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각지를 돌며 의술을 행하던 준영은 정작 딸아이의 생일에 아이를 잃고 만다. 자신의 눈앞에서 죽어가는 딸을 구하지 못한 것이다. 더 끔찍한 건, 준영이 계속해서 딸의 죽음을 목격하기 2시간 전으로 되돌아가서 다시금 딸의 죽음을 목격한다는 데 있다. 악몽 그 이상의 비극적 하루에 갇혀버렸다. <하루>에서 김명민은 이 지옥의 상황을 반복하는 준영을 연기한다. 이러한 서사구조의 특성상 김명민은 같은 장면에서 조금씩 계속해서 달라지는 준영의 심리 상태를 섬세하게 연기해야 했다. 보통 일은 아니었을 것이다.
-<특별수사: 사형수의 편지>(2015)로 만났을 때도 도전할 만한 작품에 눈이 간다며 차기작 <하루>의 준비에 대해 말한 바 있다.
=시나리오를 참 재밌게 읽었다. 앞뒤가 딱딱 맞아떨어지고 메시지도 분명하면서 가슴 뭉클해지는 부분도 있었다. 해보고 싶어졌다. 근데 딸아이의 사고가 일어나기 2시간 전으로 계속해서 돌아가고, 또 돌아가는 이야기 구조를 대체 어떻게 찍어야 하나 막막하더라. 촬영 기간은 정해져 있는데 순차 촬영은 도통 어려울 것이고. 적어도 일곱 차례 이상은 한 장소에서 찍어야 했다. 답이 없더라.
-그런 면에서 배우로서 철저한 사전 계산과 준비가 더없이 중요했겠다.
=적어도 편집감독님이 촬영된 배우의 연기를 봤을 때 ‘이게 몇 번째로 되돌아간 상황이지?’라며 혼란스러워하지 않게끔 하고 싶었다. 상황이 비슷하다고 똑같은 연기를 해버리면 배우로서는 실패다. 콘티에 되돌아간 지점마다 빨간 펜으로 큼직하게 나 나름대로 부제를 달았다. 준영의 ‘혼돈, 스피드, 절박, 포기, 회생….’ 촬영 순서는 뒤섞여도 준영이 느낄 법한 가장 큰 감정이 뭔지를 잊지 않고 찍으려 했다. 그렇게 하루 종일 찍고 있으면 촬영장의 하루마저 돌고 있는 게 아닐까 싶어진다. (웃음)
-이번에도 직업이 의사다. 딸아이를 만나러 가는 과정에서 타인의 교통사고를 목격한 준영이 의사로서 도움을 주다 딸아이의 죽음을 막지 못하는 순간도 있다.
=아무래도 내가 여러 번 의사 역을 해봤으니 준영이 의료 행위를 할 때 불안해 보이진 않을 것이다. (웃음) 하지만 준영의 오지랖은 이해하기 힘들다. 자신말고도 주변에 의료진이 있는데 굳이…. 아버지로서는 참 답답한 사람이다. 하지만 준영이 그런 사람인 걸 어쩌나. 배우는 당위성을 부여하고 분석해 연기를 해내야 한다.
-준영도 그런 자신이 원망스럽다는 듯 딸의 죽음을 처음으로 직접 목격했을 때 넋이 나간 듯 자기 뺨을 무지막지하게 때린다.
=실제로 내가 누군가에게 민폐를 끼치는 걸 너무도 싫어한다. 단역 때 촬영장에 꼭 들고가야 하는 소품을 미리 준비해두지 않은 적이 있는데 스스로에게 어찌나 화가 나던지. 그때 날 주먹으로 때린 적이 있다. 자신에게 관대해지는 게 싫다. 지금까지 내가 연기해올 수 있었던 힘 같다. 그 장면은 촬영 당일 아침까지도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더라. 분명 딸아이 사고 2시간 전으로 계속 돌아가고 있었는데 준영은 그때마다 오지랖을 부리니. 그런 상황들이, 준영 스스로도 자신이 싫어지지 않았을까 싶었다. 내 마음이 반영됐던 것 같다.
-연기를 하지 않으면 몸이 아프다고 할 만큼 일에 몰두해왔다. <하루>에 이어 <V.I.P.>(감독 박훈정)가 개봉예정이고 <물괴>(감독 허종호)는 촬영 중이다.
=대학 연극과에서 처음 배운 게, 배우는 디오니소스의 신에게 제사를 지내는 사람이라는 거다. 신과 소통하는 일종의 무당처럼 배우는 배역에 빙의돼야 한다. 무당이 굿을 안 하면 몸이 아프듯 배우도 그렇다. <V.I.P.>에서는 욕과 담배를 달고 사는 형사를, <물괴>에서는 나라를 어지럽히는 흉악한 짐승의 실체를 밝히는 인물을 맡았다. <배트맨> 시리즈의 고담시처럼 음산한 분위기의 크리처물 사극이다. 그러고나면 <조선명탐정3>를 찍게 되지 않을까. 소처럼 일하려 한다. (웃음) 창조적으로 더 해내고 싶은 게 많다. 아직 내 가슴이 뜨겁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