잔 모로와의 첫 만남의 영화가 더 근사한 작품이었다면 좋았을 거라 생각한 적이 있다. 사람들은 잔 모로의 부고 소식에 <사형대의 엘리베이터>(1958)나 <줄 앤 짐>(1962)의 그녀를 떠올린다지만, 그녀에 대한 내 기억의 첫인상은 수상한 서부극에서의 총을 든 여인의 모습이 자리하기 때문이다. 감독이 루이 말이라는 사실도 나중에야 알았을 정도로 그저 흘려보내는 시간에 보게 된 영화다. 80년대 후반, 어느 주말 저녁에 텔레비전으로 <비바 마리아>(1965)와 만났다. 물론 그녀의 출연작을 이미 보긴 했었을 것이다. <현금에 손대지 마라>(1954)나 <대열차 작전>(1964) 같은 영화를 유년기 때 텔레비전으로 봤으니 그녀를 몰랐다고는 말할 수 없다. 다만, 장 가뱅이나 버트 랭커스터는 기억해도 잔 모로는 그런 영화들의 한구석에서 어떤 인상이나 흔적도 남아 있지 않았다. <비바 마리아>가 그렇다고 잔 모로를 영접하기 위해 마련된 특별한 작품은 아니었다. 나는 그때 브리지트 바르도 때문에 텔레비전 앞에 앉아 있었을 것이다.
혁명의 마리아
<비바 마리아>는 멕시코 혁명을 다룬 일종의 자파타 웨스턴으로, 내용은 시시하지만 두 여인이 혁명을 이끄는 자유의 여신으로 등장해 군인들과 과감한 총격전을 벌이는 장면만으로도 흥미롭긴 했다. 아일랜드 혁명가의 딸인 마리아(브리지트 바르도)가 아일랜드 독립을 꾀해 테러를 감행하다 멕시코까지 흘러와 유랑극단 가수인 또 다른 마리아(잔 모로)를 만난다. 이어 둘은 의기투합해 정의를 외치며 멕시코 혁명에 나선다는 내용이다. 바르도는 잔 모로에게 혁명과 테러를 전파하고, 잔 모로는 선머슴 같은 그녀에게 반대로 사랑의 쾌락을 전수한다.
잔 모로의 가르침은 이때부터 시작이었을까. 90년대 초에 개봉한 <니키타>(1990)에도 그 비슷한 장면이 나온다. 잔 모로는 니키타에게 몸놀림과 매너, 화장이나 패션에 대해 가르침을 준다. 무엇보다 여성으로서의 쾌락에 자유롭게 너를 맡기라 권고한다. 아무튼, <비바 마리아>에서 잔 모로는 사랑의 메신저이자 전사인데, 그럼에도 그녀를 기억하게 한 장면은 액션이나 사랑의 순간들이 아니다. 영화의 중반쯤, 꽤 이상한 일이 벌어지는 장면이 강렬한 기억으로 남았다. 바르도와 잔 모로의 얼굴이 마치 잉마르 베리만의 <페르소나>(1966)에서처럼 겹치는 순간이다. 카메라는 두 마리아를 한 화면에 단일한 카메라의 움직임으로 포착한다. 그런데 어찌된 일인지 바르도를 쫓던 카메라에는 갑자기 잔 모로의 얼굴이 등장하고, 반대로 잔 모로가 움직여 기둥 뒤로 사라지면 반대편으로 바로도가 출현한다. 두 얼굴을 구분하는 것이 불가능해지는 순간으로, 그녀의 얼굴들이 서로 닮아지고 있는 것인지, 아니면 원래 한 사람이었던 마리아가 둘로 나뉘고 있는지 혼란스럽다.
이야기 전개와는 상관없는 과잉의 순간이다. 이 시퀀스가 지금 흥미롭게 다가오는 것은 그녀가 전후 프랑스 영화사를 새롭게 작성한 누벨바그의 어떤 이미지를 보여주기 때문이다. 바르도와 잔 모로는 전후 해방의 시대에 모든 종류의 터부를 붕괴시키고자 했던 누벨바그 감독들이 꿈꿨던 현대적 여인의 두 초상이자 이상적 종합이다. 잔 모로는 그들이 꿈꾼 혁명의 마리아인 것이다.
변용의 배우
여기에 누벨바그 작가들의 피그말리온의 신화가 있다. 말하자면, 잔 모로의 이미지는 누벨바그 작가들의 섬세한 손길과 그들이 믿는 영화의 힘에 따라 변용되었다. 1928년생인 잔 모로는 이미 1947년에 연극 무대에 데뷔했고, 1949년부터 영화에 출현해 루이 말의 <사형대의 엘리베이터>에 출연하기 전까지 이미 20편의 영화에 단역으로 출연했다. 그녀는 갑자기 새롭게 등장한 스타라기보다는 당시 주류 영화의 한계적 이미지에 갇혀 있던 배우였다. 잔 모로의 변화는 그러므로 누벨바그 작가들의 출현과 젊은이들의 파격적인 영화작업과 함께 시작했다. 언젠가 잔 모로는 누벨바그가 기성세대들에게는 공포였다며 “관습에 따르지 않는 자유분방한 젊은이들의 폭발적인 출현에 영화계 전체가 공포를 느꼈다”라고 술회한 바 있다. 젊은 작가들은 그러므로 잔 모로에게 단지 새로운 배역을 주었던 것으로 관습에서 벗어난 것은 아니었다. 그들은 완전히 다른 방식으로 잔 모로에게 접근하고자 했다. 1957년, 트뤼포는 이미 잔 모로를 향해 “그녀는 프랑스영화계의 가장 위대한 연인이다. 갱의 무리가 서로 죽도록 치고받는 동안에도 그녀는 댄스 스커트를 입고서 서커스단에서 춤을 추고, 사디스트에게 학대당하고 기관총 세례를 뚫고 나가면서도 오로지 사랑만을 생각한다. 떨리는 입술을 지니고 머리를 풀어헤친 그녀는 이른바 ‘도덕’ 같은 것에는 관심이 없이, 사랑을 통해 사랑을 위해 살아갈 뿐이다. 제작자와 감독들이여, 그녀에게 진정한 역할을 주라. 그러면 우리는 위대한 영화를 가지게 될 것이다”라고 찬사를 보냈었다. 트뤼포의 고백처럼 누벨바그 작가들은 잔 모로의 얼굴과 몸짓, 특유의 걸음걸이에서 해방 된 여성의 자유를 체현하는 은막의 뮤즈를 발견하고자 했다.
<사형대의 엘리베이터>의 오프닝 장면은 변화의 시작을 가장 완벽하게 보여준다. 이 영화는 잔 모로의 극단적인 클로즈업으로 개시한다. 마치 칼 드레이어의 <잔 다르크의 수난>(1928)에서의 팔코네티처럼 수수한 얼굴로 등장한 그녀는 “더이상은 못 참겠어. 당신을 사랑해”라 말하고 있는 중이다. 그 어떤 설정도 없이 루이 말은 과감하게 잔 모로의 거대한 얼굴을 스크린에 투사한다. 카메라의 새로운 힘이 그녀를 태어나게 한다. 이 영화의 가장 유명한 장면들 또한 잔 모로가 무기력하게 파리의 밤거리를 걷는 순간들로, 순수하게 관조적 접근일 뿐이지만 그녀의 어쩔 수 없는 허무감이 화면 가득 강렬하게 전달된다.
또 다른 시적 리얼리즘이라 해야 할까, 그녀의 얼굴에서 걸음에서 우리는 불가해한 내면과는 상관없는 잔 모로의 무의식, 분위기와 마주한다. 캐릭터는 제대로 기억되지 못한다. 단지 고독과 마주한 한 여인의 모습이 있을 뿐이다. 이른바 트뤼포가 말한 잔 모로의 ‘베트 데이비스’ 측면이라 할 만한데, 이는 미켈란젤로 안토니오니의 <밤>(1961)에서 거리를 돌아다니는 여자의 걸음으로, 자크 드미의 <천사들의 해변>(1963)에서 니스 해안 거리를 머리를 흩날리며 사뿐사뿐 걷는 모습에서 반복된다. 특별히 그녀의 걷는 순간을 사랑한 루이스 브뉘엘의 <하녀의 일기>(1964)에서 그녀의 움직임은 이상한 긴장과 불안정성을 보여준다. 이런 영화들에서 잔 모로는 어떤 인물을 소화한다기보다는 그저 움직이는 형태, 부서질 듯 파멸로 이끌리면서도 활력 있고 자유롭고 고고한 욕망을 품은 생동감 있는 몸짓의 인상으로 진정한 배우가 된다.
누벨바그의 안내자
잔 모로의 탁월한 아름다움은 그럼에도 루이 말의 두 번째 작품 <연인들>(1958)에서라 할 수 있겠다. 그녀를 진정으로 좋아하게 된 것도 이 영화 때문이다. <연인들>은 동시대 누벨바그 영화 중 가장 성숙하고 세련된 영화로, 무엇보다 잔 모로가 느끼는 감각적 경험이 그녀의 얼굴과 표정, 몸짓을 통해 세세하게 전달되는 영화다. 누벨바그가 새로운 파도였다면, 그 파도를 거쳐 어딘가 다른 세계로 우리를 안내할 매개자가 있어야만 한다. 잔 모로는 이 영화로 부유하는 파도를 거쳐, 미지의 대지로 우리를 끌고 가는 매혹적인 배우의 이미지를 구현한다. 그녀는 우리를 감정의 여정으로 안내한다. 이 영화에서 가장 잊을 수 없는 순간은 그녀가 새벽에 깨어나 정원을 산책하는 장면이다. 그녀의 멋진 목소리가 보이스 오브 내레이션으로 들려온다. “갑자기 그녀는 누군가 다른 사람이 되고 싶었다.” 그녀의 변용을 보여주는 가장 완벽한 사례다. 모로는 이 순간 단지 집을 나서는 것만이 아니라, 사회의 터부에서 그녀의 몸을 구속하는 환경에서, 그녀에 대해 여하한 규정과 속박에서 벗어나는 중이다. 그녀가 몽유병 환자처럼 집을 나서면 한 젊은 남자가 그녀를 뒤따른다. 그는 잔 모로의 모습에 도취되어 있다. 연인들이 달빛을 온몸에 품은 채 숲을 거닐고, 그물에 걸린 고기를 풀어주고, 쪽배를 타고 강물을 따라 내려가는 여정은 우리를 알려지지 않은 영토, 영화의 크레딧에 나오는 ‘부드러움의 지도’라 부르는 고대적 여정을 따라가게 한다. 그들은 지금 유토피아로 나아가고 있는 중이다. 잔 모로의 머리는 흩날리고 달빛 아래 연인들의 열망이 우리를 사회 바깥으로, 도덕의 굴레 바깥으로 항해하게 한다. 어떤 저속한 욕망도 끼어들 틈이 없는 가장 낭만적인 장면에 브람스의 음악이 함께한다. 누벨바그의 파도를 따라 유토피아의 세계로 나아가는 것. 이 모든 아름다운 순간은 그러나 영화의 강력한 힘에 의한 작동이며, 여기서 잔 모로의 황홀한 변모를 넋 나간 듯이 지켜보는 이는 그녀를 연모하는 젊은 남자 혹은 관객뿐만이 아니다. 무엇보다 한 배우의 몸에 감동한 예술가의 존재가 있다. 장 뤽 고다르와 안나 카리나가 그랬듯이 여기서도 피그말리온과 갈라테아의 관계가 있다.
잔 모로의 압도적인 현전에 대해서는 물론 프랑수아 트뤼포의 <줄 앤 짐>을 빼놓고 이야기할 수는 없을 것이다. 여기서 잔 모로는 가히 여신으로 등장하는데, 이 때문에 당시 비평가들이 그녀가 두 남자의 우정이야기를 붕괴시키고, 심지어 작가의 영화를 배우의 영화로 변형했다고까지 푸념을 늘어놓기도 했을 정도다. 물론, 잔 모로의 압도적 아름다움이 두 남자의 특권화된 시선과 관련되어 있음을 부정할 수는 없다. 쥘과 짐은 여성적 이미지를 고대의 조각상에서 발견하고, 잔 모로를 그들의 이상적 이미지의 체현으로 생각한다. 그러므로 잔 모로가 비록 60년대 해방적인 여성 이미지로 비쳐질지라도 그녀는 구체적인 역사나 사회, 문화적 조건에서 빠져나온 이른바 ‘사랑의 정열에 빠진 여인’으로 표현되고 있다. 트뤼포는 <비련의 신부>(1968)에서 잔 모로의 신화적 측면을 더 강렬하게 표현한다. 영화의 초반부, 잔 모로는 죽은 남편의 복수를 위해 살인자의 집을 방문한다. 카메라는 마치 그녀의 움직임의 시선을 따라가듯 아파트의 고층부터 아래로의 하강운동과 회전이동을 거듭해 마당을 쓸고 있는 한 남자에게 다가가는데, 이때 잔 모로는 전 장면에서의 검은 옷의 상복과 달리 바람에 살랑거리는 레이스 달린 흰 이브닝드레스를 입고 우뚝 서 있다. 이때 남자를 죽이러 가는 서스펜스의 전개는 이 이미지와는 하등의 상관이 없다. 중요한 것은 화면의 이동과 그런 모든 움직임을 순간적으로 중단시키는 그녀의 이미지의 대조에 있다. 잔 모로는 여기서 어떤 캐릭터를 연기하는 것이 아니다. 그녀는 나중에 화가의 그림에 구현될 이상적인 여인의 이미지로, 숱한 남자들의 삶을 중단시키는 절멸의 여신으로 현현한다.
영화의 역사와 함께한 배우
이렇듯 잔 모로는 <줄 앤 짐>에서 그녀가 불렀던 노래처럼 ‘인생의 회오리바람’처럼 화면에 출연하곤 했다. 그녀의 초기 이미지들이 누벨바그 작가들의 이상화된 여성의 이미지를 체현했다 말한다 해도, 몇초만에 표정을 바꾸고 그녀를 둘러싼 환경을 순식간에 감정의 소용돌이로 몰아가는 잔 모로의 탁월한 능력은 작가의 한계를 언제나 초과했다고 생각한다. 그녀는 현대적인 작가들과 작업한 한명의 배우가 아니라 (오슨 웰스, 누벨바그 초기 이후 그녀와 작업한 작가들의 목록은 화려하다), 세르주 투비아나가 말했듯이 ‘영화의 역사와 결혼한 배우’였다. 그녀가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에 <사형대의 엘리베이터>의 마지막 장면이 떠오른다. 그녀는 암실의 현상액 속에서 서서히 떠오르는 자신의 사진을 멍하니 들여다보고 있다. 그리고 사진을 손끝으로 만지면서 이렇게 말한다. “우리는 늙어가겠지. 하지만 우리는 여기 사진 속에 함께 있잖아. 어디에선가, 항상 함께 있는 거야. 아무도 우리를 떼어놓을 수는 없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