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1]
[애니메이션 기대작③] <소나기> 안재훈 감독, "소설의 대사를 잘 살려야 한다고 생각했다"
2017-08-14
글 : 김현수
사진 : 최성열

안재훈, 한혜진 감독의 <소중한 날의 꿈>(2011)은 어려운 한국 애니메이션 산업 여건 속에서 오랜 기간 숙성시켜 만들어진 소중한 작품이었다. 7080관객의 향수를 자극하기 충분한 시대배경과 이제 막 꿈을 키워나가는 청춘의 고민, 그리고 실사영화가 표현할 수 없는 꿈과 현실의 경계를 무너뜨리는 환상적인 연출까지. 픽사와 디즈니, 지브리 3면에 둘러싸여 제 힘을 발휘하지 못하던 한국 애니메이션이 오랜만에 마음껏 활개를 펼친 작품이었다. 안재훈 감독이 몸담고 있는 ‘연필로 명상하기’는 <소중한 날의 꿈> 이후에도 열악한 국내 제작 환경 탓만 하지 않고 자체적으로 기술적인 제작 노하우와 애니메이터로서의 재능을 펼칠 수 있는 여러 프로젝트를 꾸준히 추진하고 있다. 근대 단편소설을 기반으로 애니메이션을 제작하는 ‘한국 단편문학 애니메이션’ 프로젝트는 <메밀꽃 필 무렵> <봄봄> <운수 좋은 날> 세편을 묶어 내놓은 <메밀꽃, 운수 좋은 날, 그리고 봄봄>(2014) 이후 올해 <소나기>와 <무녀도> 개봉을 앞두고 있다. 처음 작품을 시작할 당시에는 아무도 안 볼 영화를 왜 만드느냐는 따가운 시선도 많았다. 하지만 안재훈, 한혜진 감독 이하 ‘연필로 명상하기’ 제작진은 오직 작품성으로 선입견을 극복해나갔다. 황순원 작가의 단편소설을 원작으로 하는 <소나기>는 십수년간 쌓아온 ‘연필로 명상하기’의 제작 노하우가 더욱 단단해져가고 있음을 증명하는 작품이다. 산과 개울과 노을이 어우러진 한국 고유의 시골 풍경과 소년과 소녀 사이의 닿을 듯 말 듯 아련한 설렘과 쓸쓸함이 카메라가 아닌 펜 끝에 담겨 스크린에 옮겨졌다는 점을 기억하자. 아무도 가지 않은 길을 선택하고 현실과 타협하지 않으면서 시스템의 부재에 낙담하지 않고 탄탄한 미래를 설계해나가는 안재훈 감독 이하 수많은 한국 애니메이터의 노력이 영화 곳곳에 묻어나 보일 것이다. 혜화동 사무실을 벗어나 남산 재미로에 새 둥지를 튼 안재훈 감독의 ‘연필로 명상하기’ 작업실을 찾아가 작품과 그를 둘러싼 산업 전반에 관한 이야기를 들어봤다.

-전작 <메밀꽃, 운수 좋은 날, 그리고 봄봄>은 세편의 단편을 묶어 개봉했는데 이번에는 <소나기>와 <무녀도>(10월 개봉예정)가 따로 개봉한다.

=연출자로서는 이 작품들이 한편의 영화보다 문학이란 이름으로 묶여 상영되길 원했지만 배급이나 마케팅 면에서는 따로 개봉시키는 것이 좋겠다는 판단이었다. 그래서 러닝타임도 조금 늘어났다. 관객이 어떻게 받아들일지 고민된다.

-지난 몇년간 스튜디오 ‘연필로 명상하기’의 규모나 운용에 변화가 있었는지도 궁금하다.

=한국의 애니메이션 스튜디오가 가져야 하는 정체성, 창작자를 만족시킬 수 있는 방법을 끊임없이 고민 중이다. 재능 있는 애니메이터의 능력이 소진되는 느낌이 들어 현재 해외 외주 작업은 일체 하지 않고 있다. 그리고 중국 인력과 프리랜서 계약 관계로 일하다가 최근 ‘연필로 명상하기 장춘 스튜디오’를 설립해 6∼7명의 현지 직원을 두고 함께 일하고 있다. 우리가 장단점을 잘 아는 OEM 방식을 발전시켜보자는 취지다. 스탭의 공동 작업 태도가 건강하고 밝게 자리잡아가고 있고 무엇보다 이전에는 단편문학의 애니메이션화 자체에 의문을 가졌던 이들이 지금은 인정해주고 있어 내 판단이 옳았다고 생각한다.

-<소나기>는 서사 중심의 소설이 아니기에 각색에 있어 감독이 개입할 여지가 많아 보인다. 예를 들면 영화는 소설에서처럼 전학 온 소녀와 소년을 무작정 만나게 한 다음 이야기를 풀어나가는 것이 아니라, 소녀가 버티고 선 징검다리를 건널지 말지를 며칠씩 고민하는 소년의 이야기를 먼저 시작하고 둘의 에피소드는 그다음에 진행하는 식이다.

=<소나기>는 각색을 하기에 빈 공간이 너무 많은 작품이었다. 또한 상상력조차 발휘할 수 없는 담백함도 지니고 있다. 그래서 사실 여러 가지 시도를 해보고 싶은 유혹이 있었다. 물론 단편문학 애니메이션은 안재훈보다 황순원이 관객에게 먼저 전달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면서도 안재훈은 소설을 이렇게 들여다봤구나, 정도의 공감대만 관객이 가져줬으면 하는 바람이 있다.

-소설에서 소녀를 묘사하는 데 쓰인 단발머리나 분홍색 스웨터 등을 그대로 구현하면서 동시에 항상 빨간 가방을 메고 다닌다는 설정을 추가한 것도 같은 맥락인가.

=그렇다. 소녀는 도시에서 나고 자란 아이인데 소설에서 그녀를 설명하는 요소가 별로 없다. 단발머리가 예쁘게 그리기 쉽지 않은데 황순원 작가의 의도를 상상하며 머리핀을 추가한다든가 스웨터 안에 셔츠를 추가해 그려봤다.

<소나기> 컨셉아트. 영화는 한국의 숲과 들녘, 빛을 표현하기 위해 많은 공을 들였다. 영화의 배경 전체를 수채화 톤으로 표현한 것도 아시아의 어느 숲이 아니라 한국의 풍경을 담기 위한 선택이었다.

-다소 딱딱하고 어색해 보이는 원작의 대사도 그대로 살렸다.

=대사는 작가 고유의 영역이라 생각했다. 단편문학을 작업하면서 원작의 대사를 잘 살려야 한다고 생각했다. 목소리 연기를 맡아준 노강민, 신은수 두 배우가 훌륭하게 소화해줬다. 이들을 캐스팅할 때는 착하지도 순수하지도 않은 시골 소년의 목소리, 그리고 아이 같지 않은 묘한 매력을 지닌 소녀의 목소리를 원했다. 목소리 연기자를 선택할 때는 얼굴을 되도록 보지 않은 채 판단하려 한다. 이전에도 그랬고 <소나기> 역시 음성만 듣고 결정하려 했다. 성인 연기자의 경우에는 아이 목소리 연기하는 게 어떨 때는 어색해 보이기도 한다. 그래서 웬만하면 어린 연기자가 맡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던 차에 두 배우의 목소리가 돋보였다.

-멜로드라마로서의 장르적 연출 기법이 곳곳에서 사용됐다. 예를 들면 소년과 소녀가 허수아비를 가지고 노는 장면의 경우, “오늘 같은 날은 일찍 집으로 돌아가 집안일을 도와야 한다는 생각을 잊어버리기라도 하려는 듯이”라는 소설의 표현을 아름답게 해석해낸다.

=소년의 눈에 소녀가 들어오기 시작하는 순간이 언제일까를 고민했다. 아마도 그때였을 것 같았다. 대개 스킨십을 통해 마음을 확인할 수 있는데 <소나기>에서는 소년이 바라보는 소녀의 뒷모습 같은 둘 사이의 거리감으로 소년의 판타지를 표현해봤다. 나뭇잎을 떼며 예스 노 게임 같은 걸 하는 장면도 그려 넣어봤는데 너무 직접적이라 삭제했다. 소설에서는 단 몇줄의 묘사에 그친 장면을 만들어내는 것이 해석의 묘미인 것 같다.

-오랜 기간 장편 프로젝트를 이끌어가는 것은 재정적으로나 심적으로나 결코 쉽지 않은 작업이다. <소중한 날의 꿈>의 개봉 경험이 ‘연필로 명상하기’를 운영하는데 어떤 영향을 끼쳤는지도 궁금하다.

=개봉 당시에 <트랜스포머3>(2011)가 극장가를 점령하고 있었다. 독과점이 지금만큼 시끄럽지는 않았지만 <소중한 날의 꿈>이 관객으로 인해 다시 한번 예술영화전용관에서 상영할 기회를 얻는 걸 경험하면서 나 자신이 삶을 대하는 태도가 달라졌다. 이전까지 애니메이터는 그림만 잘 그리면 된다고 생각했는데 나 자신이 그런 일에 처해보니 사회구성원으로서 함께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관심을 가지지 않으면 안 되겠더라. 그로 인해 신념도 생기고 보다 적극적으로 사회에 참여하고 있다. 작품마다 엔딩크레딧 말미에 고마움을 표시하는 것도 그런 이유다. 전에는 굿즈 같은 상품을 왜 만드는지 이해를 못했는데 앞으로는 <소중한 날의 꿈>을 한명의 관객이라도 더 볼 수 있는 방법이 있다면 뭐든 해볼 것이다. 최근에는 지그소 퍼즐도 만들었다. 영화가 개봉으로만 끝나지 않고 끝까지 살아남는 모습을 후배들을 위해서도 보여줘야겠다고 다짐한다. 그래야 후배들이, ‘나도 저기까지는 갈 수 있겠다’고 마음먹지 않겠나. 픽사, 디즈니, 지브리 등의 해외 선례는 동경의 대상이지만 한국 애니메이션 스튜디오는 누군가에게 동기가 될 수 있다.

-어쩌면 관객의 변화보다 창작자 스스로의 변화를 더 중요하게 여기는 것 같다.

=영화는 관객이 존재해야 한다. 때문에 지금의 산업은 영화와 관객의 만남에 모든 초점이 쏠려 있다. 하지만 그 이전에 관객과 스튜디오가 신뢰를 쌓으면 변화가 생길 수 있다. 스탭 또한 환경이나 대우를 떠나 어떻게 하면 공동 작업의 매력을 유지하면서 한 개인의 직업관을 잘 형성할 수 있을까를 고민하다 보면 변화가 찾아오리라 믿는다. <소나기>를 작업하면서 나 또한 변했다. 후배들에게 “너희도 장인이 되라”고 이야기하는 것은 그들 입장에서는 너무 힘든 동기 부여라고 생각했다. 고독한 장인정신을 내세우기보다는 즐겁고 유쾌하게 관객과 만나는 애니메이터라는 인식을 심어주고 싶다. 한국 애니메이터의 삶을 멋지게 살고 싶다.

-‘연필로 명상하기’의 다음 프로젝트는 무엇인가.

=드라마 <도깨비>가 히트하기 훨씬 전부터 <천년의 동행: 살아오름>이라는 도깨비 소재의 장편 프로젝트를 준비 중이었다. 망자를 위로하는 꼭두의 형상을 접목한 도깨비가 등장하는 이야기다. 주인공은 서울에 사는 마음이 죽어버린 20∼30대 여성인데 그녀가 영화 제목처럼 다시 살아오르고 싶은 마음을 갖게 되는가에 대한 일종의 성장담이다. 드라마가 먼저 만들어져 대폭 수정을 할 수밖에 없는데 그래서 마음은 홀가분하다. 왜냐하면 드라마와 유사한 요소는 다 빼면 되거든. (웃음) 그외에 한국 단편문학 애니메이션 작업도 계속 할 예정인데 이상의 <날개>, 이창준의 <눈길> 같은 작품을 주로 추천받고 있다. <천년의 동행: 살아오름> 작업 후 시작할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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