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독 이창동 / 출연 설경구, 문소리, 김여진 / 제작연도 1999년
나는 ‘박사모’였다. 웬 뜬금없는 커밍아웃(?)이냐고? 나도 사실 잊고 있었다. 나의 정체성을 혹은 나의 시작을. 나는 박사모, 영화 ‘<박하사탕>을 사랑하는 사람들의 모임’의 회원이었다. 17년이나 거슬러 올라가는 이야기다.
Chapter#1 포토25, 1999년 봄. 나는 당시 대전 시내 한복판에서 스티커 사진 가게를 1년째 운영하고 있었다. 휴일도 없이 오후 2시에 출근해 새벽 2시까지 코 묻은 현금을 긁어모았다. 그 재미에 빠져 살면서도, 영화 잡지 <키노>를 읽고 DVD방을 드나들었다. 유일한 낙이었다. 그때 <키노>에서 <박하사탕> 현장 취재기사를 봤던 것 같다. <초록물고기>의 팬이었던 나는 <박하사탕>이 완성되기를 기다렸다.
Chapter#2 부산국제영화제, 1999년 10월 14일. 오직 부산국제영화제의 개막작 <박하사탕>을 보기 위해서 남포동의 한 허름한 모텔에 짐을 풀고, 수영만 야외상영장에 갔다. 선착순 입장 줄에 꽤 오래 서 있었는데, 저기서 이창동 감독이 걸어오고 있었다. 아무도 못 알아봤지만 나는 단박에 알아봤다. “안녕하세요. <박하사탕> 보려고 대전에서 왔습니다. 저 사인 좀….” 야외에서 영화를 본 것도, 영화감독을 실제 본 것도, 영화에서 광주를 본 것도 처음이었다. “이거 드실래요? 박하사탕 좋아하세요?” 순임이 영호에게 건넨 박하사탕이 내게도 건네졌다.
Chapter#3 <박하사탕>을 사랑하는 사람들의 모임, 2000년 3월. <박하사탕>이 2000년 1월 1일 개봉했지만 흥행이 저조하자 영화를 두번 보자는 관객운동이 시작됐다. 그렇게 ‘<박하사탕>을 사랑하는 사람들의 모임’이 만들어졌다. 3월쯤의 오프라인 모임을 통해 나도 박사모가 되었다. 별건 없었다. <박하사탕>을 극장에서 보고 또 봤고, 박하사탕 공장에도 놀러 갔다. 만나면 회원들끼리 대사 외우기 배틀을 했다. 그리고 매년 12월 31일, 극장을 빌려 함께 <박하사탕>을 봤다.
Chapter#4 노무현 대통령, 2003년 3월. 2002년 12월 대선이 끝난 후 <박하사탕>의 제작자인 이스트필름 명계남 대표에게 함께 일하자는 전화가 왔다. <박하사탕>이 만들어준 인연. 그렇게 나는 영화 일을 시작했다. 3월, 대학로의 한 극장에서 배우 명계남이 출연한 연극 <늘근도둑이야기>를 보러온 고 노무현 전 대통령을 먼발치에서 뵈었다. 그게 당신을 본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Chapter#5 노무현입니다, 2017년 5월. 나는 ‘살면서 만나보고 싶은 사람은 언젠가는 반드시 만나게 된다’는 이상한 믿음을 갖고 있다. 일도 마찬가지. 만날 영화는 거짓말처럼 꼭 만나게 되더라. <노무현입니다>가 바로 그렇다. 내게 영화홍보를 제안한 분은 명계남 대표랑 어떤 관계인지 전혀 몰랐다. 그러니 그저 인연이 아니면 무엇으로 설명을 하겠는가.
<박하사탕>은 내가 가장 사랑하는 영화는 아니다. 가장 좋아하는 영화도 아니다. 생각하면 너무 아픈 영화를 사랑하지는 못하겠다. 20대 시절엔 <박하사탕>이 사무치게 아픈 영화라는 걸 잘 몰랐다. 그래서 그때는 가장 사랑하는 영화라고도 떠들었지만, 이제는 그럴 수 없다. 영화 속 40살 김영호의 나이를 훌쩍 넘은 지금, ‘나 다시 돌아갈래’라는 삶의 회한과 ‘삶은 아름답다’라는 말이 얼마나 찬란한 슬픔이 스민 말인지 조금 알게 되었기 때문이리라. 내 인생의 영화, 원고를 청탁받고 영화 일을 해온 지난 15년의 시간을 돌아봤다. 그리고 비로소 명확해졌다. <박하사탕>은 ‘내 인생의 영화’가 맞다. 지금 내가 이 자리에 있게 된 이유이고, 시작이기 때문이다.
조계영 영화홍보사 필앤플랜(Feel&Plan) 대표. <뚜르: 내 생애 최고의 49일> 등에 이어 <네루다>와 <노무현입니다>의 홍보, 마케팅을 진행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