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비평]
[김소희의 영화비평] 시대를 앞서간 자본주의적 인간의 초상 <파운더>
2017-05-02
글 : 김소희 (영화평론가)

영화 <파운더>(2016)에 관한 평가는 곧 주인공 레이 크록(마이클 키튼)에 관한 평가와 직결된다. 맥도널드를 세계적인 패스트푸드점으로 탄생시킨 레이의 공력을 인정하는 이들은 어딘가 씁쓸한 뒷맛을 느끼면서도 영화 <파운더>를 받아들일 것이며, 레이 크록이 맥도널드 형제의 기술과 이름을 빼앗고 그에 관해 제대로 된 보상을 해주지 않은 것에 분개하는 이들은 <파운더>의 모호한 태도가 못마땅할 것이다. “자네가 대체 무슨 아이디어를 냈는지 하나라도 말할 수 있겠나?” 레이를 향한 맥의 일갈은 관객이 레이에게 묻고 싶은 말이기도 하다. 레이는 뻔뻔하게 답한다. 나는 승리의 컨셉을 고안했노라고.

<파운더>의 레이를 생각하다 한동안 불거진 조영남 대작 의혹 논란을 떠올렸다. 요는 무명화가인 조수가 그린 그림에 조영남이 덧칠하고 사인을 붙인 작품이 조영남의 그림으로 팔려나간 거다. 조영남은 이에 대해 작품의 최초 구상은 자신에게서 나왔다고 강조했다. 작가에게 터무니없이 낮은 보수를 지급하는 등 다른 측면에서 비난받기도 했지만, 가장 핵심적인 문제는 ‘과연 그 그림이 조영남의 작품인가’이다. 온라인상에서 조영남의 대변자 노릇을 했던 미학자 진중권은 남성용 소변기 위에 서명하고 ‘샘’이라는 제목을 붙였던 뒤샹 등 개념미술 사례를 들어 다른 이가 그림을 그렸다고 해도 컨셉의 제공자가 조영남이라면 그것은 조영남의 그림으로 봐야 한다고 말했다.

맥도널드는 누구의 것인가

그림의 주인을 둘러싼 논란과 변호는 ‘맥도널드가 누구의 것이냐’라는 <파운더>의 핵심 질문에도 하나의 참고점이 될 것 같다.

개념미술가들이 ‘무엇이 예술작품을 만드는가’란 질문을 파생시켰듯이, <파운더>의 질문에 대한 답도 맥도널드를 어떻게 정의하느냐에 따라 달라진다. 맥도널드의 스피디 시스템을 만든 사람은 맥도널드 형제다. 그러나 스피디 시스템을 전 매장에 도입해 세계적인 푸드 체인으로 만든 사람은 레이 크록이다. 우리가 향유하는 것은 전자이지만, 이를 가능하게 한 건 후자다. 레이 크록이 맥도널드 형제에게 ‘당신들의 권리는 주방에서 시작해 주방에서 끝난다’고 못 박았듯이 식당 내부의 스피디 시스템을 고안해낸 건 맥도널드 형제지만, 레이는 확장에 있어서 스피디시스템을 고안했다. 그가 무명의 세일즈맨 시절부터 읊고 다녔으나 아무도 알아주지 않았던 ‘공급이 수요를 창출한다’는 명제가 맥도널드를 통해 비로소 실현된 것이다. 레이가 한 레스토랑에서 ‘닭이 먼저냐, 달걀이 먼저냐’라는 대사가 포함된 홍보 레퍼토리를 읊을 때, 카메라는 그의 얼굴을 정면 클로즈업으로 잡는다. 이 질문이 관객에게 던지는 것임을 뜻하는 거다. 닭과 달걀 이야기는 곧 ‘스피디 시스템이 있었기에 지금의 맥도널드가 가능했는가, 레이 크록이 있었기에 지금의 맥도널드가 있는가?’ 라는 질문으로 연결된다. 이 질문은 지금의 맥도널드를 좋아하는가 아닌가와는 무관한 것이다.

레이의 가장 큰 능력은 실행력과 결단력 이전에 어떤 것의 가치를 알아보는 그의 시각에 있다. 그러니까 레이는 ‘설립자’로서의 ‘파운더’이기 이전에 맥도널드의 가치를 ‘발견한 자’로서의 ‘파운더’다. 영화가 끝난 뒤에도 또렷이 각인되는 레이의 얼굴이 있는데, 그것은 그가 어떤 것에 매혹된 표정을 지을 때다. 샌버너디노에 위치한 맥도널드 형제의 식당을 발견했을 때 그는 처음 보는 광경에 약간 얼떨떨한 모습이다. 이미 그곳 사람들에게는 일상이 된 풍경이 얼마나 혁신적인 광경인지를, 이방인의 눈으로 바라본 그만이 인식한다. 맥도널드 형제가 컨셉 이미지로 만들어놓고도 피닉스 지점 외에는 실질적으로 활용하지 않은 황금아치를 눈으로 확인한 그의 표정은 어떤 경이로운 건축물을 본 것처럼 황홀하다. 그는 황금 아치로 대변되는 기업의 상징 이미지가 법원의 국기, 교회의 십자가와 같은 상징만큼 중요할 수 있음을 발견해낸다. 단순히 햄버거를 먹는 장소가 아니라 만남의 장소이자 하나의 가족이라는 가치를 표현하는 엠블럼으로 황금아치를 설정한 건 레이다. 뒤샹이 변기에서 예술 재료로의 가치를 발견하고, 개념미술가들이 물질이 지닌 본디 가치보다 그것이 예술이 될 수 있는 아이디어가 더 중요함을 발견했듯이, 한명의 개념예술가로서 레이는 서명으로서의 황금 아치가 있어야만 비로소 완성될 맥도널드의 가치를 발견한다.

너무 이른 동시에 너무 늦게

고급예술에 반기를 든 팝아티스트들처럼 레이는 맥도널드 프랜차이즈 사업에 빠져들면서 그의 부르주아 친구들과 멀어진다. 레이의 친구들은 “접이식 테이블에 앉아 일회용 용기에 담긴 음식을 먹는” , 지금은 상용화된 푸드 체인 시스템을 비웃는다. “부르주아들과 노닥거리는 데 흥미를 잃”은 레이는 대신 돈을 벌기 위해 성경 외판원 노릇을 하는 가난한 유대인에게 지점을 나눠주고 그들과 어울리며 그들의 문화를 접한다. 레이가 밀크셰이크에 들어가는 아이스크림을 대신할 밀크셰이크 파우더마저 받아들일 때, 그는 일견 새로운 것에 경도된 예술가처럼 보인다. 그가 파우더 셰이크를 받아들인 이유는 복제본인 파우더 셰이크가 원본인 밀크셰이크와 아무런 맛의 차이가 없었기 때문이다.

효율성과 비용절감을 최우선 가치로 내세운 그에게 손쉽게 속물이라는 딱지를 붙이고 싶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원본과 복제본의 차이가 없음을 밀어붙여 복제를 존재 가치로 삼은 것은 팝아트의 선구자 앤디 워홀이었다. 효율성과 비용절감은 단지 자본주의나 경영자들만의 워딩이 아니다. 영화에서 디지털이 필름을 대체한 것은 새로운 매체를 향한 예술가들의 열망이라고 표현할 수도 있겠지만 효율성과 비용절감 역시 무시 못할 요인 중 하나다. 디지털이 새로운 선택지로 등장한 이후 더 많은 이들이 영화를 찍을 수 있게 되었고, 필름을 고집하는 건 비싼 필름값을 감당할 수 있는 소수였다. 필름 수호자들은 필름을 옹호하는 한편, ‘영화는 아무나 찍을 수 없다’는 인식을 은밀히 지키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예술작품은 미래에 대한 반향들로 전율하고 있는 한에서만 가치를 갖는다.” 앙드레 브르통의 말이다. 발터 베냐민은 이 말을 이렇게 받았다. “예로부터 예술의 가장 중요한 과제 중 하나는, 아직 충족되기에는 때이른 어떤 수요를 창출해내는 일이었다.” 레이 크록이 예술가는 아니지만 시대를 앞선 그의 시각만큼은 다다이스트나 초현실주의자들의 그것만큼이나 혁신적이다. 영화의 배경이 된 1954년 그는 이미 중년의 나이였지만, 놀랍도록 현대적인 인간으로 보인다. 맥도널드에 사로잡혀 멍한 표정을 짓던 순간, 어쩌면 그는 번쩍이는 미래의 섬광을 보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레이의 얼굴은 시민 케인을 잇는 자본주의적 인간의 초상을 드러낸다. 감독 존 리 행콕은 레이를 들어 ‘시민 케인적’인 인물이라 칭한 바 있는데, 시민 케인이 격변하는 매스미디어 시대를 예고한 인물이었다면 레이는 다가올 프랜차이즈 요식업의 시대를 예고한다. 케인에게 창간호 1면에 적은 발행인의 맹세가, 레이에게는 외판원 생활을 하면서 읊어온 그의 경영 지론이 되겠다. 후에 케인은 자신이 쓴 선언문을 제 손으로 찢어버린다. 연설을 준비하던 레이는 읊어오던 지론 대신, 레코드에서 늘 들어온 캘빈 쿨리지 전 대통령의 격언을 마치 자신의 말처럼 읊는다. 예행 연습을 하던 그가 거울에 비친 자신의 얼굴을 모호한 표정으로 얼마간 바라본다. 그는 그 순간 진짜 자신의 것은 아무것도 없음을 자각한 걸까. 물론 이미 때는 늦었다. 질투에서 해방된 살리에리요, 살인에서 해방된 리플리인 레이는 너무 이른 동시에 너무 늦게 우리 곁에 당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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