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집에 내가 좋아하는 물건만 가지고 들어와야지, 생각을 정말 많이 했다.” 집이자 방인 공간은, 서울이라는 도시에서 자력으로 독립한 사람들이 당연하다는 듯 거쳐가는 하나의 상자다. 상자 안의 상자 안의 상자. 도시에서의 삶이란 이런 상자 단위의 수납을 끊임없이 생각하게 만드는 것이 아닐까. <혼자를 기르는 법>의 주인공 이시다를 어느 정도 연상하고 찾은 김정연 작가의 작업실 겸 집은, 좋아하는 물건으로 채워진 공간의 힘을 느끼게 해주었다. “캐릭터를 만들 때 무엇을 원하는 인물인지 정해주면 그다음부턴 그냥 둬도 유지되는 일관이 생기는데, 아마 이시다와 내가 주거 환경에 대한 강한 열망을 공유하고 있어서 더 그런 것이 아닐까 싶다.” 그런 작가의 말처럼, 언젠가 해보고 싶은 작업 중에는 ‘살기’와 관련된 일도 있다. “히드로 공항에서 알랭 드 보통을 불러 일주일 동안 살게 하면서 <공항에서 일주일을>을 쓰게 한 일이 굉장히 부러운데, 나도 공항이나 항공사와 관련된 작업을 해보고 싶어서… 아니면 보잉사랄지… 아무튼 나에게도 그런 연락이 왔으면 좋겠다. (웃음)”
-혼자가 될 존재를 기른다는 생각을 하지 않던 세대와 기꺼이 길러 혼자가 되겠다는 세대가 공존하고 있다. 혼자의 ‘완성형’이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겠지만, 어떤 혼자를 만들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본 적이 있나.
=혼자라는 단위가 결핍된 상태로 읽히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많이 한다. ‘혼자’를 걱정의 대상이나 아직 누군가를 만나지 못한 상태로 다루는 경우가 많은데, <혼자를 기르는 법>(이하 <혼기법>)에선 누가 없어서 생기는 문제보단 있어서 생기는 문제들에 더 관심이 많다. 이시다라는 인물도 온전한 개인이 되고 싶은 것이지 결코 자신의 삶에 공석이 있다고 느끼는 인물은 아니다.
-<혼기법>은 일상툰이 아니다. 하지만 일상툰으로 받아들여지는 부분도 있다. 경험과 창작, 김정연과 이시다의 경계선을 어떻게 만드는지.
=실제 생활을 소재로 한 만화들이 많아서 그런지 <혼기법> 또한 주인공과 내가 동일인물이라 생각하는 독자들이 꽤 있었던 듯하다. 나와 내 주변을 말하려면 책임져야 할 부분들 때문에 오히려 하고 싶은 말들을 못하게 될 수도 있겠단 생각도 들어서, <혼기법>에 있어선 오히려 픽션인 편이 내 이야기를 하기에 유리한 포지션이라고 판단했다.
-<혼기법>이라는 작명에 대해서도 궁금하다. 다른 제목 후보가 있었나.
=독립 동물들의 사육 환경과 연계해 개인의 서사를 풀어봐야겠단 생각을 한 뒤 제목은 생각보다 빨리 결정했다. 스트레스를 받으면 딴짓을 많이 하는데, 그중 하나가 동물의 사육 환경을 찾아보는 것이어서 ‘OO를 기르는 법’은 내게 굉장히 익숙한 검색어였다. 그래서 다른 후보들도 딱히 없었다. ‘기르는’과 ‘키우는’ 사이에서 약간 고민을 했던 것 같기는 한데 성장보다는 돌본다는 의미를 가져가고 싶어서 지금의 제목이 되었다.
-꼭 써야지 생각했던 실제 경험 중 <혼기법>에 반영된 것이 있나.
=여가의 모양새에 대해선 이야기할 수 있는 기회가 있으면 좋겠다고 늘 생각했었는데 <7화: 금요일>과 <18화: 여가를 팝니다>에서 할 수 있었던 것 같다. 개인적으로 ‘불금’이란 말을 별로 좋아하지 않아서 강요되는 여가들에 대해 <프라이데이-모럴리티> 에피소드도 그렸던 것 같고. 늘 만나서 가는 곳이나 하는 것들이 같다보니 사람들을 만나서 노는 데 더이상 재미를 느끼지 못하던 시기가 있었는데, 여가에 대한 창의력이 아예 사라져버린 것 같다는 생각을 많이 했다. 그래도 요즘은 집에서 지점토 잔치도 열고, 유튜브로 하루 종일 민항기 이착륙 동영상을 보면서 술을 마시거나, 무조건 거짓말만 해야 하는 자리를 만들거나, 주어진 장소에 먹히지 않으려고 새로운 놀이를 시도 중이다.
-‘도시에서 혼자 사는 젊은 여성’은 여성들의 경험과 남성들의 환상 사이에 가장 갭이 큰 것 중 하나가 아닐까 한다. 이시다를 떠올리면서 꼭 그려야지 했던 것과 결국 뺀 설정은 어떤 것이 있나.
=화장과 프라모델에 대한 이야기를 한번쯤 해보면 좋겠다고 생각했었다. 중학생 때 프라모델을 한 적이 있는데 성인이 되고 나서 화장을 배워보니 프라모델을 만드는 과정과 너무 비슷해서 놀란 기억이 있다. 거의 모든 프라모델 용품들에 대해 상응하는 화장품을 나열할 수 있을 정도다. 넣을까 말까 고민했다가 넣지 않은 것은 구체적인 폭력에 대한 묘사였다. 이시다가 독립을 위해 집을 나서면서 아버지와 어떤 갈등이 있었는지, 또 뒷골목에서 라이터를 빌려준 남자들에게 어떤 일을 당했는지에 대해 좀더 구체적인 내용을 그릴 수도 있었지만 어떤 수위를 특정하고 그 내용을 자세히 묘사하는 것보단 암시를 통해 무슨 일이든 일어날 수 있었다는 가능성을 열어두는 것이 하고 싶은 이야기에 더 적합할 것 같았다. 너무 많이 있는 일이라는 것, 그래서 너무 예상 가능하다는 데서 오는 것도 있었을 테고.
-결혼하지 않거나, 직장에서 승진하려고 안간힘을 쓰지 않는 사람들에 대해 무책임하다거나 철이 덜 들었다는 식의 말을 하는 경우를 본다. 그 자리에 머물러 있는 것도 경험인데. 이시다에게 누군가 그런 말을 한다면 어떻게 답해주고 싶은가.
=단 하나의 계획에 모두가 동의한 것처럼 전제하고 훅 들어오는 말들이 많은 것 같다. 흔히 이상적이니까- 또는 보통 그렇게들 하니까- 라는 식으로 묻거나 강요되는 말들인데 그에 비해 개인의 의사를 묻는 질문은 이상할 만큼 없는 것 같다. 의심하지 않으면 스스로도 속기 쉬운 말이기도 하고. 개인적으론 근거가 빈약하거나 관성처럼 하는 말은 보통 왜 그래야 하는지 되묻는 일로 대응하는 것 같다. ‘나는 그렇게 안 해’라고 말해버리기도 하고.
-이시다의 40대, 50대를 상상해본 적이 있나. 작가님의 40대, 50대에 대해 같은 질문을 한다면.
=<혼기법>을 통해 지금 나이에, 딱 지금의 이야기를 하고 있어서 경험해보지 못한 중년의 이시다에 대해 상상하는 일이 나의 중년을 상상하는 것만큼 쉽지 않은 것 같다. 그래도 지금 하고 있는 이야기들처럼 스스로 뭘 원하는지 잊지 않는 사람이었음 좋겠다. 이건 그냥 내 장기적인 목표와 관련된 건데, 그때도 지금처럼 쉽지는 않겠지만 컬렉팅에 관련된 취미를 가질 수 있다면 정말 좋겠다.
의미 있는 상자 , 필립 글래스 80 붓다머신
“필립 글래스의 80살 생일을 기념하여 제작된 붓다머신으로, 그의 음악에서 가져온 7가지 루프를 재생할 수 있는 기계. 건전지로 작동되긴 하지만 일종의 오르골이라 할 수 있다. 항상 음악을 틀어놓는 편인데, 계속 반복되는 곡들도 많이 듣는다. 평생 단 한곡만 들어야 한다면 잘 만든 루프 하나를 고르는 것이 가장 후회가 없을 것 같다.”
재미있는 상자, 고장난 인터폰
“이사 왔을 때부터 인터폰이 고장나서 작동이 되지 않았다. 초인종도 마찬가지. 어차피 쓰지도 못하니까 계속 액자처럼 사용하고 있다. 누가 놀러오면 가장 기뻐할까를 생각하다가 제레미 아이언스를 넣었다.”
가장 자주 들춰보는 책 , <도쿄 스타일>
“도쿄의 집 내부를 촬영해 모은 책. 우리가 머릿속에 좋은 집을 떠올렸을 때 건축적인 아름다움에 대해서도 떠올릴 수 있겠지만 그 안에 사는 사람을 얼마나 충실히 담아내고 있느냐도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비교적 협소하고 층고가 낮은 구조임에도 불구하고 그 안에 축적된 것들을 보면 주인이 어떤 사람인지 알 수 있을 것 같다. 굉장한 집들이 많은데 특정 기호의 과잉에서 오는 아름다움도 있다고 생각한다.”
작업할 때 꼭 필요한 물건 , 넥 레스트와 파스
“일을 하거나 놀 때 책상에 앉아 있는 경우가 많아서 목에 무리가 많이 간다. 특히 연재를 할 때는 누워서 쉴 수 없는 위기의 상황들도 많아서 넥 레스트를 사용하고 있다. 부드러운 질감의 깁스 같은 것이라 머리를 얹어놓고 목에 힘을 주지 않아도 된다. 심할 땐 파스도 같이 사용한다.”
가장 좋아하는 <혼기법> 컷➊
“지금을 알고 있는 인물의 어릴 적 사진을 보면 항상 이상한 기분이 드는 것 같다. 아직은 아무것도 겪지 않은 시기의 얼굴이기도 하고. 시나리오와 관련된 책에서 뭔가를 엄청 원하는 주인공이 있고, 그게 잘되지만 않는 것이 결국 서사라는 내용을 본 적 있는데, 이시다의 아기 때 얼굴을 보면 앞으로 뭐가 잘 안 될지를 그려나가는 사람으로서 역시 기분이 이상해질 때가 있다. 자주 보는 컷이다.”
가장 좋아하는 <혼기법> 컷➋
“키우던 햄스터도 순식간에 사라졌고 사람들 역시 다르지 않은데, 살아가는 동안 어떤 포즈로 어떻게 서 있으면 되는 건지를 잘 모르겠어서 그린 컷이다. 무엇을 성취하거나 수행하는 데 있어서 기록이 어떤 의미를 가지는지도 끊임없이 생각 중이다.”
내 인생의 영화
<더 랍스터> (감독 요르고스 란티모스, 2015)
“포스터부터 굉장히 좋아해서 휴대폰과 노트북의 배경화면으로 오랫동안 사용했다. 누구나 아는 시스템을 가장 다른 방식으로 말하는 영화라고 생각한다. 어떻게 작동하는지 아는 일들에 대해 모른 척하지 않아서 좋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