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2]
<블레이드 러너 2049> 세계의 창조
2017-11-01
글 : 송경원

화면을 가득 채운 눈동자가 우리를 바라본다. 아니, 우리가 거대하게 찍은 눈동자를 목격하는 걸까. 두 문장은 같지만 전혀 다르다. 드니 빌뇌브의 <블레이드 러너 2049>(이하 <2049>)와 1982년 리들리 스콧의 <블레이드 러너>의 관계가 정확히 이러하다. <2049>는 리들리 스콧이 스크린에 붙들어 맨 세계의 형태에 경배를 바치며 충실한 복제를 시작하는 것처럼 보인다. <블레이드 러너>의 오프닝을 먼저 떠올려보자. 칠흑 같은 암흑에 별처럼 박힌 건물의 불빛들과 간헐적으로 솟아오르는 불기둥이 익스트림 롱숏으로 펼쳐진다. 이윽고 클로즈업된 눈동자가 화면을 메우는데 녹색의 눈동자에는 불빛과 화염들이 거울처럼 반사되고 있다. <2049>의 경우 시작과 함께 화면을 메우는 건 익스트림 클로즈업으로 포착한 눈동자다. 영화는 눈동자를 한참 바라본 뒤에야 익스트림 롱숏으로 하얀 바닥에 점처럼 박힌 단백질 농장의 전경을 천천히 비춘다.

드니 빌뇌브는 <2049>에서 리들리 스콧의 비전에 헌사를 바치는 동시에 모든 걸 뒤집어놓았다. 숏의 순서가 역전되어 있을 뿐 아니라 도심의 어둠이 하얀 안개와 외곽의 농장으로 교체되어 있다. 풍경과 이를 바라보는 시선 순으로 편집했던 리들리 스콧과 달리 드니 빌뇌브는 눈동자의 목격이라는 리액션숏을 먼저 등장시켜 관객의 궁금증을 유발한다. 덧붙여 세계의 형태를 수직 상부로 찍은 익스트림 롱숏을 뒤에 등장시켜 강조하는데, 이는 끝없는 광활함을 통해 관객을 압도하는 드니 빌뇌브의 전매특허 중 하나다. 일단 이 광대하고 정적인 이미지에 매료되면 이후 영화는 거칠 것이 없다. 나는 이 오프닝 시퀀스가 전작을 계승하고 원본과 구별되고자 하는 방식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지표라고 생각한다. <블레이드 러너>와 <2049>의 관계는 인간과 리플리컨트(복제인간)를 닮았다. 원본과 복제된 것, 혹은 먼저 존재한 것과 이어받은 것 사이 필연적으로 발생할 수밖에 없는 차이. 하지만 이는 비교 우열의 문제가 아니다. <블레이드 러너>가 인간과 복제인간의 경계를 흩트리며 인간다움에 대해 환기시켰던 것처럼 하나의 세계를 구현한 두개의 영화, 두개의 이미지 사이 간극은 영화의 경계에 대해 환기시킨다. 이 사유는 실재와 재현의 관계, 아날로그 이미지와 디지털 이미지의 관계로까지 확장시킬 수 있을 것 같다. 무엇이 영화인가. 무엇이 영화적인가. 숱하게 남발되고 여전히 미로를 헤매는 오래된 질문이 <2049>로 인해 도돌이표처럼 돌아왔다. 이것이 내가 <2049>를 걸작의 반열에 올리고 싶은 이유다.

원본과 복제 그리고 디지털 이미지

필립 K. 딕이 창조하고 리들리 스콧이 다듬은 <블레이드 러너>의 세계는 한 가지 질문에서 출발했다. 인간과 복제인간은 무엇이 다르고 어떻게 구분되나. 뒤집어 표현하면 복제인간과 인간이 구분되어야 하는가. 원작 소설은 물론 1982년 버전의 영화도 이에 대한 답을 내진 않는다. 대개의 경우 조건이란 그에 부합하지 않는 상대를 배제하기 위한 방편으로 작동하는 반면 <블레이드 러너>에서 강조되는 인간성은 인간이 되는 조건이 아니라 그러한 방향으로 나아가고 싶다는 의지의 표현이다. 데커드(해리슨 포드)는 감정이 인간과 복제인간을 구분해 준다고 믿는다. 창조된 복제인간은 감정, 즉 마음을 가질 수 없다고 생각하지만 풍성한 감정을 가진 레이첼(숀 영)과 로이 배티(룻거 하우어)를 접하며 적어도 데커드에게 있어서 인간과 복제인간의 구분 자체가 의미 없어진다. 로이 배티의 서글픈 눈빛을 볼 때 우리는 거기서 인간을 본다. 어쩌면 우리가 잃어가고 있는 가치들을 인간을 모방한 존재들을 통해 발견하는 건지도 모르겠다. 즉 <블레이드 러너>는 복제된 존재들을 통해 원본이 응당 가졌어야 할 가치를 역설한다.

<블레이드 러너>는 종교적인 상징들로 가득한 영화다. 존재의 조건을 정의하는 건 신의 일이다. 복제인간을 만들어낸 인간은 이제 신의 위치에 서서 인간에 대한 자문을 시작한다. <에이리언>(1979)을 연출하고 오랜 시간이 지난 뒤에 <프로메테우스>(2012)로 화답한 것처럼, 단편적인 사건을 먼저 보여주고 창조주의 기원을 찾아가는 패턴은 리들리 스콧이 꾸준히 추구해온 방향이기도 하다. <블레이드 러너>에서 출발한 존재의 기원에 관한 탐색은 <2049>에서 더욱 선명하게 상징화 되었다. 니앤더 월레스(자레드 레토)는 그야말로 노골적으로 창조주를 모방한다. 복제인간의 자가 생식은 경제적인 관점으로는 우주 개척을 위한 노동력의 순조로운 확보를 위해서라기엔 지나치게 번거롭다.

그는 자신이 부리는 복제인간들을 엔젤이라 칭하고 수족인 비서 러브(실비아 혹스)를 통해 죽음이라는 형태의 사랑을 전파하고 다닌다. 물에 난반사된 빛으로 일렁이는 니앤더 월레스의 공간은 그 어떤 설명이나 상황보다 정확하게 그의 위치를 이미지화한다. 스스로 빛이 되고자 하지만 결국 그가 지배하는 건 빛이 아니라 반사된 물결의 일렁임, 다시 말해 허상이다. 생명의 양수를 본뜬 듯한 방의 디자인, 노아의 방주를 연상시키는 K(라이언 고슬링)와 러브의 클라이맥스 대결까지 <2049>는 온통 신화적 상징으로 가득 차 있다.

재미있는 건 그 표현들이 지나치다 싶을 만큼 계획적이고, 정확하고, 정교하게 디자인되어 있다는 점이다. 마치 모범생이 이론에 따라 써내려간 답안지처럼 한치 흐트러짐이 없다. 아마도 이것이 <2049>를 심심하게 만드는 요인 중 하나일 것이다. 드니 빌뇌브는 인지의 영역으로 포착하지 못할 것을 감히 모사하거나 재현하지 않는다. 이 영화에는 우연이나 기적 따윈 깃들 틈이 없다. <블레이드 러너>의 비 내리는 옥상 장면, 로이 배티의 처연한 눈빛에는 정확히 지정할 수 없는 광기어린 감정이 묻어 있다. 그것은 영화라는 그릇을 빌리고 있지만 설명되거나 통제할 수 없는 이미지, 우연히 찾아온 기적의 시간이다. 모든 관객이 같은 이미지를 바라보지만 전혀 다른 감정으로 발화할 수 있는 씨앗과도 같다. 반면 <2049>에는 그런 폭넓은 해석의 틈 같은 건 없다. 물론 <2049>는 심층적으로 다양한 해석을 끌어낼 수 있는 복잡다단한 텍스트지만 모든 상징과 수식은 이미지로 정교하게 다듬어지고 통제된다. 나는 표현할 수 없는 것, 통제할 수 없는 흔들림을 재현하지 않는 태도야말로 드니 빌뇌브가 영화라는 세계, 이미지라는 물질을 창조하는 방식이라고 느꼈다. 영화는 현실을 모방하고 시간을 붙들어 매고자 하는 욕망에서 출발한 매체다. 영원히 도달할 수 없음에도 완전한 리얼리즘이라는 신화를 꿈꾼다. 왜냐하면 회화나 조형과는 달리 사진은 존재의 그림자를 포착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는 동시에 영화는 영화임을 자각하고 있다. 어떤 영화는 현실이 되고 싶어 하지만 우리는 그것이 결코 현실이 될 수 없음을 이미 안다. 현실과 영화 사이에는 원본과 복제된 것만큼의 간극이 있다. 대다수 영화들이 이를 좁히려 노력해왔지만 드니 빌뇌브는 정반대의 방향에서 출발하는 것 같다. 세계를 반영하고 투영하는 것이 아니라 물질로서 존재하는 하나의 세계를 완벽에 가깝게 그려서 창조하는 것이다. 나는 여기서 디지털 이미지가 필름이 꿈꿨던 오래된 방식을 경유하여 귀환하는 걸 목격한다.

조이, 영혼의 자리를 묻다

<블레이드 러너>가 기억과 감정을 매개로 인간다움에 대한 질문을 던졌다면 <2049>는 인공지능 조이(아나 데 아르마스)를 거쳐 한 가지 질문을 추가할 수 있을 것 같다. 영혼 혹은 마음은 어디에 머무는가. 플라톤은 영혼이 머리, 그러니까 뇌에 머문다고 주장했다. 반면 아리스토텔레스는 영혼이 심장에 깃든 것이라고 했다. 누군가는 내가 지각(혹은 감각)하는 것들이 나라는 존재를 결정한다고 말하고, 또 다른 이는 지각이라는 정보를 재구성한 사고, 이성, 생각이 나를 형성한다고 믿는다. 역시나 답이 있는 명제는 아니고 각자가 세계를 인지하고 받아들이는 방식에 따라 달라진다. 영화에도 영혼이 있다면 ‘블레이드 러너’의 세계에선 눈에 깃든다고 말해야 할 것 같다. 눈은 인간과 복제인간을 구분하는 증거 중 하나다. <2049>는 클로즈업된 눈의 이미지로 시작할 뿐 아니라 본다는 것의 의미와 차이를 여러 차례 강조한다. 인공지능 조이는 홀로그램으로 투사된 이미지로 K의 앞에 선다. 단지 홀로그램일 뿐이지만 관객은 그 환영의 이미지를 통해 조이의 존재를 실감한다. 이때 조이의 재현을 단지 홀로그램, 환영, 거짓이라고 일축할 수 있을 것인가. 조이는 환영과 실감, 정보의 축적과 교감 사이에서 우리에게 질문을 던진다. 당신이 믿고 인지하는 진짜는 무엇이냐고.

첫 번째 장면, K의 선물 덕분에 방 바깥으로 나갈 수 있게 된 조이는 옥상에서 비를 맞으며 환희에 젖는다. 비를 맞는다는 표현이 이상할 수도 있다. 정확히는 홀로그램이 비를 맞는다는 정보를 받아들이고 재현한다. 아마도 인간이 피부로 감각하는 질감과는 다를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것을 가짜라고 할 수 있을 것인가. 조이는 K가 보고 싶은 대로, 혹은 우리가 바라는 대로 홀로그램을 통한 연기를 하고 있는 것에 불과한가. 비를 맞으며, 세계의 확장을 온몸으로 체감하며 즐거워하는 조이의 모습이 그저 허상이라고 밀어두어야 하는 것인가. 한가지 확실한 것이 있다. 조이의 즐거워하는 표정과 동작, 이미지를 보며 그것에 반응하는 내가(혹은 K가) 거기에 있다. 비록 이미지가 허상일지언정 반응은 현실로 존재한다.

두 번째 장면, K와 육체적 관계를 갈망하는 조이는 매춘부를 불러 그 위에 자신의 영상을 덧씌우고 육체 관계를 가진다. 조이는 매춘부의 동작과 자신의 홀로그램을 링크시키려 하지만 완벽한 일치는 애초에 불가능하다. 실제 사람과 홀로그램 사이에 발생하는 짧은 시간차는 마치 영화와 현실 사이의 간극과도 같다. 내러티브적으로 이 장면이 아름다운 것은 인간적이라고 불러 마땅한 조이의 갈망을 형상화하고 있기 때문이다. K와 조이의 관계, 감정이라는 보이지 않는 대상을 이미지화했다고 봐도 좋을 것이다. 동시에 이 환상적이면서도 의미심장한 이미지들은 현실의 이미지와 영화의 환영적인 이미지, 나아가 실사 이미지와 디지털 이미지의 간극을 연상시킨다. 조이는 홀로그램이지만 그 순간만큼은 K에게 물질로 존재한다. 비록 다른 물질(매춘부)의 틀을 빌린 모사에 불과할지언정 K에게(혹은 관객에게) 시각 이상의 감각을 선사하는 것이다.

마지막 장면, K는 자신이 데커드의 자식이 아니라는 걸 알고 공허에 잠긴다. K를 움직이는 건 자신이 특별한 존재일 것이라는 기대와 믿음이다. 거짓이 밝혀진 순간 그는 나아갈 방향을 잃는다. 이때 K의 눈앞에 나타나는 것은 거대한 조이의 홀로그램, K와 관계를 맺기 이전 조이라고 명명된 프로그램이다. K도 조이가 그저 프로그램에 불과하다는 걸 알고 있다. 그럼에도 조이와 함께한 시간들이 쌓여 서로에게 유일하고 특별한 존재가 되었다. 물론 조이의 반응들은 단지 특별한 존재이고 싶다는 K의 욕망에 반응한 프로그램의 결과일 수도 있다. 그럼에도 우리는 둘 사이에 오간 교감들을 수차례 목격했고, K가 거쳐온 시간과 반응들은 실재한다. 거대한 홀로그램을 보는 K의 시선은 허무와 환영을 넘어 무언가를 응시한다. 존재의 의미를 깨닫는 각성의 순간이다. 그리하여 K는 특별하지 않은 자신을 특별하게 만들 수 있는 행동으로 나아간다. 중요한 건 어떻게 태어나고 어떻게 프로그램되었는지가 아니라 어떤 시간을 쌓아왔고 어떤 행동을 할 것인지에 달린 것이다. 다시 말해 보는 자와 보여지는 자, 둘 사이의 교감, 기억, 반응, 시간들이 존재를 결정한다.

영화도 마찬가지다. 영화의 역사는 현실을 반영하고 담아낼 그릇을 빚어온 시간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어떤 영화들은 현실을 완전히 담아내는 것이 환영에 불과하다고 보고 애써 현실을 모사하려 하지 않는다. 그저 어떤 감정과 진실들이 또 다른 형태로 발화될 수 있도록 커다란 그릇을 만들 뿐이다. 현실의 단편을 예리하게 포착하고 정밀하게 빚어낸 그릇에는 간혹 기적처럼 진실이 스며든다. 중요한 건 필름-사진-장면 그 자체가 아니다. 장면으로부터 촉발되는 반응들이다. 다시 말해 진실은 장면과 장면 사이, 막간, 장면과 관객 사이에 깃든다. 반면 어떤 영화들은 완벽한 환영을 창조하기 위해 이미지를 갈고닦는다. 대상을 있는 그대로 판화처럼 찍어내는 대신 원본 없는 이미지 자체를 탐닉한다. 거칠게 구분하자면 전자는 필름 이미지, 후자는 디지털 이미지에 해당한다. 그려진 이미지는 현실에 발을 딛지 않은 채 하나의 세계를 재창조한다. 하지만 우리가 창조된, 그려진, 허구의 이미지를 보면서 반응하고 실감할 수 있다면 그것이 단지 허상이라고 일축할 수 있는가. 허상에 반응하는 대상-관객이 있는 한 이 반응들이 모두 거짓이라 말할 수 있는가. 디지털 이미지는 보는 자의 시선과 반응이라는 창구를 얻어 스크린에 현신한다.

‘세계’를 그리다

드니 빌뇌브를 단 하나의 키워드로 정의한다면 ‘경계’라고 하겠다. 그는 언제나 경계의 형태를 다양한 방식으로 묘사해왔다. <그을린 사랑>(2010)에선 국가, 인종, 민족의 경계를 무너뜨렸고, <프리즈너스>(2013)에서는 피해자와 가해자, 용의자와 범인의 경계를 지운 후 반응을 관찰했다. <에너미>(2013)에서는 정체성의 경계를 탐닉하고 <시카리오: 암살자의 도시>(2015)에서는 국가간 경계의 실체와 무력함, 모호한 세상의 형태를 까발린다. 급기야 <컨택트>(2016)에서는 인간과 외계인, 과거와 시간의 문제로 경계영역을 확장시킨다. 그는 제멋대로 나눠진 세계에서 이쪽과 저쪽을 넘나들며 경계가 얼마나 무력한지 일깨우고 벽을 허물어 모든 구분을 무력화시킨다. 그리하여 드니 빌뇌브가 드러내고자 하는 세계의 실체는 모호하고 불확실한 미지다. 다만 그는 바깥으로 나가는 대신 이후 각자의 행동이 스스로를 증명할 것이라는 일말의 기대를 품은 채 벽을 허무는 것에만 몰두해왔다. 그런 드니 빌뇌브가 변화 중이다. 현실을 바탕으로 하는 드니 빌뇌브의 영화들이 장벽 바깥으로 한 발짝도 나아간 적이 없었던 데 비해 <컨택트> <2049>로 이어지는 SF의 세계에서는 조심스레 다음 걸음을 내딛고 있다는 인상을 준다.

드니 빌뇌브가 즐겨 사용하는 수직의 조감숏은 그야말로 신의 시점이다. 세상이 진짜 생겨 먹을 꼴, 우리가 실제로는 한번도 목격하지 못할 이미지를 고요하게 포착한 화면들은 지도 위의 세계, 견고하다고 믿어왔던 관념들을 부순다. 그렇다면 처음부터 끝까지 창조된 가상의 세계에서는 어떨까. <2049>는 애초에 존재한 적 없었던, 그려진 세계다. 이 영화의 전개와 상징이 자로 잰 듯 정확한 것은 처음부터 끝까지 머리로 계산되고 이미지화한 세계이기 때문이다. 이미지의 주인은 당연히 드니 빌뇌브 감독이다. 그는 하나의 세계를 온전히 시각화함으로써 세계의 신이 된다. <2049>의 주인공은 K도, 조이도, 데커드도 아니다. 벽으로 둘러싸여 격리된 세계 그 자체다. 상징으로 가득 찬 이미지와 조형들이 한치의 빈틈 없이 정확하게 조립되어 있는 세계. 어쩌면 허상에 불과한 디지털 이미지가 하나의 세계로 완성되는 광경. 이 이미지들에 실체가 없다고 누가 말할 수 있을 것인가. 적어도 드니 빌뇌브는 보여주는 것 이상의 의미들을 자신의 통제 바깥에 무책임하게 풀어놓지 않는다. 오직 보이는 것만이 존재하며 내가 보는 것으로 온전히 구성된 세계가 저기-스크린에 머문다. 말하자면 내가 보는 것들, (영화 속 무수한 환영들을) 본다는 행위가 모여 세계를 완성한다.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 무엇이 영화적인가. 나는 스크린이라는 이름의 벽에 둘러싸인 <2049>를 통해 세계의 형태를 몸으로 체험한다. 이것은 지표(원본) 없는 이미지다. 심지어 영화에선 벽에 고정된 스크린에 묶여 있지 않고 사방에서 환영처럼 출몰한다. 그럼에도 이미지와 나 사이를 붙들어 매는 실감이 있다면 그것은 이미 환영이 아니다. 그제야 창조된 환영, 디지털 이미지는 빗속의 눈물처럼 씻겨 사라지지 않고, 실제 세계로부터 거절당하는 일 없이 눈처럼 소복이 쌓인다. 나는 그 자리에 서서 영화의 영혼이 깃든 눈동자를 목격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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