끝이 아니라 시작이다. 아니, 시작이 아닌 끝이라고 해야 할까. 1987년 모두가 뜨거웠던 그해 여름 시민들로 가득 찬 광장은 “호헌철폐 독재타도” 여덟 글자로 물들었다. 1979년 12·12 사태로부터 무려 8년, 전두환 독재정권에 의해 짓밟힌 민주주의에의 열망이 들불처럼 타오를 불씨가 된 건 젊은 청년의 꽃같은 목숨이었다. 남영동 어두운 구석에서 스러져간 박종철군 고문 살인과 정부의 은폐 조작을 규탄하는 목소리들은 전국 각지에서 메아리쳐 6월10일 민주 헌법을 쟁취하기 위한 범국민대회가 성사됐다. 그리하여 부당한 군부정권은 대통령 직선제를 골자로 한 6·29 민주화선언을 통해 무너진다. 아름다운 이야기다. 시민의 힘으로 일궈낸 승리의 기억이라 해도 좋겠다. 하지만 우리는 이미 알고 있다. 이후 김대중, 김영삼 두 후보의 통합이 불발되고 직선제를 통해 전두환 정권의 계승자인 노태우 정권이 들어선다는 것을. 1987년의 함성은 끝나지 않을 어둠에 대한 복선이었을까 아니면 미완일지언정 빛나는 승리에의 한순간으로 기억되어야 할까.
의미없는 구분이다. 현실은 이야기가 아니다. 역사란 본래 무수히 많은 순간들을 구겨넣은 기록의 총합이어야 한다. 하지만 실제 역사는 결국 이야기들의 모음으로 기억된다. 현실과 이야기를 가르는 결정적 차이가 뭘까. 이야기에는 시작과 끝이 있다는 거다. 어디에 서서 그날의 기억을 바라볼 것인가에 따라 이야기는 해피엔딩으로 기억되거나 비극로 마감될 수도 있다. 약간의 과장을 보태 ‘어디서 시작하고 어디서 끝을 맺을 것인가’ 하는 질문이야말로 이야기(혹은 내러티브영화)를 이야기로 만들어주는 핵심이다.
이야기의 시작과 끝
영화가 역사를 목격하는 방식에 대해 말하기 위해선 적어도 이야기의 시작과 끝이 어디인지 인식하는 것에서 출발해야 할 필요가 있다. <1987>은 6월 10일 광장의 벅찬 함성으로 끝을 맺는다. 이 영화는 역사도 현실도 아니다. 그저 승리를 기억하는 ‘이야기’다. 어디까지나 실화를 바탕으로 한 영화라는 당연한 사실. 어떤 영화들은 관객을 몰입시키고자 종종 이 당연한 명제들을 숨기고 은폐하려 애쓴다. 하지만 <1987>은 그 점을 자각한 채 시작한다. “이 이야기는 실화를 기초로 재구성되었습니다. 영화 내의 모든 사건과 인물은 실제와 다를 수 있음을 밝힙니다.” 영화 시작 전 화면에 새겨지는 유달리 긴 내레이션은 그래서 어여쁘다.
‘실화를 바탕으로 했음’보다 훨씬 길고 구체적인 이 문장은 두 가지 운동 사이에서 다리를 놓고 있다. 하나는 그날을 경험하지 못한 세대까지 간접체험시켜 연루자로 만들고자 하는 운동, 다른 하나는 그날의 재현으로부터 거리를 두고 재현할 수 없는 것은 억지로 재현하지 않고자 하는 의지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1987>은 이 두 가지 상이하고 팽팽한 운동 사이에서 긴장을 유지한다. <1987>이 최근 한국의 근현대사를 다룬 영화들 가운데에도 특히 박수받아 마땅한 이유다. <1987>은 그날의 기억을 스크린에 되살린다. 정확히는 현재의 시점에서 그날을 되돌아본다. 그 순간 6월 10일 광장에서의 일들이 승리의 기억으로 결정된다. 실제 역사와는 다소 다를지언정 영화가 우리에게 전달하고자 하는 건 그날의 승리를 위해 희생했던 민중들, 그 소중한 선택에 대한 지지인 셈이다.
<1987>은 숱한 기시감 위에 서 있다. 6월 10일 민주항쟁은 촛불과 이어지고, 사람을 죽인 후 뻔뻔하게 테니스를 치는 대공처장의 후안무치는 오늘날 누군가의 모습과 겹치며, 기자를 향해 “받아쓰기나 잘하라”는 검사의 씁쓸한 자조는 어젯밤 뉴스에서 들었다고 해도 어색하지 않다. <1987>은 명백히 촛불이 지나간 지금의 자리에 서서 바라본 그날의 기억이다. 지나간 역사이되 진행 중인 현재이며 사건의 재현이라기보다는 현실의 투사에 가깝다.
이 영화에서 엔딩이 화자의 위치를 알려준다면 오프닝은 이야기의 방식을 드러낸다. 전두환 정권의 역사를 짧게 스케치하는 뉴스 화면들이 지나가고 나면 임진각 망배단에서 재배를 올리는 대공수사처 박 처장(김윤석)의 모습으로 영화의 문을 연다. 이후 남영동 풍경과 대공분실까지 끌려와 심폐소생술을 하는 의사의 모습, 박종철군의 사망과 행사를 마치고 돌아와 이를 기계적으로 처리하는 박 처장의 모습이 차례로 이어진다. 6·10 민주항쟁의 발단이 된 고문치사사건이 오프닝을 장식하는 건 당연하다. 주목해야 할 건 드라마의 출발점이 박 처장이란 사실이다. 이 영화에는 사건을 이끌고 가는 주인공이 없다. 각자의 사정을 통해 시대의 부분을 드러내는 인간 군상이 있을 뿐이다. 법대로 가자는 최 검사(하정우), 사건을 파헤치려는 윤 기자(이희준), 사람이 죽었는데 가만히 있을 수 없다며 옥중 서신을 전달하는 교도관(유해진), 시위 같은 건 신경 쓰고 싶지 않은 어린 연희(김태리)까지 폭력적인 시대를 버티고 살았던 다양한 사람들의 얼굴이 차례로 펼쳐진다. 그리고 이들 모두를 하나의 이야기로 묶어주는 존재는 다름 아닌 박 처장이다. 영화의 시작부터 끝까지 한순간도 빠짐없이 등장하는 인물은 박 처장이 유일하다. 그는 한명의 인물을 넘어 저항해야 마땅할 거대한 악, 시대의 부조리가 되어 영화 내내 버티고 선다.
세 종류의 관객, 세 종류의 장르, 세 종류의 캐릭터
말하자면 <1987>은 박 처장에서 시작해서 광장으로 끝나는 이야기다. 반공 간첩 조작이라는 군사정권의 어둠에서 시작해서 민주주의 혁명에서 화면을 멈추는 이야기라 할 수도 있겠다. 영화는 박 처장과 그에 대립하는 인물들이 구도를 통해 역사의 도도한 흐름부터 구석구석 샛길까지 놓치지 않고 촘촘하게 담아낸다. 박 처장의 대척점에 누가 서느냐에 따라 영화가 수시로 얼굴을 바꾼다고 해도 무방하다.
<1987>은 대략 세 가지의 장르가 결합된 형태다. 뼈대는 박종철군 고문사건을 은폐하려는 자와 밝히려는 자 사이의 서스펜스다. 그 유명한 ‘탁 치니 억 하고 죽었다’는 말이 어떻게 가능했는지 밝히는 것이 영화의 핵심 동력이라고 할 수 있다. 영화의 정서는 다시 2개로 나뉘는데 그중 영화의 전반부 톤은 누아르에 가깝다. 박 처장을 중심으로 한 대공처와 절차를 무시당한 최 검사의 대립은 이른바 수컷들의 경쟁구도로 진행된다. 최 검사가 박종철군의 화장동의서에 도장을 찍어주지 않는 이유는 단순히 정의감이나 윤리의식 때문만은 아니다. 최 검사는 “지난번에 하자는 대로 했다가 우리만 똥물 뒤집어썼습니다.… 까딱하면 우리가 죽습니다”라고 지검장을 설득한다. 이건 세력간의 알력다툼이기도 하다. 단순히 정의와 불의의 대립구도로 정리하지 않는다는 점이 당시 정황과 캐릭터에 생기를 더하는 비결 중 하나다. 박 처장과 안기부장은 술자리에서 반대세력 제거를 위한 음모를 꾸민다. 그 자리에서 두 사람이 마시는 양주는 다음 숏의 최 검사가 캐비닛에 모아둔 양주로 이어진다. 양주를 휴대용 위스키병에 담아 마시는 최 검사는 본질적으로 권력에 충성하는 무뢰배다. 하지만 박종철 부검을 둘러싼 알력다툼 끝에 최 검사는 옷을 벗을 각오를 하고 박 처장을 들이받는다. 남영동 대공분실 소각장에서 나누는 박 처장과 최 검사의 대화는 수컷들, 아니 권력에 충성하던 똥개들의 기싸움이다. “사냥개끼리 싸우다 사냥감 놓치면 주인이 가만히 있지 않는다”는 협박에 최 검사는 “족보 없는 똥개라 닥치는 대로 물어 뜯는다”고 응수한다. 그리하여 양주를 홀짝거리던 최 검사는 휴대용 위스키병을 소각장에 버리며 “소주 마시고 살지 뭐”라고 다른 길을 걷기 시작한다.
누아르, 서스펜스의 기조를 유지하던 <1987>은 대학생 연희의 등장과 함께 대학가의 낭만이 뒤섞인 로맨스 드라마로 분위기가 일변한다. 1, 2부로 나눠져 있다고 봐도 무방할 정도다. 어떤 의미에서 이 영화는 연희로 상징되는 ‘알지 못하는 자’(혹은 알고 싶지 않았던 자)들이 의식화되는 과정에 대한 영화라고 해도 좋겠다.
<1987>을 바라보는 세 층위의 다른 관객이 있다. 첫째는 1987년 직간접으로 체험했던 연루자들이다. 이들은 아무래도 본인의 체험을 얼마나 사실적으로 구현했는지에 집중할 것이다. 둘째는 1987년 민주항쟁을 뉴스 등 정보로만 알고 있는 이들이다. 이들은 건조한 사실을 극화된 드라마를 통해 생생하게 목격한다. 마지막은 아예 무슨 일이 있었는지 모르는 관객이다. 연희는 세 번째 관객층을 위한 친절한 가이드에 가깝다. 집안 사정으로 시위를 싫어하던 연희가 대학생들의 기습 시위 현장에서 잘생긴 남학생(강동원)을 만나는 순간의 놀람은 로맨스물의 전형적인 두근거림을 닮았다. 아마도 역사를 이미 알고 있는 관객이라면 그 남학생의 정체를 단번에 짐작할 것이다. 하지만 전혀 모르는 관객 입장에서 바라본다면, 남학생의 정체가 밝혀지고 역사적 사실과 이어지는 순간의 연결고리가 실로 드라마틱하게 작동한다. 그 시대와 아무 접점이 없는 관객마저 뜨거웠던 열기 한가운데로 초대해 단번에 연루자로 만들어버릴 정도다. 그 과정을 거치고 나면 어느새 당신도 연희가 되어 “호헌철폐 독재타도”를 소리 높여 외치게 된다. 사실 우리 모두는 이미 촛불광장에서 비슷한 순간을 체험한 셈이니 그리 멀게 느껴지지도 않는다. 이것이 대중영화의 보편타당한 문법으로 관객 모두를 연루자로 만드는 방식이다.
누아르와 로맨스 등 <1987>이 다채롭게 선보이는 장르간 결합은 당시 역사의 도도한 흐름은 물론 이에 휩쓸려 자신도 모르게 역사가 되었던 사람들이 걸어온 샛길까지 꼼꼼히 되짚는다. 이에 따라 캐릭터의 활용 역시 대략 세 가지 방식으로 나뉜다. 첫 번째는 거리를 두고 가볍게 흘리는 캐릭터다. 하정우 배우가 맡은 최 검사나 설경구 배우가 맡은 운동권의 브레인 김정남 같은 경우 인물의 사연이나 감정에 밀착시키는 대신 한 파트를 담당하는 인물로서 담백하게 다루고 있다. 인지도 있는 배우를 대수롭지 않게 다루는 방식에서 묘한 쾌감과 거리감이 발생하기도 한다. 둘째는 집요하게 파고들어 무겁게 따라가는 캐릭터다. 영화 전반의 뼈대를 담당한 박 처장, 후반부 드라마를 담당하는 연희가 이에 해당한다. 마지막으로 무심한 듯 감춰둔 캐릭터들이 있다. 장르적으로는 나름의 반전이랄 수 있는 인물인 박종철 열사와 이한열 열사가 그들이다. 영화는 후반부 마지막 에피소드 전까지는 이 인물들에 거리를 두며 최대한 정보를 지연시킨다. 엔딩 크레딧 제일 상단에 여진구와 강동원을 따로 배치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아마도 존경과 추모의 의미겠지만 여기엔 적어도 두 가지 효과가 있다. 하나는 끝까지 긴장을 지속시키는 장르적 장치, 나머지 하나는 미루고 미뤄 역사를 재현하는 거리를 유지하고자 하는 의지에의 발현이다. 바로 이것이야말로 앞서 지적한 영화 속 두 가지 상반된 운동에 해당한다. 모두가 뜨거웠던 그해의 열기와 상황을 냉철하게 바라보고자 하는 이성, 온탕과 냉탕, 픽션과 논픽션, 역사의 대로와 샛길, 역사를 재현하는 액션과 리액션.
역사 앞의 액션과 리액션
실화를 극화하는 방식은 극단적으로는 두 가지뿐이다. 하나는 고증을 거쳐 당시의 상황을 재현하는 것이다. 이건 액션에 해당한다. 이런 종류의 영화들은 그 순간을 정교하게 재구성하고 극화하는 데 초점을 맞춘다. 자세히 보여줄수록 당시의 상황에 동참시키는 데 효과적이라는 판단 아래 빽빽한 정보들을 배치시킨다. 반대편에 리액션에 해당하는 영화들이 있다. 이 영화들은 장면과 장면의 틈새에 침묵을 채워넣는다. 해당 장면을 재현하는 대신 이를 바라보는 인물의 얼굴을 보여줌으로써 상황을 미뤄 짐작하게끔 유도한다. 간혹 착각하는 경우가 있는데 이는 과묵하고 절제된 묘사와는 또 다르다. 도리어 상황을 받아들이는 감각, 감정, 표정에 대한 묘사라 하는 편이 적절할 것이다.
가령 <1987>에서 가장 극적인 순간을 꼽으라면 박종철군의 뼛가루를 강가에 뿌리는 장면을 고르겠다. 그에 앞서 박종철군의 삼촌(조우진)이 신원 확인을 위해 조카의 시신을 확인하는 장면이 있다. 카메라는 끔찍한 고문을 받은 박종철의 육신을 직접 비추지 않는다. 대신 이를 목격한 삼촌의 표정을 응시한다. 그 표정은 실로 끔찍하다. 소리조차 목구멍에서 기어 나오지 못할 정도의 오열은 다름 아닌 역사를 바라보는 우리의 표정이다. 관객은 삼촌의 격앙되고 구겨진 표정을 마주한다. 이후 화장장을 빠져나와 첩보작전을 방불케 하는 동선을 거쳐 임진강변에 흩뿌려지는 박종철군의 유골을 따라가는 시퀀스는 정밀한 몽타주로 연결된다. 이 연결은 아름답다. 이상하게 들리겠지만 실제로 그렇다. 허공에 뿌린 뼛가루는 얼어붙은 강 위에 눈발과 함께 맴돈다. 박종철군의 아버지는 얼음을 깨부수며 달려나가 절규한다. “잘 가그래이! 아부지는 아무 할 말이 없대이!” 그렇다. 우리는 이에 대해 할 말이 없다. 침묵의 아우성 혹은 리액션으로 가득 메워진 이 숏은 역사를 대면하는 기묘한 거리감을 발생시킨다. 얼어붙은 강 밑에 뜨겁게 흐르는 물길, 떼어두지만 그래서 더 밀착되는 거리감이라고 해야 할까.
반면 정반대의 숏들도 있다. 스포일러라 상세히 밝힐 수는 없지만, 박종철군을 고문하는 장면과 이한열군이 죽는 장면의 연출에 대해, 이를 두고 효과적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고, 너무 많이 보여주는 불필요한 방식이라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이에 대한 판단은 잠시 미뤄두겠다. 그보다 나는 <1987>이 리액션과 액션을 동시에 한 영화에 담고 있다는 점이 흥미롭다. 서로 다른 장르들을 한 호흡으로 녹여내고 있다는 점이 흥미롭고, 역사의 대로와 샛길을 빈번하게 왔다갔다하는 균형감각이 흥미롭다. 무엇보다 이 모든 불균질한 요소들을 하나로 묶어내는 연출의 힘이 흥미롭다.
장준환 감독은 <지구를 지켜라!>(2003)라는 전무후무한 데뷔작을 통해 독보적인 상상력을 선보인 바 있다. 세 번째 연출작인 <1987>까지 선보인 후 장준환의 스타일이 무엇인지 묻는다면 특정 장면이나 접근 방향이 아니라 그저 ‘밀도’라고 답하고 싶다. 전작인 <화이: 괴물을 삼킨 아이>(2013)가 신화의 압축이었다고 하면 이번 영화는 실화의 압축, 아니 우리가 실화를 대면하는 방식의 압축이다. 장준환은 매 장면 힘을 실어 인물의 상황과 위치, 의미 등을 압축하고 상징화한다. 다만 그 방식이 매우 익숙하고 보편적이다. 가령 박 처장의 얼굴을 거울에 비추어 잡는다든지, 책상 위에 놓인 안경에 걸쳐 인물의 불투명한 실루엣을 잡는 식으로 화면들을 끊임없이 연쇄시킨다. 개별 화면은 특별하지 않지만 그것이 이만큼 농밀하게 축적되는 순간 모든 행간을 이해하지 않아도 육중하게 자리잡는 기운들이 형성된다. 역사를 대하는 전혀 상반된 두개의 운동, 상이한 장르, 수많은 인물 군상을 하나로 묶어내는 건 결국 이 특별하지 않아서 특별한 연출들이다. 장준환의 손끝에서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호흡과 스티븐 스필버그의 포커스를 마주하는 것 같은 기분 좋은 착시.
어쩌면 이 영화는 그저 동화 같은 이야기인지도 모른다. 영화는 그날의 냄새까지 기억하는 사람, 그저 알고 있는 사람, 전혀 모르는 사람을 모두 끌어들여 만족시키고 싶어 하는 것 같다. 동시에 그런건 불가능하다는 걸 스스로도 알고 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설사 불가능한 시도면 어떤가. 1987년 불붙은 민주혁명은 성공적으로 마무리되었나. 아니다. 그제야 출발선에 발을 디딘, 시작이었다. 87년의 기억은 30년을 건너뛰어 촛불로 연결되고 스크린 위에서 겹쳐진다. 그 정도의 낭만은, 승리의 기억을 통한 연대와 공감은 괜찮지 않은가. 우리에겐 아직 80년대의 몽상과 에너지가 필요하다. 재현이되 현재적 시점으로 관객 모두를 그날의 연루자로 만드는 이 영화의 엔딩은 그래서 끝이 아닌 시작이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