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비평]
폭력의 역사를 경유하는 <살인자의 기억법>
2017-09-19
글 : 송효정 (영화평론가)
나는 존재하는가

혼돈을 오래 들여다보면 혼돈이 어느덧 자신을 바라보고 있다. 영화 <살인자의 기억법>(2016)은 니체가 말했던 이 혼돈의 응시에 놓인 주체가 실존의 위기에 맞서는 과정을 따른다. 이 작품은 원작 소설과 다른 층위의 해석이 가능하도록 만들어졌다. 김영하의 원작 <살인자의 기억법>은 1인칭 주인공, 그것도 ‘신뢰할 수 없는 화자’인 알츠하이머 환자의 글쓰기에 의존하여 진행된다. 독자는 문자를 통해 이미지와 심상을 머릿속에 그려낼 수 있다. 그런데 영화는 주인공 캐릭터를 눈앞에 보여주어야 하는 한편 신뢰할 수 없는 화자의 진술을 토대로 서사적 의혹을 만들어가야하는 고충을 떠안는다. 원신연 감독은 영화적 재현을 고려하여 인물과 서사의 설정을 재구성하였고 소설과 다른 의미구조를 만들어내기 위해 각색 과정에 꽤나 공을 들였다.

공동체의 윤리에서 주체의 위기로

근래 식민지 시대부터 1980년대까지 근현대사를 소재로 한, 현실주의에 긴박된 시대물들이 흥행하고 있다. 전반적인 수준은 하향 평준화되었고 자기복제에 빠진 장르적 상상력은 빈곤한 실정이다. 근접한 역사의 소환이 빈번했던 것은 우리가 하나의 ‘올바른’ 역사가 있다는 것을 강요받던 시대를 경험해왔기 때문인 한편 담론이 유통될 공정언론 붕괴로 인해 영화가 공론장 역할을 일부 대리보충해왔기 때문으로 보인다. 이러한 영화들은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어떤 윤리적 올바름, 시민의식과 공적 상식에 대한 존중이라는 입장을 지지한다. 그것이 무엇일지라도 이들은 소규모 남초집단에 장악된 공동체가 설파하는 어떠한 ‘입장’을 편들거나 반대한다.

영화 <살인자의 기억법>은 1970~80년대 현대의 시간을 경유하기는 하지만 그 시대를 역사적으로 평가하는 데 관심이 없으며, 윤리의 대리인이나 그 명백한 적대세력을 상정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결이 다르다. 권선징악적 통쾌감을 상업적으로 전유하여 시민적 가치가 승리한다는 소박한 리얼리즘을 끼워파는 데에도 관심이 없다. 무엇보다 <살인자의 기억법>에는 상식적 ‘입장’이라는 것이 없다. 오히려 우리는 신뢰할 수 없는 화자를 통해 입장이나 확신이 얼마나 모호하고 불안정하며 하찮은 것인가에 대해 반복적으로 확인하게 된다.

영화는 알츠하이머에 걸린 연쇄살인범이 검은 터널의 시간이자 짐승의 시간을 회고하는 과정을 보여준다. 주인공 병수(설경구)는 가까운 기억에서부터 차차 자신의 기억을 잃어가고 있다. 그가 신뢰할 수 있는 것은 녹음된 음성과 기록된 일지와 같은 언어들이다. 하지만 그의 뇌에 심각한 손상이 진행되고 있음을 알고 있는 관객은 그의 말을 전적으로 신뢰할 수 없다. ‘믿을 수 없는 화자’란 서사학에서 그 서술이나 논평을 독자들이 신뢰할 수 없게 된 화자를 말한다. 화자가 거짓말쟁이라든가 도덕적이거나 심리적인 우둔함에 의해 세상물정을 잘 모르는 경우가 이에 해당한다. <살인자의 기억법>의 경우, 관객은 주인공 병수의 진심을 의심하지 않지만 그 진위는 의심하게 된다. 서사가 관객을 매혹하는 장치는 이 신빙성의 부재로 인한 서사적 모호성에 의존한다. 관객은 불안을 교정하기 위해 해석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고자 한다. 애매한 지점은 다음과 같다. 주인공 병수가 보는 것은 어디까지 진실인가? 태주(김남길)는 실재하는 인물인가? 병수의 망상이 구성해낸 인물인가? 현재의 연쇄살인은 태주의 소행인가? 병수의 소행인가?

메타포와 고쳐쓰기

소설의 경우 번복되는 진술을 통해 모호함을 증폭시키는 방식을 채택했다. 가령 원작에서 병수가 기르던 개가 있었는지의 여부는 소설의 여러 곳에서 서로 다른 진술들에 의해 진의가 의심된다. 그런데 영화에서 모든 것을 내레이션이나 대사 등 언어로 전달하는 것은 번거로운 일이다. 대신 영화는 문자와는 다른 전략, 즉 시각적 이미지의 메타포를 활용한다. 대표적으로 병수의 차가 태주의 차를 들이받는 장면은 영화에서 안개에 둘러싸인 지대에서 발생한다. 우연한 접촉사고로 태주를 처음 본 병수는 직관적으로 그가 자신과 같은 유형의 인간, 즉 살인마임을 알아채고는 즉각적으로 딸 은희(설현)의 안위를 걱정하게 된다. 병수는 태주를 잡기 위해 기록하고 노력하지만 치매 증상으로 기억은 점차 사라지고 살인의 습관만이 손에 남는 딜레마에 처한다. 여기서 안개는 병주의 체험이 실제인지 망상인지 모호하게 하는 장치로 기능한다. 사건의 시작과 끝은 모호한 안개 저편에 놓여 있고 현재 자행되는 연쇄살인의 범인에 대해 병수는 의심한다. “내가 만난 것이 살인범이었는지, 나인 살인범이었는지?”

한편 소설과 달리 영화에서 병수의 일지는 태주에 의해 고쳐쓰기당한다. 가령 병수가 ‘은희를 구해야 한다’고 쓴 부분을 태주가 ‘은희를 죽여야겠다’고 수정하는 경우가 그러하다. 그런 고쳐쓰기의 과정을 통해 근방의 연쇄살인범은 태주에서 병수로 교정된다. 동시에 아버지 병수의 윤리는 살인범 태주의 욕망으로 번역된다. 시각적 메타포와 고쳐쓰기의 방식에 의하면 이 영화에서 현재의 연쇄살인범 태주는 병수가 망상(안개) 속에서 만들어낸 존재이며, 그렇기에 그가 만난 것은 자기 자신인 살인범인 셈이다. 이렇게 영화는 앞선 병수의 질문에 대해 태주의 욕망으로 답한다. “내가 네가 되고, 네가 내가 되는 것”이라고 말이다. 영화에서 빈번하게 등장하는 거울의 장면들을 되짚어보자. 영화에서 거울 속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모두 병수의 다른 자아들이다. 자신의 최초의 살인을 회고하는 장면, 안개 속에서 태주를 처음 조우한 후 병수는 두면으로 나뉜 거울에 두개의 얼굴을 반사시킨다. 그리고 클라이맥스에서 태주는 거울 속의 자신을 보며 트라우마를 떠올린다. 그러한 반영을 통해 영화는 망상 속 인물들을 병수의 분신들로 분산시킨다. 한편 ‘은희’는 자신의 실존의 붕괴를 막기 위한 최후의 보루이자 구원의 최종적 메타포이다. 은희는 딸인 동시에 유일한 생의 근거이고, 그의 죄를 속죄하던 누이 마리아이며 나아가 (살인 별장의 창고에 놓인) 성모마리아다.

상식을 의심하고 불안 속에서 성찰하라

<살인자의 기억법>의 오프닝과 엔딩에서 우리는 반복적으로 흉포한 과거를 지닌 초로의 남성이 어두운 터널에서 나오는 것을 목격하였다. 어두운 터널은 남자가 경유해온 짐승의 시간을 의미한다. <박하사탕>(2000)과 <살인자의 기억법>에서 설경구는 피해자나 방관자가 아니라 폭력의 공모자로 한 시대를 살았던 자를 연기했다. 배우의 신체를 빌려 두 영화를 보자니, 국가권력의 문화검열과 맞섰던 시대와 블랙리스트의 악착스런 겁박의 시대가 터널의 암흑에 겹친다. <살인자의 기억법>의 오프닝과 엔딩에 나오는 철길은 남자가 걸어온 시간의 비유로 기능하는데, 우리는이 공간을 원신연 감독이 독립영화 연출 시절 만든 단편 <빵과 우유>(2003)에서 만난 적 있다. 그 길은 미래 기억, 즉 과거가 아니라 미래의 불확실한 방향으로 열려 있다. <살인자의 기억법>은 독립영화에서 출발, <세븐데이즈>(2007)와 <용의자>(2013) 등 상업 액션영화의 외견을 모방해왔던 원신연 감독의 변화를 감지할 수 있는 작품이기도 하다. 그는 <구타유발자들>(2006)에서 도달하지 못한 지점, 야생적이면서도 유머러스하고 날서 있으면서도 고립적이지 않은 지점을 향해 가고 있다.

<살인자의 기억법>은 기존의 상업영화들이 경유해온 폭력의 전시, 연쇄살인, 여성의 신체적 학대라는 재현의 스펙터클에는 별 관심이 없으며, 오히려 실존의 위기에 처한 주체의 불안이라는 심리적 주제에 주목한다. 이는 2000년대 중반 이후 근 10년간 상업영화의 흐름과는 사뭇 다른 노선으로, 합의된 상식적 가치를 의심하고 다시 주체의 존립의 근거를 성찰하는 경계의 언저리를 떠돈다. 현실주의에 긴박된 공동체의 윤리에 대한 관심과 주체의 존립에 대한 심리적 불안에 대한 관심이라는 상이한 경향의 길항 속에서 원신연 감독은 과감하게 후자의 방향으로 선회하고 있는 듯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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