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수민의 오독의 라이브러리]
[박수민의 오독의 라이브러리] 나카타 히데오의 <검은 물 밑에서>와 월터 살레스의 <다크 워터>
2017-05-11
글 : 박수민 (영화감독)
<검은 물 밑에서>

물속에 뭔가 있다. <링> 시리즈의 작가 스즈키 고지의 단편소설 <부유하는 물>(1996)에서, 주인공 요시미는 새로 이사 온 아파트의 수돗물 맛이 분명 다르다고 느낀다. 컵을 들어 형광등에 비춰보니 물속에 알 수 없는 미세한 먼지들이 떠다니며 기포와 엉긴다. 싱크대에 물을 버리는 요시미는 수원지로부터 아파트의 수도에 이르는 물의 경로를 머릿속으로 그려본다. 그러곤 이 아파트가 만(灣)을 메운 매립지 위에 세워진 건물임을 새삼 떠올린다. “시대와 시대의 잔재로 초석을 메운, 이 흐리터분한 발밑”을 생각하자 요시미는 가벼운 현기증을 느낀다.

불꽃놀이를 하러 올라간 아파트 옥상에서 요시미의 어린 딸 이쿠코는 키티가 그려진 빨간 가방을 줍는다. 요시미는 그 가방을 관리실에 맡기지만 유실물을 찾아가는 주인은 없고, 며칠 후 쓰레기통에 버려졌던 가방은 누가 일부러 갖다놓은 것처럼 옥상으로 되돌아온다. 그날 저녁 딸은 목욕 중에 욕조 안에서 ‘밋짱’을 부르며 마치 대화하는 듯한 혼잣말을 한다. 한밤중에 잠에서 깬 요시미는 갑작스레 없어진 딸을 찾아 아파트 안을 헤맨다. 인기척을 뒤쫓아 올라온 옥상. 물탱크 근처에 분명 누군가 있음을 느껴 직접 사다리를 타고 올라가 확인하려는 순간, 도리어 엄마를 찾고 있던 이쿠코가 아래에서 그녀를 부른다. 다음날 아침 관리인에게 듣는, 이 아파트에 숨겨진 흉흉한 이야기. 2년 전에 일어난 여아 실종사건. 끝내 딸을 찾지 못한 가족이 포기하고 떠나버렸고, 사라진 아이의 이름은 미츠코. 바로 밋짱이었다. 요시미의 직감은 곧바로 건물 옥상의 “살색” 물탱크를 향한다.

요시미는 자신이 추리한 결론을 확신하자 구토를 쏟아낸 끝에 딸을 데리고 당장 아파트를 떠난다. 지극히 현실적인 선택과 결말. 모든 것은 사실 주인공의 불안 심리가 만든 망상이고 결국 오해일지도 모르지만, 소설은 굳이 그 실상을 낱낱이 해명할 필요가 없다. 이면의 진실을 은근히 내버려두는 쪽이 훨씬 문학적인 기교다. 소설은 독자에게 충분히 자유를 주어도 된다. 그러면 독자는 자신에게 필요한 진실을 소설로부터 스스로 길어올릴 것이다. 원작은 이 정도의 지점에서 멈춘 반면, 소설을 영화화한 나카타 히데오의 <검은 물 밑에서>(2002)의 결말은 좀더, 아니 더 많이 나아간다. 주인공에게 불안과 공포를 주는 존재와 사건의 원인과 그 속에 담긴 어떤 정념의 이유를 밝히는 것만으로는 장르영화로서 충분한 해결이 안 된다고 본 거다. 도망만 쳐서는 영화의 결말이 될 수 없다. 영화는 관객의 자유를 최대한 빼앗아야 한다.

그래서 영화의 밋짱은 분명하게 ‘귀신’으로 나온다. 밋짱은 자신을 또다시 방치하여 잃어버리지 않을, 영원히 안전하게 돌봐 줄 보호자를 원한다. 엄마가 필요한 원혼은 적절한 대상이 나타나길 기다렸고, 딸을 끔찍이도 아끼고 사랑하는 요시미를 선택했다. 영화의 요시미(구로키 히토미)는 딸을 데리고 쉽게 도망칠 수 없다. 밋짱이 요시미의 딸이 되기 위해 방해가 되는 이쿠코를 치워버리려 하기 때문이다. 영화의 요시미는 이쿠코를 지키기 위해서 굿을 하거나 퇴마사를 부르거나 아파트를 무너뜨리든 간에 소설보다는 훨씬 격렬한 일을 해야 한다. 그리하여 결말에서 요시미가 선택한 행동은 놀라운 것이었다. 요시미는 자신의 딸을 지키기 위해, 기꺼이 귀신의 엄마가 되는 것을 택한다. 죽은 아이의 엄마가 되어 살아 있는 자기 딸을 버린다. 이 지점에서 영화는 원작을 넘어 훨씬 무서운 세계로 넘어갔다고 느꼈다. 그건 모성의 아름다운 희생이라 말하고 쉽게 넘겨버릴 만한 성질이 아닌 의미로 여겨졌다.

공포는 언제나 집과 함께한다. 모든 공포물의 원조는 하우스 호러다. 누군가가 살았던 건축물마다 지난 사연이 스며 있고 그 흔적이 남아 있다. 내 집 없이 몇년마다 반복하는 고달픈 이사의 삶을 살아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앞으로 살 새로운 남의 집에 들어섰을 때의 어떤 기운, 이질감, 다른 공기를 경험한다. 요시미처럼 예민한 사람에게 그러한 흔적은 때론 섬뜩한 것이다. 나카타 히데오는 영화에서 그것을 습기로 표현했다. 천장에서 물이 뚝뚝 새고, 벽에 시커먼 곰팡이가 증식한다. 아파트나 연립 같은 다세대 공동주택은 타자에 대한 공포까지 더하는 공간이다. 분명한 공동체, 그러나 소통은 없다. 나는 <궁금한 이야기 Y> 같은 유의 일상 르포적인 TV프로그램을 즐겨 보는데, 대한민국의 집집마다에는 마음의 병을 앓는 사람들이 너무도 많다. 제보를 하는 이들은 타인에 의한 공포와 고통을 호소한다. 멀리 갈 필요도 없다. 내 방에서도 옆집 노인의 끙끙 앓는 소리가 들린다.

<다크 워터>

원작 소설에서 먼저 전제하는 것은 문제의 아파트가 ‘매립지’ 위에 지어졌다는 설정이다. 한 장소와 그 공간에 이미 존재하는 역사. 세계는 사실 거대한 묘지다. 우리는 시체 위에 건축되어진 문명에 산다. 그 아래 아무도 모르게 사라져버린 개인의 역사가 묻혀 있다. 월터 살레스의 리메이크 <다크 워터>(2005)는 일본판보다 좀더 원작의 의도에 부합한 실제적인 공간을 제시한다. 미국의 요시미, 달리아(제니퍼 코넬리)는 딸 새시를 데리고 뉴욕 맨해튼과 퀸스 사이 이스트강 한가운데에 위치한 루스벨트 아일랜드로 이사한다. 도심에서 트램(케이블카)을 타고 들어가야 하는 섬에 위치한, 거대하지만 낡은 아파트. 전남편과 양육권 소송 중인 이혼녀에게는 도심과 가깝지만 상대적으로 싼 집세가 선택의 가장 중요한 이유였다. 이들 모녀가 만나는 미국의 밋짱은 러시아계 소녀 나타샤다. 월터 살레스는 영화에 일본 원작에는 없었던 의미심장한 터치를 더한다. 달리아에게 어렸을 적 친모에게 학대, 방치당한 경험이 있는 것으로 전사를 추가하고, 회상 속 어린 달리아와 나타샤를 동일한 아역으로 캐스팅한 것이다. 그러자 결말의 선택은 나카다의 영화와는 또 다른 느낌이 되었다. 딸을 위한 희생은 자신을 향한 구원의 의미까지 가진다. 여운은 묘하게 남는다. 버려진 아이들의 슬픈 역사는 반복된다. 하우스를 넘어 아파트 호러의 전통은 우리 영화에도 있다. 윤종찬의 <소름>(2001)으로부터 시작되었고, 여전히 이 작품이 정점이라고 생각한다. 한국의 아파트 호러는 버려진 아이들이 정념의 주체가 아니다. 아이를 잃은 부모의 고통스런 죄의식의 세계다. 한국의 부모들에겐 내 아이한테 일어날지도 모르는 일들에 대한 공포가 가장 최악의 공포다. 그런데 현실에선 학대, 방치당하는 아이들의 사건도 끊이지 않는다. 내 새끼를 부모의 소유물로 여기기에 편애와 학대가 발생한다.

네트워크로 모두 완벽하게 연결되어 있지만 각자는 철저하게 단절된 이 세계에서, 한 건물 안에 함께 살지만 홀로 외로운 사람들이 있다. 우리는 그들이 자신의 망상과 편견 안에 갇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모른다. 얼마 전 인천의 어느 아파트 단지에서 고교를 중퇴한 소녀가 같은 동네에 사는 초등학생 여자아이를 유괴하여 살인한 사건이 있었다. 이후에 밝혀진 사건 내부의 과정은 영화적 상상 따위 아무런 의미도 없게 만드는 잔혹한 현실이었다. 소녀는 살해한 아이를 아파트 옥상 물탱크에 유기하고, 사체의 일부를 종이봉투에 담아 시내를 돌아다니다 또 다른 소녀에게 전해주었다. 이 모든 일이 일어나는 동안 주변의 어른들은 무엇을 했나? 악명 높은 미국의 연쇄살인마 제프리 다머와 함께 학창 시절을 보낸 만화가 더프 백더프의 걸작 그래픽 노블 <내 친구 다머>에서, 작가는 미국 중산층의 황폐한 정서와 이기주의와 무관심을 지적한다. 그는 악마를 피해자로 만들거나 연민하지 않는다. 대신 그 악마를 방치하고 키워낸 세상을 향해 비명을 지른다. 한 외톨이가 자신의 삶을 생지옥으로 만들기로 결심하는 동안, 대체 “빌어먹을 어른들은 그때 다 어디에 있었던 걸까?”라고.

봄이 먼지바람에 휘날려 정신없이 지나고 있다. 지도자 한명이 바뀐다고 해서 세상이 쉽게 변하지 않는다. 집단이 혐오하고 개인이 고립되는 이 도시에 가득한 미세먼지는 폐에 차곡히 쌓여 답답한 가슴으로부터 공포를 토해내게 만든다. 공기 속에 뭔가 떠다니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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