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인생의 영화]
[내 인생의 영화] 황석희의 <8월의 크리스마스> 비디오 시대 스타일의 우정
2017-03-22
글 : 황석희 (영화번역가)

감독 허진호 / 출연 한석규, 심은하 / 제작연도 1998년

“테이프가 늘어지게 들었다.” 카세트테이프 세대라면 한번쯤 써봤을 말. 너무 많이 들으면 카세트테이프가 늘어나 특정한 구간만 늘어진 소리가 난다는 뜻이다. 내게는 늘어진 비디오테이프가 있었다. 대학 시절 내 허름한 자취방엔 꾸역꾸역 아르바이트를 해서 장만한 비디오덱이 있었고 언젠가 동네 비디오가게 폐업정리 때 산 비디오테이프 몇개가 책장에 꽂혀 있었다. 영화에 대한 열정은커녕 극장도 잘 가지 않던 놈이 무슨 바람이 불어 비디오덱을 사고 테이프들을 주워왔는지는 아직도 기억이 나질 않는다. <라스베가스를 떠나며> <포레스트 검프> <헐리우드 키드의 생애> 등 취향이랄 것도 없이 마구잡이로 가져온 테이프 열댓개 중 유일하게 늘어난 테이프는 <8월의 크리스마스>다. 극장에서 보지 못한 영화였고 사실 이 영화의 존재도 잘 몰랐다.

대학 1학년 말, 엄하던 아버지에게서 벗어나 태어나 처음 자유를 맛본 나는 방학 때도 집에 안 내려가고 춘천에 남아 학기 때와 마찬가지로 기타와 노래와 술로 하루를 보냈다. 저렇게 온전히 노는 데 시간을 다 때려붓다니, 지금 생각하면 집에서 벗어나고 싶어 지방대를 갔나 싶기도 하다. 1999년 겨울, 비오던 날, 무슨 이유에선지 <8월의 크리스마스>를 몇달 만에 처음으로 비디오덱에 넣었다. 자취방 옆 구멍가게에서 산 소주 한병과 참치 한캔을 바닥에 펼쳐놓고 영화를 보기 시작했다. 영화는 심심했고, 연예계에 무관심한 나도 알 정도의 유명배우들이 나왔고, 대사도 별로 없었고, 시작이 그러했듯 끝도 심심했다. 첫 관람의 기억은 이렇게 그리 특별할 게 없었다. 소주 두병을 혼자 마신 게 처음이었다는 것밖에는. 이 테이프를 혹사하기 시작한 건 이때부터다. 주말마다 꼬박꼬박 테이프에 손이 갔고 주중에 비나 눈이라도 오면 보는 횟수가 한번 더 늘었다. 냉장고에 소주가 있으면 술을 마실 겸 이 영화를 틀었고, 소주가 없으면 이 영화를 보려고 소주를 사왔다.

<8월의 크리스마스>에 유독 마음이 끌리는 것은 이 영화가 내게 오지랖을 떨지 않기 때문이다. 둘이 만나 두 시간이고 세 시간이고 말없이 술잔만 부딪혀도 마음 넉넉해지는 벗처럼 덤덤하게, 하지만 뭉클하게 마음을 건드린다. 자랑하지 않고, 충고하지 않고, 강요하지 않는 그 침묵에 더없이 큰 위로를 받는다. 대사도 적지만 이렇게 여백이 많은 작품도 드물다. 인물이 다 빠진 배경이 덩그러니 남아 한참 동안 날 쳐다본다. 이 정도면 오히려 영화에 내가 말을 걸고 싶을 정도다. 처음엔 그 시선이 낯설고 민망하지만 시간이 갈수록 그 덤덤한 시선이 익숙해진다. 그리고 나도 똑같은 눈으로 그 여백과 눈을 마주하게 된다. 그렇게 이 영화와 나는 친구가 된다.

비디오덱을 쓰지 않는 지금은 이 영화를 전보다 훨씬 덜 본다. 1년에 두어번 보려나. 이 글을 쓰기 전까지도 잊고 있었다. 비디오테이프 케이스를 열 때 나던 딸깍 하는 소리, 비디오덱에 테이프를 밀어넣을 때 나던 모터 소리, 정원(한석규)이 이불을 뒤집어쓰고 흐느끼던 소리. 그런데 어느 부분이 늘어나 있었는지 기억이 나질 않는다. 그 늘어난 장면이 뭐였는지 궁금해 견딜 수가 없는데 이젠 그 테이프가 없어서 알 도리가 없다. 사진 한장 없는 첫사랑의 얼굴처럼.

황석희 영화번역가. 남편, 버스커. <인사이드 르윈> <캐롤> <데드풀> <문라이트> <로건> 등을 번역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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