다. 자연히 비교되는 코언 형제의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가 상징과 신화의 차원에서 작동한다면 <로스트 인 더스트>는 2010년대의 먼지에 발목을 파묻고 있다. 안톤 시거가 바닥 없는 심연을 체화한 악당이었다면, <로스트 인 더스트>의 악은 서민의 자산을 쉽게 가로채려는, 사회적으로 무책임한 은행의 대출 사업이다.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2007)의 원작자 코맥 매카시의 세계와 테일러 셰리든(<시카리오: 암살자의 도시>)이 쓴 <로스트 인 더스트>의 그것은, 신화적이건 사회적이건 그 테마가 캐릭터를 경유해 구현된다는 공통점을 갖는다. <로스트 인 더스트>의 토비(크리스 파인)는 평생 법을 어기는 일 없이 살아온 남자지만 죽은 어머니의 농장을 은행에 빼앗길 날이 다가오자 한정된 시간에 딱 필요한 액수의 돈을 누구도 해치지 않고 훔칠 계획을 세운다. 39년 평생 중 10년을 감옥에서 보낸 전과자 형 테너(벤 포스터)는 동생의 계획에 경험과 실천력을 제공한다. 동시에 손을 더럽히지 않을 수도 있다고 믿는 동생과 달리 범죄의 대가를 예상한다. 막무가내 망나니처럼 보이지만 그는 마음 깊은 곳에서 냉철하다. 폭압적인 아버지를 사살한 것으로 짐작되는 테너는 이미 이번 생에 연연하는 바 없이 다만 가족에게 진 빚을 청산하고 싶어 하는 것처럼 보인다. 사회적으로 백인 쓰레기(white trash)로 간주되는 그에게 미약한 위안은, 텍사스의 쫓겨난 주인 코만치 인디언과 동일시해 스스로를 ‘평원의 제왕’으로 일컫는 판타지다. 형제의 맞은편에는 오직 고독만이 기다리는 은퇴를 앞둔 보안관 마커스(제프 브리지스)와 멕시칸과 인디언의 혈통을 반씩 지닌 파트너 알베르토(길 버밍엄)가 있다. “교회 설교를 왜 듣나? 모닥불 주위나 돌지” 같은 인종주의적 농담을 습관처럼 던지는 마커스를 알베르토가 참아주는 이유는, 완고한 늙은이에 대한 연민과 직업적 존중이 반반인 듯하다. 한편 마커스의 비뚤어진 유머는 알베르토보다 자신이 먼저 세상을 뜬다는 확신의 발로로 보인다. “자네는 내 무덤에 찾아와 놀려댈 시간이 많을 테니까”라는 태도랄까. (영화 후반, 이 믿음이 무너졌을 때 마커스는 처음으로 통제력을 잃는다.) 마커스는 현장을 보는 것만으로 범인이 냉정하다는 사실을 알아채고 마지막 임무를 깨끗이 완수하려고 한다. 한밤중에 깨어 모포를 뒤집어쓰고 감상에 빠지기도 하지만 아무도 보고 있지 않을 때 한정이다. 반면 알베르토는 수사를 진행하면서도 종종 적당히 의미심장한 관조의 표정을 짓는다. 내 종족의 땅을 오래전 백인들에게 빼앗겼고, 그 백인들이 다시 금융자본에 땅을 도둑맞았고, 그 은행을 턴 강도를 내가 추격한다. 근사하군! (<로스트 인 더스트>의 원래 제목은 ‘코만체리아’였다.) 삽입곡 가사에서 따온 한국 개봉 제목은 그런 면에서 영화와 다소 어긋나 보이기도 한다. <로스트 인 더스트>의 모든 극중 인물들은 (단역까지 포함해) 현 시점에 자기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부터 장기적 운명에 이르기까지, 지옥에 떨어지건 높은 파도가 몰아치건(이 영화의 원제는 ‘Hell or High Water’다) 놀랄 만큼 명징하게 인식하고 행동한다. <로스트 인 더스트>의 시나리오는 두 남자 대 두 남자의 구도에 상당히 애착한다. 마커스가 알베르토와 떨어지면 한 민간인 남자가 망설임 없이 엽총을 들고 옆자리에 뛰어든다. 토비가 농장을 지키려는 이유인, 전처의 두 자식도 아들이다. 무엇보다 <로스트 인 더스트>는 인물들 사이의 단순치 않은 관계를 직설적으로 규정하는 법 없이 행위로 형상화한다. 말은 중요하지 않거나 해독되기를 기다리는 위장이다. 마지막 순간에도 하워드 형제의 “사랑한다”는 “가서 엿이나 먹어”로 기어이 중화된다.
데이비드 매켄지 감독과 카메라가 보여주는 완급 조절과 배열에 대한 확신은 올해 본 어떤 장르영화보다 단단하다. 여운을 보존해야 할 때와 가지를 치고 달려나가야 할 때를 아는 이 영화는 서사가 있는 예술에 종사하는 사람의 기본적 덕목 -효율적 타임라인 구성- 을 모범적으로 완수한다. <로스트 앤 더스트>는 역시 비미국인 감독이 연출한 <슬로우 웨스트>와 더불어 소위 ‘네오 웨스턴’의 여전히 유효한 생명력을 보여주는 영화이자 장르의 전통적 아이코노그래피를 보존하면서 그 안에서 살아가는 동시대 인간의 구체적 문제를 충분히 다룬 만족스런 결실이다. 길을 잃다니! 당치 않다.
10/23
나름대로 긴박한 은행 강도 현장 신으로 시작한 영화 <로스트 인 더스트>는, 범죄 수사극이고 웨스턴이기 전에 이 이야기가 소원한 형제가 아주 오랜만에 함께 보내는 시간의 기록이기도 하다는 사실을 잊지 않는다. 그리고 그럼으로써 장르영화로서도 드라마로서도 특별해진다. 처음 브레인과 해결사의 역할 구분 정도로 인식되던 형제의 범죄 동기는, 장면과 시퀀스가 축적되면서 명시적 설명 없이 관객의 머릿속에서 형상을 갖추어간다. 두 사람의 동기와 관련해 내게 특별히 인상적이었던 것은, 형제가 도달한 체념과 달관의 경지다. 범죄의 기획자인 토비가 원하는 바는 합법적인 불의에 의해 빼앗길 위기에 처한 어머니의 농장을 지키고 거기로부터 자신은 아무것도 취하지 않은 채 신탁에 남겨 이미 양육권을 잃은 자식들의 경제적 보루로 물려주는 것이다. 이 남자는 훔친 돈으로 본인을 위한 어떤 소비도 앞가림도 하지 않는다. 이 점은 용의선상에서 벗어나는 계기가 되기도 한다. 그에게 돌아가는 것은 평생을 잠 못 이루게 할 살생의 가책뿐이다. 다만 질병처럼 가족에게 유전되는 가난의 사슬을 끊는 것으로 본인의 인생은 족하다고 여긴다. 이 계획에 ‘땔감’처럼 몸을 던지는 형 테너는 말할 나위도 없다. 범죄는 성공했지만 우리는 토비의 긴 여생에 무엇이 남아 있는지 전망할 수 없다. 도덕적으로도 토비는 아무 보람을 구하지 않는다. 죽은 자들의 영혼은 그의 꿈을 괴롭힐 테고, 애써 되찾은 가족의 집에서 아내와 이혼한 그는 손님으로 남는다. 큰아들이 “남들이 아빠와 삼촌에 대해 하는 말 안 믿어요”라고 말할 때 토비는 “아니, 그들의 말을 믿어. 우리처럼 살지 마라”라고 못 박는다. 심지어 복수의 대상이었던 은행에도 그는 한방 먹였음을 알리지 않는다. 오히려 큰돈을 예치함으로써 자본주의 시스템을 충실히 활용해 안전망을 친다. 형제는 실리도 명예도 없이 자기 앞의 생을 처분한다. 유일한 보람이 있다면 삶의 통제력을 끝내 지켰다는 것, 한 가지다. 오늘날의 세계에서 웨스턴이라는 장르가 비장미를 가질 수 있다면, 간신히 가능한 깃발은 이것일까?
좋 아 요
빨간 망토
마블 시네마틱 유니버스에서 망토는 전혀 참신한 아이템이 아니지만 <닥터 스트레인지>의 부양 망토(cloak of levitation)는 어엿한 장면도둑으로서 배우 1인분 이상 몫을 감당한다. 베네딕트 컴버배치에게 걸쳐지려는 이 망토의 의지는 처음부터 강력하다. “거절은 거절한다”는 투로, 자기가 점찍은 임자를 집요하게 따라다니고, 더 쓸모있는 무기쪽으로 멱살을 잡아 인도하며 급기야는 파트너로서 장시간 적을 제압하기도 한다. 디즈니판 <알라딘>의 마법 양탄자가 진화한 버전이랄까? 막판에 상처 입은 닥터 스트레인지의 뺨을 쓰다듬을 무렵에는 속편에서 가장 활약이 궁금한 캐릭터로까지 부상한다. 본디 롱코트가 잘 어울리는 컴버배치를 잘생겨 보이게 만드는 기능이야, 기본이다. 딱 하나. 어벤저스 회합에 옵서버로 초청된다면 토르와 옷이 바뀌지 않도록 유의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