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서(카페) 좀 찍어보고, 우리 집에 가서 또 찍어보고… 인터뷰 전문에 쓰면 안 돼. 배우들은 그런 거에 예민하면 기사가 되는데 나는 뭐 배우도 아니고.” 누가 <씨네21> 전 편집장 아니랄까봐, 조선희 작가는 “원판 불변의 법칙이라고 생긴 것과 다르게 해달라 요구해서는 안 되지만 생긴 것보다 못 나오면 안 되니까”라며 사진 촬영을 꼼꼼히 챙긴다. <씨네21> 편집장(1995~2000), 한국영상자료원 원장(2006~2009), 서울문화재단 대표(2012~16)를 차례로 역임한 조 작가의 신작 소설 <세 여자>(한겨레출판사 펴냄)는 한장의 사진에서 출발한다. 주세죽, 허정숙, 고명자 등 다소 낯선 이름의 세 여성 혁명가들이 개울에 발을 담근 채 활짝 웃는 사진이다. 혼돈의 용광로 같았던 식민지 조선에서 상해로, 소련으로, 남경으로 나가 공산주의 혁명과 민족 해방에 투신했던 이들이다. <세 여자>는 세 여자를 통해 1920년대부터 1950년대까지 조선 공산주의 혁명사를 역동적이고 뜨겁게 그린 이야기다. 강산이 한번 바뀐 지난 12년 동안, 조선희 작가의 머리카락이 희끗희끗해진 만큼 <세 여자>는 뽀얀 사골 국물처럼 담백하게 우러났다.
-책의 반응이 좋다.
=나는 이 소설을 오래 썼을 뿐 아니라 굉장히 잘 썼다고 생각한다. 2003년쯤 한 사주역학자를 만났다. 그가 소설을 쓰면 안 된다고 그랬다, 내 팔자가. 청천벽력 같은 얘기였다. 첫 장편소설 <열정과 불안>(2002)이 흥행에서도, 작품성에서도 완벽하게 실패했지만 미련이 남아 의욕을 불태울 때였으니까.
-그 역학자가 누군가.
=나보다 몇살 젊은데 올해 초 아깝게 세상을 떠났다. 당시 그 말을 듣고 극도로 분노해 (사주를) 두번 보자고 그랬다. <세 여자>를 준비하다가 한국영상자료원(이하 영상자료원) 원장으로 가게 됐는데 어느 순간 그때 생각이 나더라. 그 사람이 한 말 때문에 주눅이 들어 소설을 써도 안 될 거라고 생각하고 있었던 거다. 그런데 출간한 지 2주가 지난 지금까지는 반응이 좋다. 2주 만에 재판을 찍었으니까. 이 소설이 잘 팔린다면 그 역학자에게 당장 쳐들어가서 ‘이 봐라, 당신 점괘가 틀렸다’고 얘기하겠는데 안타깝게도 세상을 떠난 거다.
-<세 여자>는 허정숙에서 출발했다고.
=1990년대부터 좌파 연구가 활발해지기 시작했다. 좌파쪽 신여성들에 대한 논문이나 연구도 나왔는데 그런 걸 봤다. 냉전시대에 걸쳐 있는 우리 세대는 신여성은 나혜석뿐인 줄 알았는데 허정숙을 알게 됐을 때 이런 여자가 있었구나 싶어 굉장히 놀랐다. 결혼을 다섯번 했다든지, 성이 다른 세 아이를 낳았다든지, 해방 후 평양에서 요직에 있으며 오래오래 살았다는 얘기들이었다. 말로가 비참했던 나혜석과 달리 허정숙은 끝까지 잘 살았고, 그래서 신기했다. 자료들을 읽다 보니 허정숙 말고도 그 주변에 흥미진진한 인물들이 많았다. 그들 주변에 또 남자들이 있었고, 역사의 격랑을 타고 넘으며 여러 인생이 얽히고설키고 꼬이더라. 그때는 그들에 대한 정보가 별로 없었기 때문에 모든 게 흥미진진했다.
-책 표지에 쓴 허정숙, 주세죽, 고명자 세 여자가 함께 찍은 사진을 본 것도 그때쯤인가.
=표지의 사진은 자료를 찾다가 보게 되었는데 이 소설의 틀을 세 여자로 가게 된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 그 사진은 굉장히 인상적이었다. 암울했던 식민시대의 한가운데가 아닌가. 좌익 활동에 투신한 사람들인데 사진에서는 굉장히 밝고 구김살 없으며 순한 얼굴이란 말이야. ‘20세기의 봄’이라는 사진 제목이 그 아이러니에서 온 거다. 자료를 보면서 황당했던 건 그때 이후로 세 여자가 만나지 못했다는 사실이다. 그게 극적인 반전이지.
-소설을 준비하던 중 갑작스럽게 영상자료원 원장으로 선임되는 바람에 작업이 잠깐 중단됐다. 영상자료원 시절에는 여러 사업을 진행하느라 <세 여자>를 떠올릴 겨를이 없었겠다.
=영상자료원 시절도, 서울문화재단(이하 문화재단) 시절도 내게 빈 시간이 아니었다. 두 기관의 장을 맡는 동안 소설이 사과처럼 익어갔다, 내 안에서. 그전에는 역사 기록들이 빽빽하게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거기에 어떤 호흡이 들어가면서 공간들이 생겨난 거지.
-혹시 영상자료원이 발굴했던 해방 전후의 한국영화 중에서 소설을 쓰는 데 영향을 끼친 작품이 있나.
=<군용열차>(감독 서광제, 1938)와 <조선해협>(감독 박기채, 1943) 같은 그때 발굴한 식민시대의 한국영화들을 보면서 식민시대의 정체를 훨씬 더 깊이 이해하게 됐다. 그 영화들의 배경이 1930년대 말에서 1940년이니 친일 행위가 극성을 부릴 때였다. 친일 행위가 (일제의) 강압을 못 이겨 할 수 없이 하게 된 것이라고 피상적으로만 알고 있다가 그 영화들을 보면서 사회·심리적인 흐름이 있다는 걸 알게 됐다. 1920년대는 (독립에 대한) 희망이 있었다가 1930년대로 접어들면서 지식인들이 모두 감옥에 가서 바닥을 치고 난 다음, 반대로 솟아오른 거지. 다 친일하게 된 거다. 그렇게 하지 않고는 살 수 없으니까.
-영상자료원 임기를 마치고 작업을 재개하면서 소설을 처음 쓰기 시작했을 때와 뭐가 달라졌었나.
=2005년에 시작할 때는 빨리 써서 결과를 보자는 다급한 마음이 컸던 것 같다. 영상자료원 임기가 끝난 뒤 생각해보니 준비가 너무 안 되어 있었다. 그때부터 자료를 다시 보고 집필을 시작했다.
-하지만 문화재단 대표가 되면서 다시 작업이 중단됐는데.
=영상자료원을 나와서 문화재단에 들어가기 전까지 2년 반 동안 3천매를 썼다. 한 세번쯤 다시 썼다. 그때도 내려고 했다. 하지만 마무리하던 중에 문화재단에 급하게 가게 됐다. 재단을 그만두면 바로 내면 되려니 했는데 나중에 재단을 그만두고 원고 파일을 열어보니 심히 후졌다고 느껴지더라. 이대로는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게다가 문화재단에 있는 4년 반 동안 등장인물에 대한 시각이 달라졌다. 문화재단 다니는 동안 항상 머릿속에 세 여자가 맴돌고 있었거든. CF나 영화나 드라마를 보다가도 앗! 하면서 메모를 했다. 역사 공부는 소설을 쓸 만큼 끝낸 상태였지만 사람과 그의 행동, 그 동기에 대한 이해는 굉장히 부족했던 거다. 문화재단에서 4년 반을 지내면서 어느 순간 인물을 탁탁 이해하게 될 것 같았다.
-마치 노포에서 사골 국물을 계속 우려내는 과정과 비슷한 것 같다. (웃음)
=처음에는 한번 우려낸 것으로 상을 차리려고 했거든. 작업 기간 총 12년 중에서 8년 정도 보낸 다음에야 비로소 뽀얀 국물이 우러나듯 내 마음이 갖춰지는구나 느끼게 됐다. 초고를 쓸 때는 이게 워낙 방대한 시간과 공간을 다루기 때문에 세 여자 위주로 뜨개질을 겨우 해서 이야기를 짜맞췄다. 거기엔 사실 인물이랄게 없었지. 시간을 짜집기하는 것만으로도 엄청난 노력을 요구하는 일이었으니까.
-소설은 세 여자의 인생을 다루는 이야기이기도 하지만, 1920년대부터 1950년대까지 약 30년에 걸친 한국 공산주의 운동의 역사를 채워가는 역사물이기도 하다.
=요즘은 작가들이 TV드라마도 그렇고 소설조차도 어떤 역사적 인물을 자유자재로 각색해 역사 판타지를 만들어내지 않나. 내 목표는 실존 인물을 다루며 그 사람의 흥미롭고 재미난 이야기를 들려주는 게 아니다. 세 여자의 인생을 통해 현대사를 얘기하고 싶은 욕망이 강하다. 주어진 기록과 역사적 사실을 넘어서는 식의, 상상력의 오지랖을 부리지 않았다. 철저하게 역사적 전제 아래에서 이야기 사이사이에 디테일을 채우는 데서 상상력을 발휘했을 뿐이다.
-식민시대의 조선에서 권익이 보장되지 않은 여성으로서 꿈을 가지고 살아갔다는 점에서 세 여자의 인생이 대단해 보였다.
=어쩌면 요즘의 영페미(young feminist·젊은 페미니스트)들이 이 소설을 읽으면 짜증낼 수도 있다. 여성 혁명가라고 하는데 주세죽이나 고명자는 남자에게 휘둘린 인생으로 보일 수 있거든. 어떤 개인이든 자신이 살아가는 시대의 한계를 뛰어넘을 수는 없다. 당대의 여자들은 치마를 뒤집어쓰고 다니고, 머리카락도 함부로 못 자르는 데다가 남자를 동반하지 않으면 여행도 마음대로 못 다녔다. 제정러시아의 여성 혁명가들이 남성 혁명가들과 위장 결혼을 한 것도 유학을 떠나기 위한 목적이었다. 그런 시대였음을 감안하면 세 여자들이 자신의 인생을 선택하고 유학을 간 건, 사회의 통념이나 자신이 속한 그룹이나 가족을 상대로 한 어마어마한 투쟁의 결과라고 봐야 한다.
-1부에서 1930년대에 고명자를 포함한 당시 지식인들이 친일을 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 밀도 있게 묘사됐다.
=사실 허정숙이 조선을 떠나 중국으로 향하는 대목을 상세하게 묘사했다. 챕터 제목도 ‘나 간다고 서러워마라 나의 사랑 한반도야’라고 지었고. 아까 역사 기록이 없는 범위에서 상상력을 발휘하며 썼다고 말했는데, 유일하게 내가 아는 역사 기록을 바꾸면서 표현한 게 그 대목이다. 실제로 허정숙이 당시 중국 남경에 갈 때 배 타고 갔다. 만주가 일본 관동군에 점령돼 만주국이 된 까닭에 육로로 갈 수 없었으니까. 그런데 조국을 떠나는 장면을 배 타고 나가는 것으로 묘사하는 게 익숙하지 않았다. 그런데다가 열차가 압록강 철교를 지날 때 어떤 일본 여자가 여자아이한테 “여기(조선)까지가 일본이고, 이제부터는 만주란다”라고 말해주는 대목이 있다. 그건 어떤 잡지에 실제로 실린 에피소드다. 그 대사, 조선에서 못 살아 만주로 떠나는 유랑민과 허정숙과 일본 여자를 활용하고 싶어 배가 아닌 열차로 떠나는 설정으로 바꿨다.
-2부에서 혼돈에 휩싸여 좌우로 양분된 해방 후 한국 사회를 보면서 이분법적으로 세상을 재단했던 박근혜 정권의 한국 사회가 겹쳐졌다. 해방 후 풍경을 묘사할 때 현실에 대한 기시감도 염두에 뒀나.
=아, 그럼. 그래서 나는 2부에 더 애정이 있다. 사람들이 해방 후 공간과 한국전쟁 대목을 더 잘 읽어내길 바라는 마음이 있다. 지금 한국 사회의 어떤 프레임이라는 게 해방 공간과 한국전쟁에서 비롯된 것이거든. 우리는 강대국에 둘러싸인 약소국이었기 때문에 남북이 분단됐다고 배우지 않았나. 그렇게 생각하면 마음이 편하다, 우리는 책임이 없으니까. 원래는 미국과 소련 양국이 분할 점령을 한 뒤 정부가 만들어지면 빠지는 게 그들의 프로세스였는데 분할 점령 다음에 통일 정부를 수립해주려고 해도 남북이 말을 듣지 않는 거다. 분할 점령한 상황에서 남북의 기득권 세력이 자신의 기득권을 잃지 않으려고 (각자의 이데올로기에 맞는) 사회를 세팅한 거다. 당시 정치 지도자들이 얼마나 큰 실책을 범했는지 곱씹어 생각할 수밖에 없다. 독립도 중요했지만 그 이후 100년 가까운 세월을 분단 상황으로 살아온 것이니. 그 시기가 더 길어질 수도 있고, 그에 대한 책임은 훨씬 더 커질 수 있다.
-요즘 <씨네21>은 어떤 것 같나.
=잘 만들고 있는 거 아닌가. 아까도 얘기했듯이 개인이 시대의 한계를 벗어날 수 없으니 <씨네21> 자체의 역량이 달라진 매체 환경을 뛰어넘을 수는 없다. 지금은 매체의 지방자치 시대고, 그걸 인정해야 한다. 현재의 환경에서 독자들과 어떻게 커뮤니케이션을 할지 고민해야 한다.
-전임 편집장으로서 쓴소리를 한다면.
=아이 몰라. 다 잘하니까 유일하게 남은 거지. 지금은 사실 오프라인 잡지가 살아남기도 힘든 상황이다. <씨네21> 크레딧을 보면 <씨네21>이 이 많은 직원들을 모두 먹여살릴 수 있나 걱정도 된다.
-12년이라는 긴 시간 동안 <세 여자>를 쓰고 독자 앞에 내 놓았는데 감회가 어떤가.
=외롭지 않다. 그동안 세 여자가 항상 내 머릿속에 있었고 머릿속이 심하게 복잡했다. 그런데 책이 나오고 나니 사람들이 다 읽고, 세 여자와 그들이 살았던 시대에 깊이 공감하더라. 나로서는 책을 출간한 이후 지난 2주 동안 매일매일이 잔치하는 기분이었다. 사실이 책을 굉장히 많은 사람들에게 돌렸다. 판매 전략내지는 프로모션이기도 하지만, 적어도 내가 아는 사람들은 다 읽고 공감해줬으면 좋겠다는 마음이 컸다. 지인들에게 책을 보낼 때는 작품으로도 평가받지 못하고 흥행에 실패할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 그 역학자가 그렇게 말했으니까.
-역학자의 말이 실현될까봐 두려웠나.
=아니, 일단 최선을 다한다는 생각뿐이었다. 역학자가 한 말 덕분에 나 자신에게 아무런 기대를 하지 않고 마음을 비운 채 책을 낼 수 있었다. 그 역학자가 그래도 나한테 득이 된 점이 있었던 거다. 그저 주변 사람들이 좀 봐줬으면 좋겠다는 소박한 욕망을 가지게 해줬다. 그래서 지인들의 독후감이 페이스북에 올라오기를 눈 빠지게 기다린다. 오늘은 누가 독후감을 올리려나. (웃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