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카이 마코토 감독의 <너의 이름은.>은 일본에서 개봉하자마자 신드롬에 가까운 관객몰이를 이어갔다. 영화를 향한 뜨거운 관심은 쉽사리 식지 않았고, 이제는 미야자키 하야오의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2001)에 이어 일본 내 역대 애니메이션 흥행 순위 2위를 기록하고 있다. 전작 <언어의 정원>(2013)을 선보일 때까지만 하더라도 신카이 마코토는 포스트 미야자키 하야오, 포스트 호소다 마모루로 소개되긴 했지만 그들만큼 대중성을 갖춘 감독은 아니었다. <언어의 정원> 이후 3년, 그사이 어떤 일이 벌어진 걸까. 자신의 전작들을 집대성한 것 같은 <너의 이름은.>이 이토록 무수한 사람들의 마음에 접속할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일까. 순정 만화와 SF 판타지, 재난 드라마를 아우르는 놀라운 애니메이션 <너의 이름은.>을 들여다보면서 그 답들을 생각해보았다. 개봉에 맞춰 내한한 신카이 마코토 감독도 만났다.
삶은 반복되는 상실에 익숙해지는 과정이다. 상실의 자리를 다른 무언가로 대체하거나 마음에 굳은살이 박이도록 노력하는 과정의 연속. 그러나 상실에 내성이 생긴다 한들 무언가를 잃어버렸다는 사실만큼은 변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인간은 상실의 자리를 끊임없이 돌아보고 불가능해 보이는 복원을 희망한다. 신카이 마코토는 기억의 복원과 상실의 복구 작업에 천착해온 감독이다. 단지 생활을 하고 있는 것뿐인데 슬픔은 쌓여만 가고(<초속5센티미터>(2007)), 무언가를 잃을 것만 같은 예감에 휩싸이고(<구름의 저편, 약속의 장소>(2004)), 슬픔의 이유도 모른 채 왈칵 눈물을 쏟아내는 일들을 종종 겪지만(<너의 이름은.>(2016)), 상실감을 끌어안고 살아가는 게 인간에게 내려진 저주이자 축복(<별을 쫓는 아이: 아가르타의 전설>(2011))임을 깨닫고 세계의 끝에서 새로운 시작을 희망한다.
삶은 이별과 상실의 연속이지만 우주적 관점에서 보면 세상의 모든 것은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절망과 비관이 아닌 희망과 낙관에 기댈 수 있는 여지가 생긴다. 신카이 마코토는 이러한 우주적 관점에서 우리는 반드시 서로를 찾게 될 것이며, 언젠가 다시 만나게 될 것이라 확신한다. 그 확신에 근거를 제공하는 것은 순도 높은 그리움의 감정, 영원히 기억을 간직하겠다는 다부진 다짐이다. 신카이 마코토의 작품은 기본적으로 순정의 감정이 승리하는 기적의 판타지다. 초창기의 중편 <별의 목소리>(2002)부터 <너의 이름은.>에 이르기까지 ‘간절한 마음이 모든 것을 초월한다’는 명제는 한번도 수정된 적이 없다. 신카이 마코토의 세계관을 응축한 작품인 <너의 이름은.>에서 그 기적은 정점을 찍는다. 간절한 마음이 이루어낸 기적에 사람들 또한 뜨겁게 반응했다. 동일본 대지진이라는 대재앙을 경험한 일본인들에게 <너의 이름은.>은 또한 치유의 판타지였던 것이다.
꿈이라 알았으면 눈뜨지 않았을 것을…
<너의 이름은.>은 몸이 뒤바뀌게 된 소년과 소녀의 이야기로 시작한다. 이는 곧 시공을 초월한 애틋한 러브스토리와 재난 드라마로 탈바꿈한다. 도쿄에 사는 고등학생 소년 타키(가미키 류노스케)와 이토모리에 사는 동갑내기 소녀 미츠하(가미시라이시 모네)는 자고 일어나면 서로의 몸이 뒤바뀌는 신기한 경험을 한다. 일주일에 두세번 반복해서 일어나는 이 일은 꿈이라기엔 너무도 선명하고 구체적인 정황들을 남긴다. 타키의 몸으로 살게 된 미츠하와 미츠하의 몸으로 살게 된 타키는 목욕 금지, 용돈 아껴쓰기 등의 룰을 만들어 지키고, 자신으로 살지 않은 시간에 대한 기록을 남겨 무탈한 공존을 꾀한다. 하지만 1200년 주기의 혜성이 지구에 가장 가까워진 날, 폭죽처럼 터지며 낙하하던 혜성이 이토모리 마을을 덮친다. 타키와 미츠하 사이에 일어난 꿈같은 일도 멈춰버린다.
신카이 마코토의 세계에서 꿈은 다른 세계로 향하는 문인 동시에 슬픈 예감과 직결되는 무의식이다. 꿈에서 깨어난 순간부터 망각은 시작되고 망각은 소중한 것을 잃어버렸다는 상실감으로 이어진다. 알려졌다시피 <너의 이름은.>은 오노노 고마치의 와카(정형시)에서 영감을 얻어 시작된 작품이다. “그리며 잠들어 그이 모습 보였을까. 꿈이라 알았으면 눈뜨지 않았을 것을.” 꿈속에선 모든 것이 가능하지만 꿈을 꾸는 사람조차 꿈의 통제권은 쥐지 못한다. 신카이 마코토는 이러한 상황을 영화적 장치로 활용한 적이 있다. 첫 번째 장편애니메이션 <구름의 저편, 약속의 장소>에서다. 평행우주론에 기초한 이 영화는 두 소년이 꿈속에 갇힌 한 소녀를 구하는 이야기다. 디스토피아적 세계에서 자신의 사랑도 지키고 세계의 운명도 지키는 소년들의 이야기는 <너의 이름은.>의 타키가 미츠하도 구하고 세계도 구하는 이야기와 연결된다. 두 영화의 분위기는 사뭇 다르지만 <너의 이름은.>은 <구름의 저편, 약속의 장소>와 여러 요소를 공유한다. 꿈이 평행우주와 연결되는 매개로 활용되는 점이라든지, 소년이 소녀와 세계를 구하는 이야기라든지, 애타게 누군가를 찾아 헤매고, ‘꿈속에서 연결된 특별한 마음’이 간직되기를 바라는 점들이 그렇다.
결국 모든 것은 연결되어 있다. 신카이 마코토에겐 언제나 이 사실이 중요하다. 너와 나의 마음이 연결되어 있다는 단 하나의 사실. 하지만 지속은 단절보다 어렵다. 마음이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확인하는 일 또한 만만치 않다. 동경(혹은 애정)하는 대상이 멀리 있거나 눈에 보이지 않는 경우가 다반사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신카이 마코토의 인물들은 막막한 거리와 막연한 시간이 어찌할 도리 없이 사이를 갈라놓아도 포기하지 않고 마음이 담긴 메시지를 발신한다. 8년 만에 문자 메시지가 수신될지라도(<별의 목소리>), 2주에 걸쳐 쓴 편지가 눈보라에 맥없이 날아가더라도(<초속5센티미터>) 그들은 연결의 끈을 놓지 않으려 애쓴다. <너의 이름은.>의 타키와 미츠하 앞에도 관계를 훼방 놓는 장애물이 놓여 있다. 두 사람은 어긋난 시간대에서 만났다
미츠하는 너무 일찍 타키 앞에 당도했고 타키는 너무 늦게 그것을 눈치챘다. 심지어 타키는 흐릿해져가는 기억에 대항해 서로의 손바닥에 이름을 적기로 하고선 그 일조차 제대로 완수하지 못한다. 이름을 적는 대신 타키가 미츠하의 손바닥에 쓴 건 ‘널 좋아해’였다.
눈이 아닌 마음으로만 볼 수 있는 관계에서 당사자들은 무의식적으로 손을 뻗거나 뒤를 돌아보거나 하늘을 바라본다. 바람에 손길을 내밀어 공기 중에 떠도는 예감을 캐치하고, 수십 광년 전의 과거에서 날아든 별빛을 보며 향수에 젖고, 세계의 비밀에 가까이 다가가고 싶다는 생각을 하고, 이름도 얼굴도 기억나지 않는 존재의 기운을 느끼곤 확신에 차 뒤돌아본다. 그것은 신카이 마코토의 작품에서 수도 없이 반복되는 이미지이자 행위다. 신카이 마코토는 인물의 행위뿐만 아니라 일상의 사물과 풍경의 포즈에도 관심을 기울인다. 시시각각 변하는 하늘의 모습과 빛의 일렁임은 그 자체로 숨 쉬는 풍경이 되고, 매듭끈이나 사람의 침으로 발효시킨 전통주에도 정념은 깃들어 있다. <너의 이름은.>에서 미츠하의 할머니는 만물은 이어져 있다면서 ‘무스비’에 대해 얘기한다. “꼬이고 엉키고 때로는 돌아오고 끊어지고 다시 이어지고. 그것이 무스비, 그것이 시간이란다.”
시간축의 뒤틀림은 인간의 의지로 바로잡을 수 없다. 시간의 관장은 신의 영역이므로, 그 순간 필요한 것은 기적이다. <너의 이름은.>에서 가장 먹먹한 장면 중 하나는 신비한 존재를 만나게 된다는 황혼이 찾아왔을 때, 타키와 미츠하가 서로의 존재를 마음이 아닌 온 감각으로 확인하게 되는 바로 그 순간이다. “거기 있니?” 하고 손을 뻗었을 때 “여기 있어”라는 응답으로 기적이 발생한다. 눈앞에 나타난 선명한 존재에게 “너를 만나러 왔어”라고 말할 수 있는 기적의 시간이 주어진다. 그 시간은 오래 지속되지 못하지만 그 순간 주고받은 마음은 오래 지속될 것이다. 교감의 순간은 짧은데 마음의 파장은 늘 깊다.
운명을 초월한다는 것은
<너의 이름은.>은, 인간의 의지가 점지된 세계의 운명을 바꾸는 초월의 이야기다.
<별의 목소리> <구름의 저편, 약속의 장소> <별을 쫓는 아이: 아가르타의 전설>처럼 가상의 시공간을 배경으로 한 그의 판타지 계열 작품이나, 판타지를 끌어들이지 않고 숙명적 외로움과 쓸쓸한 내면을 담아낸 <초속5센티미터> <언어의 정원> 또한 모든 것을 초월하는 마음을 이야기했다. 하지만 <너의 이름은.>은 거기서 한발 더 나아간다. 일상에 환상성을 더하고, 환상에 일상성을 부여하면서 이전 작품 전체를 아우르는 모양새를 하고 있는 <너의 이름은.>은 극복이 아닌 초월의 서사로 기적을 빚어낸다. 그리고 그 기적은 일상의 세계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친다. 극복은 이겨내는 것이고 초월은 한계를 뛰어넘는 것이다. <너의 이름은.>에서 고통은 단지 견뎌야 하는 것이 아니라 또 다른 차원에서 넘어설 수 있는 것이다. 그 끝에 극복의 과정에 대한 보상처럼 기적이 발생한다. 어쩌면 그것은 끝까지 기억하려는 자에 대한 보상일지도 모른다. 신카이 마코토는 그리움이 쌓이고, 외로움이 쌓이고, 상실감이 쌓이고, 시간이 쌓여서 단단해진 마음의 퇴적층을 절절한 감성으로 한겹한겹 그려온 감독이다. 그런 그가 기적이 필요한 순간 기적을 선보이는 마법을 선보인다. 그러므로 그의 위로는 판타지여도 좋다.
신카이 마코토 영화의 음악
<너의 이름은.>에서 음악은 적극적으로 드라마에 끼어든다. 이번 작품의 음악은 일본의 밴드 래드윔프스(Radwimps)가 맡았다. 신카이 마코토는 일찍이 밴드의 보컬이자 작사, 작곡을 맡고 있는 노다 요지로의 팬이었다고 한다. 실제로 노다 요지로가 작사, 작곡한 <너의 이름은.>의 주제곡들의 가사를 보면 두 사람의 세계관이 꽤 닮아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네곡의 러브송은 하이틴 로맨스 소설 속 구절들처럼 사랑의 감정을 여과 없이 담아낸다.
“몇개의 은하를 건넌 끝에 우린 만났어. 네 손이 부서지지 않게 잡으려면 어떻게 하면 될까?”(<전전전세>) “언젠가 사라져 없어질 너의 모든 것을 이 눈에 새겨두는 일은 이제는 권리 따위가 아니라 의무라 생각해.”(<스파클>) “우리의 목소리가 이대로 사라지지 않고 세상의 구석까지 닿을 수 있다면 좋을 텐데. 그러면 우리 둘은 어떤 이야기를 할까? 절대 사라지지 않을 약속을 둘이서 동시에 말하자.”(<꿈의 등불>) “난 너를 알고 있었어. 내가 나의 이름을 알기도 훨씬 전부터.”(<아무것도 아니야>) 네곡의 주제가가 영화로부터 탄생한 곡들이라 해도, 신카이 마코토의 감성과 세계관이 신기할 정도로 고스란히 가사에 배어 있다.
기존의 신카이 마코토 작품에서 음악은 늘 중요했다. 피아노 연주에 얹힌 주인공의 내레이션은 작품마다 빠짐없이 사용됐고, 가사가 있는 엔딩곡은 영화의 마지막 인상에 깊이 관여했다. 첫 번째 단편 <그녀와 그녀의 고양이>(1999)부터 <별을 쫓는 아이: 아가르타의 전설>까지는 덴몬이 음악을 담당했고 <언어의 정원>에선 가시와 다이스케가 음악을 맡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