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민초’에 끌렸다.” <남한산성>의 시나리오를 읽자마자 고수는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서도 꿋꿋하게 버텨내어 끝내 살아남는 백성의 삶이 가장 먼저 눈에 들어왔다. 그가 이 영화에서 백성의 삶을 대표하는 캐릭터 날쇠에게 이끌린 건 우연이 아니다. 성실한 대장장이 날쇠는 고립된 남한산성에서 고관대작들이 정치적 신념을 맞대고 싸우고 있을 때 홀로 ‘살아남는 것’의 중요함, 삶 자체의 신념을 굽히지 않기 위해 노력하는 인물이다. “역사적 사실을 바탕에 두고 연기해야 했기에 더욱 부담이 됐다”고 말하는 고수를 고민에 빠뜨린 날쇠는 어떤 인물일까. 고수는 왜 날쇠를 연기하며 가슴이 먹먹해졌다고 말했을까. <남한산성>을 기대하는 관객도 그 해답을 찾을 수 있을까.
-70만부 이상 팔린 원작 소설 자체의 무게감 때문에라도 시나리오를 신중하게 봤을 것 같다.
=오래전에 소설을 읽은 적 있다. 시나리오를 보자마자 소설과 차이를 못 느낄 정도로 원작에 가까우면서 영화적인 전개를 고민한 각색에 놀라웠다. 최근에 이렇게 묵직한 여운을 남기는 시나리오를 본 적 있나 싶을 정도로, 마지막 장을 덮고는 할 말을 잃고 멍하니 있었다. 가슴이 먹먹해졌다.
-인조 곁에서 국가의 운명을 두고 논쟁하는 김상헌(김윤석)과 최명길(이병헌)의 대립, 홀로 성을 지키는 이시백(박희순) 같은 인물들과 달리 날쇠는 근본이 다른 백성 신분이다.
=내가 앞으로 어떤 영화에서 어떤 인물을 또 연기할지는 모르겠지만 그동안은 평범한 소시민, ‘민초’ 역할에 본능적으로 끌렸다. 그들의 입장에서 세상을 바라보는 역할을 하고 싶었다. 게다가 날쇠 역시 자기만의 신념을 갖고 말과 행동을 한다. 김상헌과 최명길, 이시백 등이 지닌 신념과는 또 다른 것이다. 왕은 (어떤 신념을 지녔는지)모르겠지만. (웃음)
-다른 인물들이 자신의 신념을 영화 내내 말과 지략으로 드러낸다면 날쇠는 일상에서 행동으로 자신의 신념을 보여준다. 가장 역동적인 영화의 움직임, 즉 액션을 담당하기도 한다.
=날쇠는 흔들림 없는, 규칙적인 삶 자체로 자신의 신념을 드러내는 인물이다. 평범한 사람들의 신념이라는 게 그렇듯이, 날쇠 역시 그저 주어진 하루를 열심히 살아가는 백성이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굉장히 예민한 인물이다. 그 예민함 때문에 김상헌 대감으로부터 왕의 책서를 전달하라는 지령을 받았을 때 그것이 어떤 의미인지를 알아챘을 것이다. 그런 성격 덕분에 영화적인 재미, 긴장감을 표현할 수 있는 인물이다.
-날쇠는 대사 분량도 많지 않아서 그가 가진 생각을 단순한 행동이나 표정으로 보여줘야 했을 텐데, 황동혁 감독이 사전에 요구한 사항은 없었나.
=감독님이 특별히 요구한 건 없었다. 대화도 별로 없었다. 촬영 전에 시나리오를 읽다가 헷갈리는 대목이 있으면 문자 메시지로 간단하게 의견을 주고 받는 정도였으니까. (웃음) 그리고 현장에 내가 뭔가를 설정해가려 해도 각본 자체에서 이미 다져놓은 기운이 있기 때문에 뭘 더하지 못했다. 나로 하여금 저절로 기교를 버리고 진정성, 정통성 같은 단어의 뜻을 고민하며 연기하게 해줬다. 그래서 다른 어떤 영화보다도 여유가 없었다. 주어진 신 안에서 어떻게든 정의롭고 인간적인 날쇠의 모습을 압축해서 보여줘야 하는 게 힘들었다. 등장만으로 갈등을 담아야 하고 결정의 순간을 보여줘야 했으니까. 그런 연기는 뭘 보고 따라할 수 있는 성격도 아니다.
-전체 촬영 일정 중에서 본인 분량이 없는 날에도 출근하듯 촬영장을 찾았다고 하던데, 다른 배우들의 연기가 궁금해서였나.
=날쇠의 인생에서 책서 전달 임무를 수행하는 순간의 감정이 굉장히 중요해 보였다. 그때 어떤 마음으로 김상헌 대감의 제안을 수락하는지 나 스스로 납득할 수가 없더라. 그의 입장에서는 조정이 돌아가는 상황도 모르고 성 밖의 상황도 모를 테니까. 그래서 어떤 톤으로 연기해야 할지 갑갑했다. 전체 맥락을 이해할 목적으로 촬영장에 자주 나갔다. 그렇게 날쇠란 인물을 조금씩 풀어나갔던 것 같다. 단순한 메신저 이상의 감정을 담고 싶었다.
-관객으로서는 역사적으로 실패한 이야기의 결말을 봐야 하는 부담도 있을 것이다.
=바로 그 때문에 시나리오를 처음 읽자마자 멍하니 있었다. 마음 한켠이 답답해지면서 나는 어떤 사람으로 살아야 할까, 고민하게 됐으니까. 내가 시나리오를 읽고 카메라 앞에서 연기를 하며 느꼈던 이 마음이 전달됐으면 한다. 관객도 영화의 결말이 역사적 사실임을 인지하고 보면 좋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