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상수 감독의 21번째 장편영화 <그 후>는 바람을 피운 출판사 사장 봉완(권해효)이 이를 눈치챈 아내(조윤희)와 내연녀 창숙(김새벽) 사이에서 겪는 진퇴양난을 그린다. 그런데 정작 봉완의 아내로부터 오해를 사서 맞고, 봉완에게 회유당하고, 창숙의 곱지 않은 시선을 견디는 건 그날 막 출근한 아름(김민희)이다. 비록 봉변을 당하지만 아름은 영화 속 여타의 인물과 달리 자신에게 당당하고, (하나님을 향한 믿음에서 비롯한) 확고한 믿음을 가지고 있으며, 봉완의 가식을 꾸짖을 줄 아는 여성이자 관찰자다.
나쓰메 소세키의 소설 <그 후>에서 제목을 빌려온 영화는 아름과 만나면서 봉완의 민낯이 드러나는 하루 동안의 코믹한 해프닝 사이로, 봉완을 사로잡고 있는 창숙과의 만남이라는 과거, 그리고 이 소동과 관계가 끝난 후의 어느 하루의 시제가 뒤섞이는 영화다. 흑백의 카메라는 그 어느 때보다 인물들 가까이 클로즈업되며, 그렇게 붙어선 카메라 사이로 공간을 꽉 채우는 것은 믿음이라는 문제를 둘러싼 쉬지 않는 말들의 흐름이다. <그 후>에 관해 홍상수 감독과 나눈 서면 인터뷰를 전한다.
-영화의 출발에 대해 설명을 부탁합니다.
=권해효씨를 주인공으로 써야겠다고 생각한 게 시작인 거 같습니다. 제가 주관적으로 파악하는 그분의 어떤 부분이 그 당시의 저의 어떤 감정이랄까, 마음의 상태와 부닥치면 뭔가 나올 수 있겠다고 막연하게 생각했습니다. 사회적으로 건강하게 생활하고, 오래 사용해서 매끄럽게 작동하는 마음의 틀이 있고, 그것이 몸으로 표현되고 있고, 거기에 제가 가지고 올 어떤 강하고 새로운 감정적 상태가 섞이면 중간쯤 어디서 만나게 될 거라 생각했습니다. 그다음은 영화에 나온 그 출판사의 사장님을 찾아가 이것저것 물어보는걸 했는데, 대화 중 사장님이 자신은 해 뜨기 전 어두울 때 집에서 나와 출근한다는 얘기를 했습니다. 제가 그 행로- 집에서부터 회사까지- 를 동행해도 되겠냐고 물었고, 그러라고 하셨습니다. 그렇게 따라가보았는데, 뭔가가 떠올랐습니다. 그것도 시작입니다.
-출판사 사장 봉완의 이야기가 중심이 되는데요. 그는 평론가나 선생님, 대표라는 이름을 거부하고, 그냥 ‘사장’이라는 다분히 구체적인 자본가 직함으로 불리길 원하는 인물인데요.
=봉완 역에 권해효씨로 정하면서 전에 가보았고, 그때 영화의 배경으로도 가능할 거라 한번 생각해봤던 그 출판사가 떠올랐습니다. 문학을 하는 인물이다보니 자신의 사고 내용에 대한 타인에 의한 검증 같은 건 이미 많이 거쳤을 테니깐 그런 자신감을 배경으로 놓고 보면 사장이란 직함이 오히려 소박하고 구체적이고 현실적인 직함처럼 들려 좋았을 겁니다.
-출판사라는 배경이 영화의 구성에도 영향을 미쳤다는 생각이 드는데요. 봉완과 아름, 봉완과 창숙 등으로 인물을 바꾸며 끊임없이 책장을 넘기는 듯한 느낌을 줍니다. (흑백 화면 역시 책을 보는 듯한 인상에 가깝다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과거와 현재의 시제 변화를 둔 건 어떤 의미인가요.
=일어난 시점은 과거지만 그게 지금에 영향을 끼치고, “소화되지 않았고”, 계속 기억되는 것이라면 현재 시점의 인물의 의식과 감정에 그 과거와 지금의 행위들이 같은 실체적 힘으로 존재합니다. 그걸 그대로 표현한 겁니다.
-<그 후>라는 제목은 어떤 순간 결정하고 짓게 되었나요? 가령 <지금은맞고그때는틀리다>(2015)라는 제목에는 시간에 따른 어떤 ‘판단’이 들어가 있다면 ‘그 후’는 그냥 시간을 흘려보내고 지켜보기로 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기도 하는데요.
=마지막 촬영날이었고, 아침 대본을 쓸 때 봉완이 아름에게 책을 건네주는 게 생각났고, 소세키의 <마음>이란 책이 떠올랐습니다. 그래서 대본에는 <마음>이라고 썼고, 그 책이 그 출판사에 혹시 있을까, 라고 생각하고 갔는데, <마음>은 없었고, 출판사 사장님이 <그 후>를 꺼내들고 나오셨습니다. 책을 건네받으면서 제목을 얻었구나 생각했습니다. 사람들이 ‘그 후’를 잡는다면, 그건 어떤 결론을 내리고 싶어서겠지만, ‘그 후의 그날’은 쳐다볼수록 복잡해지고, 더 견디고 쳐다보면 결국은 ‘모든 것’이 담겨진 ‘그날’이 됩니다.
-뻔뻔한 봉완은 자신이 가장 좋아하는 책으로 <그 후>를 꼽으며, 아름에게 부득불 그 책을 안겨주는데요. 나쓰메 소세키의 <그 후>를 제목으로, 또 영화의 주요한 소품으로 사용한 이유는 무엇이었나요.
=나쓰메 소세키의 책들을 다 좋아합니다. <그 후>를 전에 앞 부분만 조금 읽은 거 같은데, 읽을 당시 감당이 안 돼 후다닥 멈췄던 기억이 납니다. 그땐 계속 읽으면 어두운 맘에 사로잡힐 거 같았습니다.
-<오! 수정>(2000), <북촌방향>(2011)에 이은 세 번째 흑백영화입니다. 흑백 화면을 선택한 이유는 무엇인가요? <북촌방향>에서의 흑백이 시간의 모호함을 부각시켜주었던 것이 떠오릅니다. 봉완의 현재와 봉완이 기억하는 창숙과의 과거, 그리고 시간이 지난 후 아름이 찾아오는 다양한 시제가 흑백 화면으로 인해 아스라해지는 효과가 더해진다는 생각도 드는데요.
=그냥 흑백이 어떨까, 란 생각이 촬영 직전에 들었습니다. 그 출판사 사장님과 새벽에 출근길을 동행할 때 영화가 좀 어두운 면을 갖게 될 거 같다는 막연한 생각도 들었고요. 흑백을 좋아하면서도 조심스러워하는 생각도 있습니다. 그래도 촬영 시작 때까지 그 생각이 유지된 겁니다. 그런 느낌을 받았다면 흑백의 덕일 수 있겠네요.
-주로 인물이 어떤 지역을 여행하는 것과 달리 <당신자신과 당신의 것>(2016)에서부터 배경 활용에 변화가 왔다는 생각이 드는데요. 그 작품이 연남동이라는 공간을 드러냈다면, <그 후>는 그런 지역의 설정도 빠져 있습니다. 이렇게 지역을 배제하고 인물들의 대화에만 집중한 이유는 무엇입니까.
=같은 공간이 다른 시간대를 담게 되니깐 조망의 느낌은 적어지고 통시적인 느낌이 강해지다보니 그렇게 느끼실 수 있겠네요. 만들 때 먼저 이유가 있어서가 아니라, 그냥 그렇게 떠오르는 겁니다, 저의 경우엔.
-공간을 배제하는 대신 이 영화에서 시선을 사로잡고, 신경을 쓰게 만드는 것은 시간입니다. 봉완은 아름과의 현재, 창숙과의 과거, 그리고 아름과의 미래를 오가게 됩니다. 전작의 인물들이 다른 지역으로 여행을 했다면, 이번엔 일종의 시간여행을 하고 있다는 생각이 드는데요.
=그런데 모든 여행은 시공간의 여행입니다. 공간의 여행도, 시간의 여행도 따로 있지 않습니다. 아침에 집에서 회사로 출근하는 것도 시공간의 여행입니다. 쳐다보면 볼수록 다 여행이고, 모든 여행 안에 언제나 ‘모든 것들’이 담겨져 있습니다.
-믿음에 대한 진지한 물음이 종교적인 믿음까지 연결됩니다. 그런데 하루 동안의 ‘오해’라는 사건을 끌어들임으로써 이 문제를 가볍고 코믹한 톤 속에 배치시키는데요.
=그런 대화가 오고 간 것은 저에게도 좀 새로운 것이었습니다. 믿음이란 것이 이성적인 검증을 거쳐야 한다고 생각하는 게 있고, 어쨌거나 믿음 없인 인생에서 해결이 안 되는 게 있다는 두 가지 생각이 충돌하는 겁니다. 하여간 아침에 그런 대화가 떠올랐고, 그렇게 썼습니다. 톤은 다른 톤들이 서로 섞이면서 진행되는거 같습니다.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을 통해 믿음에 관한 문제를 언급하고 있는데요. 특히 창숙이 ‘저를 못 봤으니까’, ‘그 여자 (출판사에) 안 나오니까’ 등의 이유를 들며 아름을 내연녀로 모의하는 장면이 인상적이었습니다.
=눈앞에 보고 있어도 보이지 않는 게 진실입니다. 그 진실이란 것을 그 끝까지 추구하는 건 불가능합니다. 진실 추구의 전제가 되는 가치들을 쳐다보면 그것들이 그렇게 포괄적이지도 절대적이지도 않다는 것을 보게 됩니다. 보는 것만 갖고는 충분하지 않고 느껴야하는데, 그게 가능하다면 다른 생각이 저절로 들게 됩니다.
-아내는 의심과 추궁을 하다가도 어떤 액션을 취하지 못하다가, 내연녀를 향한 사랑의 연서라는 실체를 찾고서야 불륜이 실재하고 있다는 걸 확신합니다. 그런데 그녀가 실체라고 믿는 것 역시, 진짜 내연녀를 찾는 데는 역부족일 뿐입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그 작은 ‘증거’를 찾는 데만 급급합니다. 그리고 믿음이라는 것이 너무 쉽게 작동하고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게 만드는데요.
=‘결정적 증거’는 있을 수 없습니다. 진실 추구의 질문 자체가 힘이 빠져야 되고, 그 사이에는 버둥대면서 ‘부족한 증거’로 버티는 겁니다. 만약 절대적 믿음을 원한다면, 그런 믿음이 가능한 대상하고 상대해야 합니다.
-지질한 남자들이 투명한 마음을 가진 아름으로 인해 단죄를 받는 장면이 통쾌하면서도 코믹한데요. <지금은맞고그때는틀리다>의 희정, <밤의 해변에서 혼자>(2016)의 영희, <그 후>의 아름은 솔직하게 믿음에 관한 의견을 드러내는 캐릭터입니다. 배우 김민희의 연기에서 오는 솔직하고 직설적인 표현이 캐릭터에 십분 반영된 결과일 텐데요.
=김민희란 사람에게서 느끼는 그 모든 것들 중 일부가 혹은 하나의 결이 영화적으로 수용되고, 그 과정에서 다른 요소들과 섞이고, 그렇게 결과물이 나옵니다. 그런 결과물이 그 사람 혹은 그 사람의 어떤 부분에 대한 저의 최선의 표현이라고 믿고 있습니다.
-아름은 아름다움에서 출발한 이름이라고 언급됩니다. 그래서 매 순간 아름다움이란 단어가 그녀를 떠나지 않습니다. 특히 눈 내리는 밤, 택시 안의 어둠과 눈이 내리는 밤의 불빛에 노출된 김민희의 얼굴은 불가해할 정도로 아름답습니다. 이 장면의 아름다움을 보면서 <지금은맞고그때는틀리다>의 마지막 장면이 떠올랐습니다. 촬영은 어떻게 이루어졌는지요.
=그 촬영을 하기 전날, 그날 분의 촬영을 끝내고 출판사에서 간식을 먹으면서 다음날 촬영에 아름이 타고 갈 교통 수단을 결정해야 했습니다. 전동차가 배제되면서 택시로 결정했습니다. 그때 누군가가 예보를 보고 다음날 눈이 올 수도 있다고 했습니다. 다음날 아침에 눈이 오는 걸로 일단 썼습니다. 촬영에 들어갔고, 그 신을 찍기 바로 직전에 눈이 조금씩 오기 시작했고, 택시가 움직이기 시작할 때 눈이 갑자기 많이 내리기 시작했습니다. 우리 모두 많이 좋아했습니다, 날씨운이 좋다고 했습니다.
-봉완의 아내 역을 연기한 조윤희씨는 실제 권해효 배우의 아내이기도 합니다. 두 역할의 케미스트리에도 영향을 미쳤을 거라 생각하는데요.
=예, 권해효씨의 아내가 배우인 것을 알고 한번 만나뵙고 싶었고, 테스트 촬영날 처음 뵈었습니다. 선이 정확하고 굵은 배우라고 생각합니다. 힘도 좋으시고요. 결국 영화에 큰 역할을 해주셨습니다. 특히 영화 첫신에서 두 사람이 한 연기를 참 좋아합니다, 아마 두 사람이 실제 부부란 것이 도움이 됐을 거라 생각합니다.
-김새벽 배우와는 첫 작업이기도 한데요. 배우의 어떤 면이 창숙 역할에 어울린다고 보셨나요. 당돌하거나 의뭉스러운 모습, 짜증 섞인 모습 등 다양한 표현을 통해 이 배우가 굉장히 새롭게 다가오는 계기가 되었지 싶습니다.
=출연한 작품은 본 적이 없었고, 사무실에서 처음 봤을 때 ‘자신을 지키고 싶어 노력하는 사람’이란 인상을 받았습니다. 촬영하면서 배우로서 튼튼한 사람이란 생각이 들었고, 믿음이 가는 배우로 끝까지 열심히 해주었습니다. 영화에 큰 역할을 해주었습니다.
-앞서 개봉한 프랑스에서 1주 만에 2만5천명의 관객이 들어 흥행에 성공하고, 호평을 얻고 있는데요. 반면 한국에서는 영화 외적인 부분들이 더 부각되기도 하여 연출자이자 제작자로서도 겪는 고충이 있을 것 같은데요.
=하나의 영화와 그 영화를 만든 사람을 연결해보는 것이 그 영화를 보는 데 도움이 되는지에 대해 제 경험으로는 부정적입니다. 사람도 영화도 이미 쉬운 게 아니고, 거기다 그 둘의 연결점을 창조적으로 발견하는 것, 그래서 그냥 둘을 각자로 놔두는 것보다 나은 어떤 시각을 얻는다는 것은 너무 어려운 일처럼 보입니다.
-김민희, 권해효씨와의 작업을 비롯해 차기작에 대한 계획부탁드립니다.
=두분 다 계속 같이 할 거라고 생각합니다. 뭘 만들지는 그때 가서 알게 될 겁니다. 지금은 개봉시기이고, 좀 쉬고 싶고, 좀 쉬었다 선선해지면 뭔가 찍고 싶은 생각이 들 거라 생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