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투 감독이 봉투를 벗고 얼굴을 공개했다. 지난해 9월 21일 한겨레TV <김어준의 파파이스> 113회 방송에 얼굴을 가리기 위해 봉투를 쓰고 출연해 자신이 연출을 맡고 있는 다큐멘터리 <더 플랜>과 <저수지 게임>을 짤막하게 소개했던 그다. <더 플랜>은 2012년 대선 개표 부정 의혹에 대해 과학자, 수학자 그리고 통계 전문가들이 개표 숫자들을 재미나게 파헤치는 미스터리 장르의 작품으로, 4월 14일에 유튜브에서 무료로 개봉하기로 결정했다(4월 4일 언론시사, 4월 12일 <김어준의 파파이스> 공개 방송에서 최초 공개된다). <저수지 게임>은 <시사IN> 주진우 기자가 탐정처럼 이명박 정권의 비자금 저수지를 추적하는 “하드보일드한 미스터리 명랑 추적극”으로 6월 극장 개봉을 목표로 진행되고 있다. 이 두편은 세월호 사태를 소재로 한 <인텐션>(감독 김지영)과 함께 프로젝트 부가 제작한 다큐멘터리다. 봉투를 벗은 봉투 감독의 정체는 최진성 감독이다. 1년이 넘는 시간 동안 매달 한두번씩 최진성 감독을 만나며 가까이서 지켜본 다큐멘터리 제작기를 공개한다. 그가 얼굴을 가리면서까지 <더 플랜>과 <저수지 게임>, 다큐멘터리 두편을 연출한 이유는 무엇일까.
2016.02
“주진우 기자, <딴지일보> 김어준 총수와 함께 다큐멘터리 만들어요.” 최진성 감독은 뚱딴지같은 소리를 했다. 주진우, 김어준 같은 일면식도 없는 사람들과 웬 다큐멘터리? 류승완 감독의 소개로 주진우 기자를 만났고, 그 뒤로 주 기자를 매주 만난다나. 무슨 내용인지 물어보니 ‘가카’(이명박 전 대통령)의 비자금을 좇는 얘기란다. 그 이상은 아직 ‘쉿’이라며.
16년 전, 박정희 신화에 사로잡힌 한국의 우익 꼴통들에게 ‘뻑큐’를 날렸고(<뻑큐멘터리-박통진리교>(2001)), 월드컵 4강 진출에 광분하는 4700만 붉은 악마를 ‘왕따’시켰으며(<그들만의 월드컵 ver.2.0>(2002)), 노무현 정권의 이라크 전쟁 파병을 앞서서 풍자한 데다가(<제국-누구를 위하여 총을 울리나>(2003)), 4대강 공사 현장을 찾아가 펼친 작은 공연을 카메라에 담았고(<저수지의 개들>(2011)), 제주 강정 마을에 해군 기지 건설을 반대하는 퍼포먼스를 선보이는(<Jam Docu 강정>(2011) 등 한국 사회의 주요 이슈를 카메라에 담아낸 최진성 감독이다. 그 뒤로 아이돌 성장 다큐멘터리 <I AM.>(2012)과 장편 극영화 <소녀>(2013)를 만들었고, 다음 영화를 준비하던 그가 별안간 가카의 비자금을 좇는 주진우에게 꽂힌 이유는 무엇일까.
“한국 사회가 정상적으로 작동되지 않고 있다는 공감대가 당연히 있었다. 이명박은 돈이 낳은 괴물이자 대한민국의 가짜 성공신화라 할 만하다. 현재 진행형인 그를 이 시점에서 다루는 건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김어준과 주진우라는 인물에 대한 호기심과 괴물에 대한 공분이 연출을 결정하는 데 크게 작용했던 것 같다.” 그는 앞으로 연락할 때 아이메시지(아이폰의 메시지 기능)로만 보내라고 신신당부했다.
2016.07
5개월 만에 만난 최진성 감독은 주 기자와 캐나다 토론토를 다녀온 일화부터 꺼냈다. 토론토에서 둘은 2013년 발생했던 토론토 역사상 가장 큰 부동산 사기사건을 추적했다. 한국 대기업과 국내 모 금융기관(이하 모 은행)이 직접 투자한 이 사업은 공사비만 1500억원 넘는 대형 프로젝트다. 토론토 한인 밀접지역인 노스요크에 주상복합 빌딩을 짓겠다고 발표했다가 추가 자본금을 유치하지 못해 부지가 경매로 넘어가면서 건설이 무산됐다. 해외에서 벌어진 사기사건으로 넘기기에는 수상한 구석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모은행은 국내 법인 A사를 통해 캐나다 시행사에 210억원을 선뜻 대출해줬고, 대출 과정에서 담보 관리가 부실했으며(나중에는 담보를 그냥 풀어주기까지 했다), 사기사건이 발생한 뒤로 대출금 210억원이 손실 처리됐음에도 돌려받기 위한 어떤 고소나 고발 신고를 하지 않았다. 2014년 주진우 기자가 모 은행에 “왜 (대출금 210억원을) 회수하려고 노력하지 않는가”라고 묻자, 사장급의 한 임원은 “해외에서 벌어진 일이어서 소송을 해도 실익이 없다”고 대답했다. 2015년 다시 찾아가서 같은 질문을 하자, 모 은행의 한 고위 임원은 “은행이 사업을 하다보면 실패할 수도 있는 것 아니냐”라고 해명했다. 상식적으로 납득이 되는가. 그런데 이 사건이 가카와 무슨 관계가 있기에 최진성과 주진우는 토론토까지 갔을까. 최 감독을 만나고 며칠이 지난 뒤, 그에게서 문자 한통이 왔다. ‘모 은행이 날려버린 210억원의 배후는?’ 범죄소설 같은 제목의 기사 링크였다. 주진우 기자가 토론토를 다녀오자마자 쓴 기사였다. 이 기사에 따르면, 모 은행 안팎에서는 이상한 대출 과정 배경을 두고 이명박정부 내 권력자의 친인척 이름이 오르내리고 있다. 주진우와 최진성, 둘은 토론토에서 가카와 관련된 어떤 진실을 보았을까(<저수지게임>에 대한 내용은 아직 자세하게 공개할 수 없다).
2016.08
최진성 감독이 <저수지 게임> 배급을 어떻게 하면 좋겠냐고 물어왔다. 김어준이 제작하고 주진우가 출연하며, 가카가 싫어할 만한 다큐멘터리가 극장 개봉하는 건 여러모로 화제는 되겠으나 현실적으로 만만치 않아 보였다. CJ의 누군가를 만나 CJ가 맡을 의향이 없는지 물었더니 그는 아연실색했다.
2016.09_[1]
※9월엔 두 번 만났다. 순서를 따로 표기했다.
“(김어준) 총수가 막무가내였어.” 최 감독이 짐을 더 떠안았다. 총수가 밤 10시에 최 감독을 자신의 본거지인 벙커1로 불러 지난 대선 부정 개표 의혹을 다룬 다큐멘터리도 맡아달라고 했다. “오늘 결정 안 하면 방법이 없다”는 협박(?)과 함께. 개표 부정 선거와 관련된 여러 의혹들을 들으면서 개표 과정이 ‘이상하다’고 생각하고 있었지만, 큰 관심은 없었던 그다. 주진우 프로젝트 하나만 해도 벅찬 까닭에 총수의 제안이 부담스러웠으나 총수에게서 전국 251개의 모든 개표소에서 같은 패턴을 가지고 등장하는 ‘어떤’ 숫자의 비밀을 듣고는 마음을 바꿨다. 그 숫자의 비밀은 그간 온라인에서 제기됐던 음모론과 차원이 달랐다.
최진성은 총수에게 “지난 대선 개표에 쓰였던 전자투표기에 대한 과학적인 검증과 개표 결과에서 드러난 통계에 대한 숫자적인 검증을 통해 그 숫자의 비밀을 파헤치는 작품으로 만들고 싶다”고 말했다. 총수 또한 “내가 원하는 게 그거다. 음모론에는 관심없다”고 하면서 둘은 의기투합했다. 그날부터 최진성은 지난 대선과 관련된 여러 통계와 해킹을 공부하기 시작했다. 문과 출신인 그가 숫자, 해킹 시스템과 씨름하게 될 줄은 예상도 못했을 것이다.
2016.09_[2]
김어준의 프로젝트 부 세편(<인텐션> <저수지 게임> <더 플랜>)이 한겨레TV <김어준의 파파이스> 113회 방송을 통해 최초로 공개됐다(자세한 내용은 <씨네21> 1073호 씨네스코프 기사 “독점공개! ‘프로젝트 부’가 진행하고 있는 다큐멘터리 <인텐션> <저수지 게임> <더 플랜>” 참조할 것). 벙커1에서 만난 김어준 총수는 프로젝트 부가 “한자로 아닐 부, 부정부패, 부조리에 대해 안 된다, 거부한다는 의미”이기도 하고, “그런 ‘부’를 대상으로 삼아 파헤치는 프로젝트라는 의미”라고 말해주었다. 저녁 식사를 함께하면서 최진성 감독은 방송에 쓰고 나갈 봉투를 보여주었다. “우리의 신분이 노출되면 앞으로 만나야 할 사람들이 우리를 만나주지 않을까봐 걱정돼” 얼굴을 가리기로 했다.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는 대학교에서 알면 큰일난다”라든가 “충무로에서 영화를 만들기 어려울지도 모른다” 같은 농도 주고받았다. 긴장이 되긴 되나보다.
2017.01
지난해 12월 9일, 박근혜 대통령에 대한 탄핵 소추안이 국회 본회의에서 가결되면서 <더 플랜>과 <저수지 게임> 제작 일정에 비상이 걸렸다. 헌법재판소가 탄핵을 인용한다면 5월 조기 대선이 치러질 것이고, 대선 전에 공개해야 하는 <더 플랜>의 일정 또한 앞당겨지게 되는 것. 최진성은 다급했다. “미국과 독일 촬영을 빨리 갔다와야 한다. 4월쯤 공개하려면 후반작업 일정이 빡빡한데… 걱정이다.”
2017.02_[1]
“해외 촬영까지 할 정도면 블록버스터 아닌가. (웃음)” <더 플랜> 촬영 때문에 미국과 독일을 각각 1월과 2월에 다녀온 최진성에게 농을 던졌다. 미국은 ‘전자 투·개표 시스템의 고향’ 같은 곳이다. 매년 해킹과 투·개표 조작 가능성 때문에 문제가 되고 있고, 투·개표 기계를 통과한 데이터가 온전하게 집계되지 않았다는 사례가 수차례 나온 나라이기도 하다. 그곳에서 그는 전자 투·개표 시스템에 대한 문제의식을 가지고 있는 시민운동가와 부정 선거 관련된 데이터를 가지고 있고, 또 그것을 연구하고 있는 전문가들을 만났다. 최진성은 그들과의 만남을 통해 “전자개표기를 정말 없애야 한다”고 생각하게 됐다. “그들은 더블 체크를 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기계를 통과한 투표지를 다시 손으로 집계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한국도, 미국도 수개표를 제대로 하지 않는다.” 수개표가 중요한데도 하지 않는 건 “집계 결과를 빨리 내놔야 한다는 분위기 탓”이다.
전자개표 시스템이 문제가 되고 있음에도 별다른 조치가 없는 미국과 달리 독일은 2000년대 중반 전자개표 시스템이 문제가 돼 시민 소송을 통해 전자개표기를 없앤 나라다. 현재 수개표로 진행되고 있다. 독일의 개표 시스템은 “시간이 걸리더라도 정확하게 집계하는 게 원칙”이다. “투표가 끝나면 모든 개표가 손으로 진행된다. 개표 완료까지 꼬박 하루가 걸린다. 그렇게 나온 숫자는 잠정 결과다. 곧바로 더블 체크가 전국적으로 이루어진 뒤 3주 뒤에 확정 결과가 발표된다. 잠정 결과와 확정 결과가 큰 차이가 나지 않는다”는 게 최 감독의 설명. 시간이 오래 걸리는데도 독일 국민들은 3주를 기다린다. 민주주의의 꽃이 선거라면 시민들이 던진 한표가 정확하게 쓰이는가가 선거의 핵심이다.
2017.02_[2]
지피지기면 백전백승이라고 했던가. 개표 조작 가능성을 확인할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은 직접 조작해보는 것이다. 최진성은 어떤 경로를 통해 2012년 사용된 개표기보다 한단계 업그레이드된 기계를 입수했다. 같은 회사에서 만든 전자개표기로, 동일한 기계라 봐도 무방하다. 원래는 전자개표기를 중국에서 제작하려고 했으나 기계 구조가 복잡해 제작하는데만 무려 2년이 걸린다고 해서 제작은 엄두조차 못냈다.
파주의 한 세트장에서 가상의 투표소를 마련해 전자개표기의 개집계를 조작하는 실험이 이루어졌다. 중앙선거관리위원회는 그동안 그 누구도 전자개표기를 조작할 수 없다고 주장해왔다. 하지만 실험 결과는 누군가가 마음만 먹으면 원하는 결과를 만들어낼 수 있다는 사실로 드러났다. 이 실험을 참관했던 ‘시민의 눈’(온라인과 오프라인에서 부정선거를 감시하고 선거정의를 실현하는 시민들의 모임이다.-편집자) 회원 7명을 포함한 제작진은 실험 결과를 확인하고 큰 충격을 받았다. 제작진은 전자개표기에서 나온 일정한 패턴의 데이터를 증명해냈다. 영화가 공개되면 중앙선거관리위원회는 전국 투표소 1만3500개와 개표소 251개에서 나온, 일정한 패턴의 숫자에 대해 해명을 해야 할 것이다.
2017.03
마침내 <더 플랜>과 <저수지 게임> 두편의 공개 일정이 결정됐다. <더 플랜>은 보다 많은 사람들에게 보여주기 위해 4월 7일 유튜브에서 무료 개봉한다. <저수지 게임>은 대선이 치러진 뒤인 6월 극장 개봉한다. 4월에 프로젝트 부 후원에 참여한 사람들을 초대해 <더 플랜> <저수지 게임> <인텐션> 세편 모두 공개하는 특별 시사회를 열 예정이다. 최진성 감독은 <더 플랜>과 <저수지 게임>을 마무리하는 대로 영화 <루팡>에 합류할 계획이다. 아직 자세한 얘기를 꺼낼 수 없지만, <루팡>은 <저수지 게임>과 <더 플랜>과 관련이 있다고 한다. “<저수지 게임>을 1년 반 정도 연출하다보니 권력형 비자금 흐름에 대한 전문가가 되어 있었고, <더 플랜>을 10개월 정도 만들다보니 사이버 해킹 전문가가 되어 있더라. (웃음) <루팡>의 주인공 중 한명이 해커이고, 주인공들이 맞서는 대상이 재벌인데, 그 재벌의 비자금이 이야기에서 중요한 모티브가 된다. <루팡>은 <더 플랜>과 <저수지 게임>을 통해 치열하게 부딪힌 현실과 나의 영화적 상상력이 긴밀하게 만나 ‘케미’를 일으키는 지점이 될 것 같다”는 게 최 감독의 얘기. 어쨌거나 우리는 지난 대선에서 우리의 한표가 정확하게 행사됐는지 알 권리가 있다. 개표 과정에서 의혹이 하나라도 있다면 투명하게 밝혀져야 한다. 그게 많은 시민들이 <더 플랜>을 봐야 하고, 이번 대선의 개표 과정에 관심을 가지고 지켜봐야 할 이유다.
2012 대선 부정 개표 의혹을 다룬 다큐멘터리 <기술자들>과 <메멘토 모리>
지난 대선 부정 개표 의혹을 다룬 다큐멘터리로는 최하동하 감독의 <기술자들>과 이마리오 감독의 <메멘토 모리>도 있다. <기술자들>은 해커, 제18대 대선 선거무효 소송인단 사무처장, 제18대 대선 개표조작 시민수사팀장 등 여러 사람들의 증언을 통해 박근혜 전 대통령의 득표율 51.6%의 비밀을 추적하는 포렌식 정치스릴러 다큐멘터리다. 4월 19일 개봉을 목표로 막바지 작업을 하고 있다. <메멘토 모리>는 국정원의 제18대 대선 개입 의혹을 파헤치는 작품이다. 제18대 대통령선거에 조직적으로 개입했던 국정원에 대해 특검을 요구하다가 서울역에서 분신한 고 이남종씨의 뜻을 기리기 위해 제작됐다. 상반기 개봉이 목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