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비평]
<초행>의 선택이 시간과 공간을 어떻게 변화시키는가
2017-12-21
글 : 송형국 (영화평론가)
실체에 근접하는 진실된 운동에너지

초행길은 멀다. 인간의 뇌가 처리하는 정보의 양과 질에 따라 시간의 흐름이 달라지기 때문이다. 예컨대 새로운 정보를 습득하느라 바쁜 초등학교 시절은, 대부분 익숙한 정보만 처리하는 노년의 같은 기간보다 느리다. 마찬가지로 초행길에 들어선 여행자의 시간은 낯선 정보를 인지하고 판단하느라 분주하게 느리다. 시간의 빠르기는 한편으로 우리 뇌가 받는 보상 혹은 스트레스의 정도에 따라 달라진다. 놀이공원에 간 아이의 하루는 즉각적이고 연속적인 보상을 누리느라 한 시간처럼 지나가지만 시댁을 찾은 며느리의 한 시간은 하루처럼 느리다. 처가에 간 사위의 시간은 그보다는 빨리 흐를 공산이 크다. 그러니 한 지붕 아래 있어도 각자의 시간은 다르게 흐르기 마련이다. 목적지에 이르러야만 보상이 주어지는 초행길의 경우 의지와 무관한 새 정보들이 밀려드는 가운데 갈림길을 만날 때마다 빠른 결정을 내려야 하는 탓에 멀고 느리다. 요컨대 초행이란, 결과가 불분명한 선택의 연속이 시간을 늘리고 물리적 거리를 변화시키는 여정이다. 이 글은 얼핏 절대적으로 여기기 쉬운 시간과 공간을 영화의 선택이 어떻게 변화시키는지에 대한 소고(小考)다.

시간은 기어이 갈 길을 멈추고

<초행>(2017)은 현명한 건축가가 종종 그러하듯 마음의 흐름을 포함한 인물의 동선을 사려 깊게 감안한 다음 이들의 시간과 거리를 재구성한다. 이 설계의 골조는 7년 사귄 동거 연인 지영(김새벽)과 수현(조현철)이 각각 지닌, 일종의 여성성과 남성성이다. 오른 월세로 인한 이사와 내키지 않는 아버지 환갑잔치를 앞뒀음을 알리는 첫 장면이 지나고, 연인은 침대에 누워 있다. 남자가 묻는다. “고양이 키울까?” 여자가 두 차례 반복해 되묻는다. “우리가?” 이것이 ‘우리가 (고양이 키울 처지가 돼? 없는 돈에 밥 사다 먹이고 똥 치우고 그걸 다 누가 해?)’라는 뜻의 줄임말이라는 걸 남자는 알아차리지 못한다. 이어 여자가 털어놓는다. “나 생리 안 해.” 남자는 “진짜로?”를 세번 되풀이한다. 임신일지도 모른다는 말에 “진짜로(…)?” 외에는 할 말을 찾지 못한 수현이 고작 결정한 것은 물을 마시겠다며 침대를 빠져나가는 것이다. 같은 말을 세 차례 반복하는 짧지 않은 사이, 표정은 더 여러 차례 변하고 시간은 팽팽히 당겨지며 길어진다. 두 사람은 한 침대에 누워 다투지도 않지만 고양이를 얘기할 때와는 마음의 위치도 달라진다. 인물의 시간과 마음의 거리는 이처럼 좁은 다세대주택 안에서도 크게 변화할 수 있다고 말하는 프롤로그다.

초행길을 가는 모든 여행자가 그러하듯 이 영화가 고심하는 건 방향이다. 극중 여러 차례 등장하는 도보·차량 이동 장면에서 인물들은 주차한 자리와 고장난 GPS와 속도제한 표시와 군중의 물결 속에서 방향을 고민한다. 각각 시댁과 처가가 될 부모님 댁을 방문하는 로드무비로서 <초행>이 택한 곳은 인천과 삼척. 한반도의 잘록한 옆구리 양쪽 끝인 두곳은 공교롭게도 위도가 같다. 미래의 처가는 서해를, 시댁은 동해를 바라보며 서로 등지고 있다. 연인들에 있어 양가 부모님 댁은 이처럼 지구 한 바퀴를 돌아야 마주볼 수 있을 만큼 머나먼 곳인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이것은 대칭인가. 한국에서 처가는 예사말인 ‘가’(家)를 쓰고 시댁은 존댓말인 ‘댁’(宅)을 사용한다. 남자는 장인 될 분과 나란히 앉아 같은 방향을 바라보지만(TV를 보거나 그네를 타거나), 여자는 시어머니 될 분과 마주 앉아 정면의 시선을 감내해야 한다(전을 부치거나 잔을 기울이거나). 시어머니 될 분이 최선의 호의를 베푼다 해도 여자가 꿇은 무릎을 펴지 못하는 것은 물론이다. 장모 될 분이 호의를 베풀면 남자는 중요한 대화 중에도 전화를 받으러 나갈 수 있다. 나란히 앉을 수 있는 남자와 마주 앉아야 하는 여자. 무심한 이라면 대칭으로 보고 넘어갈, 김대환 감독이 데뷔작 <철원기행>(2014)부터 줄곧 포착해온 한국사회의 보편적 비대칭이다.

대구(對句)를 이루지만 대칭은 아닌 이같은 구조는 이 영화의 설계부터 각본, 촬영과 편집까지를 관통한다. 지영은 자신이 머리를 자른 일부터 결혼 문제에 이르기까지 극성스러운 어머니의 간섭이 탐탁지 않다. 수현은 사실상 이혼 상태인 아버지의 폭력성을 철저히 부정해왔다. 정작 지영이 인생에서 중요한 문제를 의논할 상대는 어머니고, 결정적인 순간에 해야 할 언행을 회피하는 수현의 유전자는 고스란히 아버지로부터 나온 것이다. 이 대목에서 영화가 주목하는 것은 여성상이라기보다 ‘모녀’의 시대상이며, 부자 관계라기보다 ‘남성’의 시대상이다. 악역을 자처하며 딸의 인생사를 걱정하는 어머니와 그로부터 뛰쳐나오고 싶지만 현실은 서글픈 비정규직인 지영의 관계- 아버지의 폭력성으로부터 애써 빠져나왔으나 내면 깊은 곳으로 전수된 철없음에서 헤어나오지 못한 수현의 존재. 어쩌면 현재의 20대에서 40대까지 한결 폭넓은 연령대의 남녀가 공감할 나 자신의 이야기. 이처럼 남성과 여성을 향할 때 대칭인 듯 다르게 맞춰진 초점은, 세대와 시대에 대한 이 영화의 감도가 얼마나 예민한지를 보여준다. 특히 수많은 한국영화와 미디어가 그려온 흔한 어머니상(포용하고 공감하고 밥 주는 여성상)으로부터 탈출한 <철원기행>과 <초행>의 어머니 캐릭터는, 강요된 여성성을 뚫고 현실로 들어온 의미 깊은 인물이다.

영화에서 양가 부모님 댁이 대구와 대조를 통해 초행길의 난처함을 살핀 장소라면, 자동차 안은 인생의 시간과 거리가 결코 절대적일 수 없음을 보여주기 위해 효율적으로 두 인물에 집중한 공간이다. 인천 부모님 아파트를 찾았을 때 마디 하나 차이로 손이 닿지 않던 단지 입구 차단기 버튼처럼, 우리는 인생에서 지척에 있어도 가닿기 어려운 것과 수시로 만나곤 한다. 삼척에서 하룻밤을 보낸 지영이 원망스러운 수현과 창문 하나를 사이에 두고 통화하는 장면은 그 정수(精髓)다. 멀리 떨어져 있을 때 사용하는 휴대폰과 먼 곳으로 이동하는 교통수단, 그 차창의 방향과 코앞에 서 있는 연인, 그리고 어느 때보다 길고 길었던 밤이 한데 모여 증명하는 것은 도리 없는 시공간의 상대성이다. 곧이어 불가역적인 태양이 마술처럼 떠오르고 화면 속 인물과 관객이 같은 방향을 바라보는 순간, 시간은 기어이 갈 길을 멈추고 우리를 바라본다. 극 전반부 인천의 황량한 길을 왼쪽으로 걸어가는 인물들, 때마침 저 멀리 오른편을 향해 날아가는 비행기, 더불어 물드는 석양의 조합을 기억하는 관객이라면 이제 삼척의 자동차 뒷자리에 앉아 태양의 상승을 바라보며 이 영화의 정교한 운동-시간-이미지가 펼치는 마법에 그만 홀리고 마는 것이다.

갑작스러운 단절, 전환, 그리고…

김대환 감독은 전작에서부터 시간 흐름에 따른 우연성을 자신의 치밀한 콘티와 만나도록 이끌어왔다. 그것은 폭설의 시작이거나 밤의 도래이기도 했고 대규모 집회이거나 운전 중 날아드는 새떼이기도 했다. 카메라가 주의 깊게 환경을 관찰하는 사이 구체적인 인물의 행동과 대사는 배우에게 맡겨졌다. 사위 될 사람과 미래를 이야기할 때 장인 될 사람은 그네에서 떨어지고, 며느리 될 사람이 결혼의 앞날에 대해 물을 때 시어머니 될 사람은 가족에게 불려나가면서 대화는 단절된다. 삶의 긴장은 인위적으로 이완되기보다 우연한 계기로 툭 하니 끊긴다. 환경은 삶에 개입하고 우연은 필연 사이에 불쑥 틈입한다. <초행>은 이처럼 실체에 근접하기 위해 치밀한 방식으로 우연과 만나는, 진실된 운동에너지가 넘치는 영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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