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2]
[스페셜] 제67회 베를린국제영화제 폐막…<온 보디 앤드 솔> 황금곰상 영예
2017-03-01
글 : 한주연 (베를린 통신원)

예상은 비껴났지만, 이견은 없었다. 예순일곱 번째 황금곰상은 기이하고 개성 넘치는 영화에 돌아갔다. 제67회 베를린국제영화제는 61살의 헝가리 여성감독 일디코 에네디의 존재를 확실하게 세상에 알렸다. 그녀는 올해 경쟁부문에 초청된 네명의 여성감독 중 한명이었다. 이로써 올해의 영화제는 익숙한 거장의 신작보다 변방의 재능에 힘을 실어주는 결말을 맞게 됐다.

<온 보디 앤드 솔>

영화제 초반에 선보인 <온 보디 앤드 솔>은 예상을 벗어나는 스토리 라인으로 평론가들의 이목을 끌었다. 눈 덮인 숲을 헤매는 사슴 한쌍과 가축 도축공장의 가차 없는 도살 장면을 영화는 느린 호흡으로 번갈아 보여준다. 아무 정보 없이 본다면 누군가는 동물권을 외치는 영화 혹은 다큐멘터리라고도 생각할 수 있겠다. 그런데 정작 전체 스토리를 살펴보면 이 장면들은 공장에서 일하는 신입사원과 상사 사이에서 앞으로 일어나게 될 사랑 이야기의 전조다. 자폐증에 가깝게 소통에 어려움을 보이는 30대 여주인공과 과거의 상처를 안고 살아가는 듯한 50대 남자주인공은 서로에게 끌리지만 다가가기 어렵다. 우연한 기회로 상담사를 통해 서로 같은 꿈을 꾸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 두 사람은 더욱 서로를 원하게 된다. <온 보디 앤드 솔>은 예민하고 상처받기 쉬운 이들이 서로에게서 위로를 찾는 과정을 독특한 스타일의 연출을 통해 보여준다. 독일 주간 <디차이트>는 “상처받은 두 사람의 공포에 대한 시적인 연구”라고 썼다. 일디코 에네디 감독은 1989년 칸국제영화제에서 골든카메라 신인상을 받고, 1990년 베를린국제영화제 포럼부문에서 화려하게 데뷔했지만 국제무대에 다시 선 건 거의 30년이 지난 뒤의 일이다. 그녀는 현재 헝가리에서 영화학과 교수로, TV드라마 연출가로 활동하다가 <온 보디 앤드 솔>로 베를린국제영화제에 초청됐다. 그녀는 황금곰상 수상 소감으로 18년 만에 첫 장편을 내놓은 자신을 주목해준 영화제에 감사를 표하며 현재 헝가리 수상 빅터르 오르반이 이끄는 헝가리 사회에서의 영화 작업 환경이 점점 더 나빠지고 있다는 말을 전했다.

<디 아더 사이드 오브 호프>

영화제 내내 가장 유력한 금곰상 후보로 꼽혔던 아키 카우리스마키 감독의 <디 아더 사이드 오브 호프>는 은곰 감독상으로 만족해야 했다. 이 작품은 동화 같은 내용을 담고 있는 간결하고 따뜻한 영화다. 미니멀리즘이라고 할 만큼 대사가 짧고 각 장면에 군더더기가 없다. 영화 곳곳에 삽입된 콘서트 장면, 70년대를 연상시키는 세팅, 강렬한 색 대비 등이 낯설고 이국적이다. 영화는 최근 유럽의 난민 이슈를 다루고 있다. 시리아 출신 젊은 남성 칼레드는 핀란드에서 난민 신청을 하지만 심사에서 탈락한다. 그는 우연히 한 작은 레스토랑에 들어가서 일자리를 얻고 도움을 받는다. 독일 일간 <타츠>는 “알맞은 시기에 알맞은 영화”라며 이 작품을 유력한 황금 곰상 후보로 꼽았다. 영화제 내내 이 작품은 영국 영화 산업지 <스크린데일리>의 평점 지면에서 높은 점수(3.7)를 기록하며 선두를 달렸다. 엉뚱하고 기발한 장면들, 슬랩스틱과 독특한 유머로 웃음을 자아냈지만 난민에게 테러를 가하는 스킨헤드가 존재하는 엄혹한 현실도 빼놓지 않았다.

<펠리시테>

<스푸어> <펠리시테> <판타스틱 우먼>

알프레드 바우어상을 수상한 폴란드 감독 아그네츠카 홀랜드의 <스푸어>는 밝고 경쾌한 분위기와 음습한 범죄물의 정서가 섞여 있는 영화다. 숲속에서 개 두 마리와 살고 있는 60대 초로의 여성 두스 체코의 개가 흔적도 없이 사라진 날부터 사건은 시작된다. 사냥꾼 남성들에 대한 의문의 살인사건이 일어난다. 주인공은 생명을 함부로 살상하는 가부장적 남성 사냥꾼이나 인간 이외의 생명은 경시하는 신부에 대해 참을 수 없는 분노를 갖고 있다. 그사이 자연친화적이고 독립적으로 살아가는 이 여성이 자신과 비슷한 성향의 젊은이, 남성들과 우정을 맺고 유토피아적 공동체를 만들어가는 과정도 그린다. 감독은 이 영화를 “무정부적 생태 페미니즘 스릴러”라고 설명했다. <도이칠란트라디오>에서 영화평론가 페터 클라우스는 “스릴러, 풍자가 혼합됐다. 거기서 매우 심오하고 다채로운 사회상으로 확대된다. 매우 현대적이고, 관객을 감동시키는 영화”라고 평했다. 알랭 고미 감독의 <펠리시테>는 심사위원상을 받았다. 콩고의 킨샤사에 사는 열혈 여성 펠리시테 이야기다. 핸드헬드 카메라로 찍은 콩고의 거리와 풍경이 인상적이다. 펠리시테는 혼자서 16살 된 아들을 키우며 산다. 직업은 클럽 가수다. 그녀가 부르는 노래는 콩고 전통음악에 가깝다. 영화에 삽입되는 클래식 합창과 현악 연주 장면은 영화 내용과 상관없어 보이지만 펠리시테가 겪고 있는 감정상태를 대변한다. 펠리시테가 부르는 아프리카 전통음악과 대비되어 독특한 분위기를 일으킨다. 아들이 교통사고를 당했는데 치료비가 없어 동분서주하는 과정과 괴로운 나날들이 이어진다. 돈을 마련했지만 결국 아들은 다리를 잃고 만다. 그럼에도 희망을 찾아가는 과정에서 영화는 새 국면을 맞는다. 위로와 치유는 결국 곁에 묵묵히 있어주는 사람을 통해 가능하다.

칠레 출신 감독 세바스찬 렐리오의 <판타스틱 우먼>은 각본상을 받았다. 젊고 아름다운 트랜스젠더 여성 마리나가 갑작스럽게 미래를 약속한 동반자가 세상을 떠나며 겪게 되는 사회의 편견과 부당한 폭력에 맞서 싸우는 이야기다. 카메라는 자신의 존엄을 잃지 않고, 자신의 최소한의 권리를 위해 묵묵히 나아가는 태도를 담담히 따라간다. <스크린데일리>는 별점 4를 주며 금곰상 후보와 주인공 배우의 여우주연상을 점쳤었다.

<브라이트 나이츠>는 아들과 아버지의 단절된 관계 회복에 관한 영화다. 중년의 위기에 놓인 미하엘은 노르웨이에 혼자 사는 아버지의 부고 소식을 듣는다. 영화는 미하엘이 이혼으로 관계가 소원해진 아들 루이스와 장례식 때문에 노르웨이를 여행하는 로드무비를 그린다. 사춘기의 예민한 아들 루이스와의 관계는 점점 더 꼬이고 참기 힘들어진다. 앞이 보이지 않는 안개 낀 도로를 롱테이크로 찍은 장면이 미하엘의 심경을 나타내는 듯하다. 미하엘을 연기한 게오르크 프리드리히가 남우주연상을 차지했다.

<밤의 해변에서 혼자>

올해의 베를린영화제는 해마다 표방하는 ‘강인한 여성상’을 그린 영화들이 수상을 휩쓸었다. <판타스틱 우먼>의 트랜스젠더 여성 마리나, 다친 아들의 치료비를 구하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펠리시테>의 싱글맘, <밤의 해변에서 혼자>에서 불륜에 빠져 힘든 자신의 내면과 대면하며 성장하는 영희, <스푸어>에서 동물을 무분별하게 살상하는 사냥꾼과 대적하는 노년 여성 두스체코가 그러하다.

또 하나 특기할 만한 점은 예년에 비해 ‘정치적’ 모토를 전면에 내세운 영화들이 줄어들었다는 점이다. 테마에 대해서라면 올해의 베를린은 훨씬 더 다채로워졌다. 가족, 부부, 친구 관계를 조명하며 사회적 맥락을 볼 수 있는 개인의 운명을 다룬 영화들이 많았다. <롱맨>과 <펠리시테>, <희망의 다른 면>, 베를린파 감독으로 유명한 토마스 아르슬란의 <브라이트 나이츠>도 연대와 관계에 관한 영화들이다.

자유로운 예술가의 영혼을 그린 영화들도 눈에 띈다. 개막작으로 선보였던 <장고>는 실제 역사인물인 집시 출신 재즈 기타리스트 장고 라인하르트가 겪는 나치 격동의 시기를 보여준다. 또한 안드레아스 파이엘 감독의 <보이스>는 “누구나 예술가가 될 수 있다”며 예술의 정치화를 꾀했던 행위예술가 요제프 보이스의 삶과 예술을 조명했다. 한편 동물권, 생태 문제를 염두에 둔 영화들도 보인다. <스푸어>와 <온 보디 앤드 솔>은 그런 맥락 안에 있다. 또한 서구 지식인, 정치인들의 허위와 위선에 대한 실상을 까발린 블랙코미디들도 박수를 받았다. 샐리 포터 감독의 <더 파티>는 제한된 공간 안에 7명의 인물들이 얽히고설켜 벌이는 소동극이다. 오스트리아 코미디언인 요제프 하더의 데뷔작 <들쥐>도 해고된 저명 음악비평가의 지질한 모습을 신랄하게 표현했다.

<브라이트 나이츠>

“새로움과 아드레날린이 부족하다”

베를린국제영화제쪽은 올해의 영화제를 결산하며 “세계에서 가장 관객이 많은 든 영화제로, 관객 33만4천여명이 이번 영화제를 방문했다”고 자화자찬했지만 현지 언론은 좀 다른 생각이다. 올해의 영화제 수준은 대체로 하향 평준화됐다는 의견이 많다. 시사주간 <슈피겔>은 “베를린국제영화제는 막다른 골목에 이르렀다. 변화 없이는 빠져나오지 못할 것”이라고 했고, 일간 <쥐트도이체 차이퉁>은 “새로움과 아드레날린이 부족하다”고 했다. 주간 <디차이트>는 “이날 밤은 아무도 파티하는 기분을 내지 못했을 것이다. 기껏 해봤자 중간치에 겨우 도달한 영화제라는 걸 누구나 의식하고 있었기 때문이다”라고까지 썼다. 하지만 주요 매체의 평가를 오롯이 믿을 필요는 없는 것 같다. 경쟁부문의 18작품을 감상한 바에 따르면 긴장감이 떨어지는 작품 몇편을 제외하면 대개 뚜렷한 자기만의 색깔과 개성을 지닌 작품들이었기 때문이다. 예년에 비해 할리우드의 색채를 닮은 작품도 줄었다는 점 또한 올해의 인상적인 변화였다. 어느해가 그렇지 않겠냐마는 올해도 어김없이 베를린국제영화제는 놀라움과 아쉬움을 동시에 안고 막을 내리게 됐다. 이어지는 지면에서는 최근 국내에서 화제가 된 홍상수 감독의 신작 <밤의 해변에서 혼자>와 배우 김민희의 여우주연상 수상 소식을 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