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버스타]
<남한산성> 박희순 - 묵묵히 충실하게
2017-09-19
글 : 송경원
사진 : 최성열

멀티 캐스팅이 대세가 되면서 박희순이 바빠졌다. 대개 강골의 마초, 남성성의 끝자락에 그의 자리가 마련되어 있다. 하지만 한편으로 <올레>(2016)처럼 망가지는 것도 즐긴다. 충무로에서 가장 바쁜 배우 중 한명이지만 출근 도장 찍듯 독립영화에 출연하는 것도 거르지 않는 속깊은 배우. <남한산성>에서 박희순이 맡은 무장 이시백은 좌고우면하지 않고 묵묵히 중심을 지키며 맡은 바 도리에 충실한 인물이다. 배우 박희순도 그렇다.

-어떤 계기로 출연을 결심했나.

=원작을 너무 재미있게 봤다. 인물 한명 한명이 각자의 철학과 세계를 가지고 설전을 벌인다. 범인들의 말싸움이 아니라 세계를 바라보는 방식들의 충돌이다. 어느 쪽의 손도 쉽사리 들어줄 수 없는 상황에서 각 인물들이 자신의 자리를 잡고 있는, 단단한 소설이다. 그리고 각색 과정에서 균형을 훌륭하게 지켜낸, 기품 있는 시나리오였다. 매우 영화적인 방식으로 풀어나가는 한편 원작의 우아함을 잃지 않는다. 요새 흔히 ‘만찢남’(만화를 찢고 나온 남자)라고 하지 않나. 이 영화 속 캐릭터들은 모두 ‘소찢남’ 소설을 찢고 나온 사람들이다. (웃음)

-이야기에 기품이 있다.

=최근 사극이 퓨전으로 많이 흘러가는데 이런 전통사극이 한편쯤 나올 때도 되지 않았나 생각한다. 멋스러워 보이기 위한 기교가 없어서 역설적으로 더 세련된 느낌을 받았다. 튼튼한 원작, 영화적인 각색, 제자리를 지키는 배우들, 이를 조율하는 연출까지. 오랜만에 만나는 웰메이드 사극이다.

-<남한산성>의 현장 분위기를 한마디로 정리한다면.

=원작을 영화화할 땐 확고한 자기 소신이 필요하다. 황동혁 감독은 원작에 대한 학습은 물론 방대한 자료조사와 공부가 충실히 되어 있었다. 원작에서 어떤 포인트를 가져오고 영화적으로 살려낼지에 대한 기준도 분명했다. 디테일이 완벽하게 준비된 상태에서 촬영에 들어갔기 때문에 토씨 하나 바꾸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원작에 대한 예의와 경외심, 각색에 대한 소신을 두루 갖춘 현장이었다.

-워낙 균형 잡힌 이야기라 모든 캐릭터와의 접점이 있다.

=모든 배역이 매력적이라는 게 이 작품의 최고의 장점이다. 김상헌은 불같은 열정과 강직함을 지녔지만 동시에 백성을 생각하는 따뜻한 마음을 지녔다. 뜨거운 불도저 같은 힘은 (김)윤석이 형을 따라갈 사람이 없다. 그 안의 섬세함도 있고. 최명길은 이성적인 인물인데 이병헌 배우가 그 안에 흐르는 감성까지 세심하게 살려냈다. 목표가 뚜렷하고 완벽하게 준비를 하는 좋은 배우다. 인조는 어떻게 보면 이 영화에서 가장 어려운 캐릭터다. 어떤 선택도 할 수 없는 고뇌가 묻어나야 한다. 우유부단한 것과는 다른, 어떻게 리액션을 하는지의 문제다. 박해일이 아니었으면 불가능했을 역할이다. 날쇠는 이 영화에서 가장 매력적인 캐릭터 같다. 피해자, 희생자이면서 동시에 희망을 대변하는 입체적인 인물이다. 고수의 인생연기를 볼 수 있을 거다.

-전체적으로 설전을 벌이는 영화에서 액션을 전담하는 역할인데.

=무거운 의상, 산길, 눈밭까지 액션을 하기에 최악의 조건을 두루 갖추고 있다. (웃음) 스타일리시한 액션은 없다. 최대한 사실적이면서도 힘겹게 보이고자 했다. 전쟁 신도 컷을 많이 나누지 않고 원 테이크로 간 장면이 많다. 이시백이 실내에 들어간 장면은 딱 한번뿐이고 계속 야외에 머문다.

-<밀정>(2016)의 김장옥, <브이아이피>(2017)의 리대범, <남한산성>의 이시백처럼 강골 이미지의 역할들을 도맡아 하고 있다.

=들어오면 다 한다. (웃음) 최근엔 멀티 캐스팅이 대세이기 때문에 빈곳을 돌려막기하고 있달까. 덕분에 기회가 자주 주어지고 다양한 역할들을 접할 수 있어 좋다. 기본적으로는 마이너 감성이다. 남자다운 척하는 것에 대한 거부감이 있다. 솔직히 남자들만 나오는 영화는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웃음) 강한 소재의 비슷한 영화들만 나오면 만드는 쪽에서도 피로감을 느낀다. 배우는 선택할 수 있는 게 아니라 선택당하는 입장이다. 그 안에서 가능한 복합적인 인물을 고르고 정서를 표현하고자 한다.

-매우 바쁘지만 그 와중에 독립영화에도 꾸준히 출연 중이다.

=내가 하고 싶었던 장르나 마이너한 감성을 저예산영화들을 통해 충족시킨다. 적극적으로 나서서 제작을 성사시키는 경우도 있다. 최근 김지혜 감독의 <썬키스트 패밀리>도 즐거웠고, 이번에 부산국제영화제에 출품되는 정희재 감독의 <히치하이크>도 재미있었다. 다양한 역할을 접할 수 있는 게 좋다. 개인적으로 흥행은 아쉬웠지만 <맨발의 꿈>(2010)이나 <우리집에 왜왔니>(2008) 같은 영화들에 애정이 간다. 작은 영화들이 약간만 여유가 있어도 훨씬 나은 결과물을 선보일 수 있을 텐데 요즘은 1억원 아니면 100억원이라 안타깝다. 작지만 재미있는 영화들을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게 있으면 뭐라도 힘을 보태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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