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해 전 서울아트시네마에서 아녜스 바르다의 <방랑자>를 본 기억이 난다. 겨울이었을 것이다. 종로의 그 극장 안에 앉아 있으면 여름이건 겨울이건 추웠다. 오들오들 떨며 영화를 보고 나오다 역시 혼자 영화를 보러 왔던 오래된 친구와 우연히 마주쳤던 기억이 난다. 우리는 같은 말을 반복했다. 참 춥다, 날씨도. 영화도.
그리고 며칠 전, 다시 같은 영화를 보게 되었다. 봄이었지만 영화를 보는 내내 한기가 몰려왔다. 영화의 첫 장면은 들판에서 동사한 여성의 사체를 비추며 시작된다. 그리고 여성과 조금이라도 접촉이 있었던 사람들의 증언이 이어진다. 시몬이라는 고리타분한 이름을 버리고 스스로를 모나라고 부르기를 선택한 주인공은 방랑자다. 지나가는 대사로 미루어볼 때, 그녀는 어느 정도 교육을 받았으며 따라서 충분히 사회로 편입될 수 있었으나 “윗사람들”을 모시기 싫다는 이유로 야영 혹은 노숙을 시작했다. 그리고 영화를 보는 우리는 모나의 고된 여정이 어떻게 끝나는지 이미 알고 있다.
모나와 같은 삶을 꿈꾼 적이 내게도 있었나? 처음 이 영화를 봤을 때 나는 이렇게 자문했다. 초·중·고등학교를 다니던 12년 동안 한번도 결석해 본 적이 없는 청소년이었던 나는 미지의 자유보다는 가시적으로 분명한 제약을 좀더 선호했는지도 모르겠다. 규칙과 규범에 따르는 것이 보다 편하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혹은 학교 빠지면 큰일이라도 나는 줄 아는 다소 미련한 성격이었는지도 모르겠고.
그러다 다시 이 영화를 보게 된 지금, 내게는 모나의 자유를 위한 방랑보다도 그런 모나를 바라보거나 스쳐 지나가는 인물들이 더 눈에 들어왔다. 모나는 알량한 선의를 베푸는 사람들에게 결코 고맙다는 말을 하지 않는다. 미안하다는 말도 물론 하지 않는다. 먼저 인사를 건네는 법도 없다. 기존에 합의된 사회적 관습이나 규범들과 유리된 삶을 살겠다는 사람의 태도다. 그렇다면 그런 사람을 나는, 혹은 사회는 어떻게 대해야 하는 것일까. 기존의 법칙으로 분류되기를 거부하는 사람을 우리는 어떻게 대해야 하는 것일까. 이런 질문을 하게 된 건 아마도 내가 모나보다는 그녀를 지켜보는 사람에 가까울 때가 많을 것이기 때문이다.
선의와 호의는 오래 지속되지 못한다. 이런 행동들 역시 일종의 거래에서 비롯되고, 거래가 결렬되면 중단되는 속성을 갖고 있다. 감정을 거래할 생각이 없는 모나는 결국 길 위에서 죽는다. 그 죽음을 막고 싶었다. 그러나 그것이 가능하지 않았다. 단지 영화 속에서 벌어지는 일이기 때문만은 아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