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2]
블랙리스트 판결문으로 본 어둠의 흔적
2017-09-11
글 : 김완 (<한겨레> 탐사팀 기자)
글 : 하어영 (한겨레21 기자)
지자체 산하 문화재단 사찰하고 한예종 인사 개입하려 계획… 국정원 불법행위 있었지만 책임지는 사람 없어

“청와대·국정원·문체부를 통한 지원 배제의 시스템.”

조윤선 전 문화체육관광부 장관 판결문에 등장하는 이 표현은 지난해 말 한국 사회를 뜨겁게 달군 ‘문화계 블랙리스트’의 작성과 운용 원리를 압축해 보여준다. 이 판결문은 블랙리스트를 만들고 집행한 국가기관이 문체부만은 아니라고 지적한다. 국정원 역시 중요한 역할을 담당한 것이다.

블랙리스트 집행 과정에 깊숙이 개입

그러나 사법처리 과정에서 국정원 관계자는 ‘일절’ 등장하지 않았다. 불법행위는 있었지만 책임지는 자가 없는 법적 공백이 생긴 것이다. 실제 블랙리스트 재판은 김기춘 전 대통령비서실장, 김종덕 전 문화체육관광부 장관, 김상률 전 청와대교육문화수석 등 청와대와 문체부 핵심 관계자들을 처벌 대상으로 삼는다. 그러나 김 전 실장과 조 전 장관 등 중요 관계자들의 판결문에는 <한겨레 21>이 이번에 확인한 ‘엔터팀’의 영화산업 전반에 대한 불법적 개입을 제외하고도, 국정원이 저지른 다양한 불법행위의 흔적이 남아 있다. 국정원은 민간인을 사찰해 리스트를 작성했고 이들을 배제하기 위해 움직였다.

한 예를 보자. 2014년 2월 김 전 실장은 모철민 교육문화수석에게 “문예기금 지원 대상 선정 결과 좌파단체, 좌성향 작가 등이 포함됐다. 하반기 심사부터 이런 폐단이 시정될 수 있도록 하라”는 취지의 국정원 정보보고 문건을 전달한다. 이는 국정원이 문체부가 지원한 단체 및 개인에 대한 정치적 성향을 파악해 청와대에 보고했음을 보여준다. 김아무개 전 청와대 비서관 판결문에도 “국정원 정보 보고 문건에서 정부의 기금 지원 등을 문제 삼은 개인명·단체명, 문체부에서 국정원에 지원 배제 여부를 검토, 의뢰하여 받은 개인명·단체명”이라는 내용이 등장한다. 블랙리스트 작성과 관련된 기초 작업이 끝난 뒤 이에 대한 업데이트 및 집행이 진행되는 과정에서 국정원이 깊숙이 개입했음을 추정하게 하는 대목이다.

국정원의 활동 범위는 중앙정부에 머무르지 않았다. 이들은 야당 출신이 단체장이어서 상대적으로 자율성이 높은 지자체 산하 문화재단까지 사찰 범위 안에 포함시켰다. 김 전 실장이 2013년 9월 모철민 교문수석에게 전달한 ‘시도문화재단의 좌편향 일탈 행태에 대한 시정이 필요하다’는 내용의 국정원 보고 문건을 보면, 광역 지자체 산하 12개 문화재단 가운데 서울·광주·부산·강원·충북 등을 좌편향 일탈 행태의 사례로 지적한다.

국정원의 업무는 동향 파악으로 리스트를 작성하는 수준을 넘어섰다. 이들은 진보적 성향을 가진 이들을 정부 지원 대상에서 배제하기 위한 실행 방법까지 입안했다. 국정원은 이 보고 문건에서 “지난 정부 이후 정부 지원 축소 및 스크린 강화로 좌성향 세력이 많이 위축되기는 했으나 부분적으로 세 확산 기도가 감지된다. 국립단체는 필터링을 위한 공모제 확대 및 심사 기준 강화가 필요하다. 한예종 총장이 좌성향 교수를 보직교수로 임명하는 것에 유의하고, 연구 실적이 부진한 좌성향 교수의 퇴출 유도가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보조금 삭감’ 등 세부 방안 제안

국정원은 시도문화재단 ‘일탈 행태 시정’과 관련해서도 ‘문화계 건전 인사’의 주장을 인용해 “감사원·문체부에서 국비 지원 사업 감사 등을 통해 문화재단 운영 실태를 면밀 점검하고, 보조금 삭감·불탈법 행위 의법 조치 등을 통해 정상화를 견인해야 한다” “건전 언론·단체와 협조해, 이념 편향·예산 낭비 및 과도한 제 몫 챙기기 행태를 알려 국민의 공분을 조성하고 경각심을 고취할 필요성이 있다” 등의 방법을 제안하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