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지웅의 경사기도권]
[허지웅의 경사기도권] 역사를 바꾼 공동체의 양심에 관한 이야기 <택시운전사>
2017-08-14
글 : 허지웅 (작가)
일러스트레이션 : 김지은 (일러스트레이션)
그날의 광주, 지금의 우리

나는 어느 배우가 사석에서 지난해의 광장에 대해 뜨겁게 감동하는 말을 늘어놓다가 광주 이야기가 나오자 별안간 “그건 북한에서 한 게 맞대”라고 말하는 걸 본 적이 있다. 희생자의 넋을 기리는 기념식장에서 특정한 노래를 부르냐 부르지 못하느냐가 그리 중대한 화두였던 사회. 이미 오래전에 허구로 드러난 북한 개입설을 여전히 주장하는 익명들이 있는 사회. 죗값을 온전히 치르지 않은 죄인이 오래도록 많은 것을 누리며 그것은 폭동이었다, 는 말을 아무렇지 않게 할 수 있는 사회. 세상이 많이 바뀐 것 같지만 우리 사회는 여전히 그런 곳이었다.

그런 세상 안에서 광주민주화운동을 다룬 이야기들의 관심은 주로 ‘오래된 권력들’의 곱지 않은 시선에도 불구하고 당대의 참상을 얼마나 재현해 낼 수 있느냐에 맞추어졌다. 최대한 재현하고 있는 힘껏 알려야 한다는 선의가 존재했다. 광주를 다룬 새 영화가 나오면 많은 사람들이 ‘이번 영화는 사실을 얼마나 담아냈느냐’를 ‘세상이 얼마나 바뀌었느냐’의 리트머스로 삼아 판단하고 싶어 했다.

드라마 <모래시계>와 <제5공화국>, 영화 <화려한 휴가>에 이르기까지. 그러나 검증된 기록으로 전해지는 객관적 사실 관계를 그대로 보여줄 수 있는 영화는 없었다. 임신부와 노인과 초등학생들이 조준 사격과 총검에 찔려 죽었다. 그걸 그대로 담는다면 등급을 받을 수 없을 것이다. 광주를 다룬 글이나 프로그램에서 늘 같은 사진과 영상을 보게 되는 건 자료가 없어서가 아니다. 기록된 사체의 훼손이 너무 심해서다. 80, 90년대 대학가에서 많은 이를 울분에 흐느끼게 만들었던 바로 그 사진들 말이다. 그걸 그대로 대중에 노출하거나 재현하는 것은 또 다른 문제가 된다.

5월 17일부터 18일의 집회, 그리고 27일 도청에서 마지막으로 흘러나온 총성과 비명에 이르기까지. 반복되는 이야기가 모두 끝나고 스크린에 암전이 찾아오면, 우리는 매번 분하고 비참한 마음으로 극장을 나서야 했다.

그래서 다른 길을 가는 영화들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다큐 <오월愛>는 당시 광주민주화운동에 참여했던 사람들의 지금 모습을 카메라에 담았다. 사건이 당사자들의 삶에 어떤 영향을 끼쳤는지 보여주면서 광주민주화운동이 이미 완결된 과거의 역사가 아니라 전혀 치유되지 않고 방치되거나 잊힌 상처라는 걸 드러낸다. 영화 <스카우트>는 고교 괴물투수 선동열을 스카우트하기 위해 광주에 도착했다가 시위의 중심으로 들어가버린 주인공을 내세운다. 거대 서사가 아닌 개인에 대한 연민을 중심에 두는 방식으로 이 코미디영화는 매우 눈부신 성과를 만들어냈다. 훌륭한 영화다.

그리고 지금 <택시운전사>가 있다. 외부인의 시선으로 광주민주화운동을 관통해 다시 밖으로 무사히 탈출하기까지의 여정을 다룬다. 광주민주화운동 그 자체는 죽음으로 끝나는 비극 서사다. 그런데 주인공들의 여정은 성공한다. 이 영화는 <스카우트>와 더불어 광주민주화운동을 다루고 있으면서도 영화가 끝난 이후 분하고 억울한 마음 대신 성취감을 느끼게 만드는 드문 영화다.

그렇다면 이 성취감은 정직한가. <택시운전사>는 광주의 참상을 풍경으로 소모하는 외부인의 모험극인가. 그렇지 않다는 데에 바로 이 영화의 아름다움이 있다. 주인공 만섭(송강호)이 모종의 선택을 하고 유턴을 하는 대목은 이 영화의 가장 소중한 순간이다. 이 영화의 표면적인 미션은 독일기자의 다큐 필름을 무사히 해외로 빼돌리는 것이지만, 진짜 이야기는 만섭이 양심을 좇는 바로 그 장면 안에 있다.

편하고 안전한 길이 있고, 어렵고 불편하지만 양심을 따를 수 있는 길이 있다. 대개의 사람들이 전자를 택한다. 우리는 가족을 건사해야 하는 약한 존재다. 쉽게 손가락질할 수 없다. 그런데 아주 가끔 이상하게도 다수의 시민이 후자를 따를 때가 있다. 그럴 때는 반드시 역사가 바뀐다.

<택시운전사>는 바로 그 양심에 관한 영화다. 결국 끝내 역사를 바꾸었던 시민의 양심에 관한 이야기다. 80년 5월의 금남로에서 87년 6월의 광장, 그리고 바로 지금 이 순간에 이르기까지 중요한 순간마다 발휘되었던 우리 공동체의 양심 말이다.

이 영화가 중반의 다소 늘어지는 전개나 억지스러운 추격 장면에도 불구하고 실체보다 더 큰 공감을 만들어낼 수 있는 비밀이 여기에 있다. <택시운전사>는 지금 시점의 우리 사회가 경험하고 있는 순간들과 만나면서 비로소 완성된다. 소시민의 어렵고 고된 양심이 꾸역꾸역 발휘되는 순간을 만섭의 표정이 담아낼 때, 광주를 탈출하는 주인공들을 못 본 척 통과시켜주는 군인의 망설임이 드러날 때, <택시운전사>는 우리 공동체가 참을 수 없는 부조리의 마지노선을 만날 때마다 선택했던 양심에 관한 이야기로 새롭게 확장되는 것이다.

자주 떠올리는 역사 속의 장면이 있다. 광주민주화운동의 참상을 목격한 후 서울로 올라왔던 서강대생 김의기는 충격을 견디지 못하고 1980년 5월 30일 오후 5시30분 서울 종로5가 기독교회관에서 ‘동포에게 드리는 글’이라는 글을 뿌리면서 투신 자살했다. 5·18에서의 내란죄, 내란목적살인죄 혐의로 1996년 구속 기소된 전두환씨는 재판 당시 최후진술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건국 이후의 우리나라 역사가 독재와 부정부패로만 뒤덮인 암흑의 시기였다면, 어떻게 오늘날의 번영이 가능했겠습니까.”

바로 그것이다. 건국 이후의 우리나라 역사가 독재와 부정부패로 뒤덮인 암흑의 시기였음에도 지금과 같은 번영을 이루게 만든 것이 우리다. 광주 시민들이, 김의기가, 우리 공동체가 이루었다. 우리 공동체는 헬조선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이미 망했을 나라를 여러 차례 구제한 집단이기도 한 것이다. 영화의 목적은 결코 사회적 역할에 한정되지 않는다. 영화는 그 자체로서 완결성을 갖는다. 그러나 흡사 누벨바그와 아메리칸 뉴시네마 시대가 그러했듯 당대의 시대정신과 호흡하며 입체적인 면모를 드러내는 것 또한 영화다. 공동체의 자존감을 높이고 세상을 향한 다음 세대의 비관을 조금이라도 덜어낼 수 있게, 또한 특수한 상황에서 출범한 현 정부의 개혁과 청산의 방향이 힘을 잃지 않도록, 향후 이런 영화적 경험을 더 자주 만날 수 있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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