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2]
B컷으로 보는 2017 한국영화②
2017-12-27
글 : 김현수
그 현장의 다른 표정을 만나다

<남한산성>

사진 노주한 스틸 작가

인조(박해일)는 신하들이 보는 앞에서 청나라의 칸(김법래) 앞에 무릎을 꿇고 머리를 조아렸다. 노주한 스틸 작가는 당시 현장에 대해 “배우들끼리 감정이 흐트러질까봐 서로 말도 안 하고 황동혁 감독도 말없이 지켜보기만 했을 정도로 긴장감이 감도는 촬영현장이었다”고 말한다. 미술팀의 숨은 노력이 담긴 세트를 포함해서 배우 박해일의 연기가 당시의 치욕적인 역사적 순간을 영화적으로 잘 담아낸 장면이었다. 미술 세트 양옆으로 대신들이 늘어서 있는 모습도 더 넓게 담을 수 있었겠지만 그러지 않았다. 칸 일행이 올라선 미술 세트만 앵글 가득히 들어오도록 찍었다. 노주한 스틸 작가는 “영화의 의미가 한 장면에 담긴 것 같았다. 내가 딱 소화할 수 있는 컷이었다”고.

<싱글라이더>

사진 조원진 스틸 작가

극중 재훈(이병헌)이 아내 수진(공효진)이 머무는 호주의 집을 몰래 찾아가서는 자신 없이도 화목하게 잘 지내고 있는 모습을 훔쳐보는 장면이 있다. 영화에서 배우 이병헌과 공효진이 가장 가깝게 만나는 순간이기도 했다. 시나리오 전개상 늘 떨어져 있어야 했던 두 배우에게는 호흡을 나눌 수 있는 거의 유일한 장면이었던 셈이다. “수진이 설정상 능숙하게 바이올린을 켜는 장면을 찍어야 하는데 생각보다 소리가 잘 나지 않아 당황해했다. 그래서 이병헌씨에게 ‘선배도 좀 해보라’고 권하니 마치 늘 켜온 사람처럼 어색하지 않게 하기에 모두가 깜짝 놀랐다.”

<석조저택 살인사건>

사진 최창훈 스틸 작가

경성의 부자 남도진 역은 그동안 배우 김주혁이 보여주지 못했던 새로운 면모를 보여줄 수 있는 역할이었다. 해방 후 경성이라는 시대적 배경과 함께 거대한 저택에 살며 뭔가 수상한 낌새를 풍기는, 태생적으로 그냥 악역인 인물. 뛰어난 피아노 실력을 지닌 캐릭터라는 설정이라 최창훈 스틸 작가에 따르면, 김주혁은 “남몰래 피아노 연습을 정말 열심히 했”고. 영화에서는 아주 잠깐 스쳐 지나가는 장면이지만 어설프게 보이지 않기 위해 최선을 다했던 것이다. 영화나 예능 프로그램 등에서 익히 봐왔던 그의 모습은 실제로도 “너무 진지하고 차분한 편이라 촬영장 분위기도 조용했다”고 한다. 현장에서 동료 배우들과 날 것의 느낌이 나는 영화 현장에 대해 자주 이야기하곤 했다는 그는 늘 연기에 대해 깊이 고민하는 배우였다고 한다. 피아노 앞에 서서 자신의 연기에 대해 고민하고 있었을 그의 모습이 스틸 작가의 카메라에 잡혔다.

사진 최창훈 스틸 작가

영화에 등장하는 장면을 촬영하던 순간을 찍은 것이 아니다. 김주혁은 영화 촬영현장에 있는 스스로가 반갑다면서, 게다가 이렇게 멋진 의상을 입고 시대극의 주인공이 된 모습이 보기 좋다며 최창훈 작가를 따로 불러 자신을 찍어달라고 요청했다. 최창훈 작가는 “민규동 감독의 <허스토리> 촬영을 이유영씨에 참여하던 도중 사고 소식을 접해 더욱 만감이 교차했다”라며 이 사진을 보내왔다. 그가 우리에게 남긴 마지막 선물 같은 사진이다.

<꿈의 제인>

사진 추경엽 조명감독

올해 많은 관객과 평론가들이 <꿈의 제인>의 제인, 즉 구교환 배우에게 매혹됐다. “감독이자 배우인 구교환은 내 학교 후배다. 현장에서 속옷부터 겉옷까지 여성 의류를 처음 입고 고생했던 모습, 밥도 굶어가면서 살을 빼던 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조명감독으로서 현장 스틸까지 겸했던 추경엽 조명감독은 저예산 독립영화의 특성에 발맞춰 역할 구분 없이 본인 휴대전화로 현장을 기록했다. 이 공연 장면은 영화에도 실제 등장하는 차세빈 배우가 운영하는 바에서 촬영했다. 세트가 아닌 진짜 공간에서 찍길 원했던 조현훈 감독과 추경엽 조명감독은 “상실감에서 오는 슬픔이 느껴지는 현장이었다”고 전한다. 추경엽 조명감독에게도 이 영화가 유독 특별한 의미가 있다. “최근까지도 지인들이 개인적으로 연락해와 감상평을 들려주곤 한다. 영화제에서 상도 받고 뒤풀이 자리를 가졌는데 감독이 아닌 배우들이 준비해서 인상적이었다. 이 자리를 빌려 고맙다는 말을 전하고 싶다.”

<여배우는 오늘도>

사진 이상훈 제작부
사진 이상훈 제작부

촬영현장의 ‘실상’을 담은 B컷을 요청했더니 문소리 감독이 직접 2막의 한 장면이었던 ‘술이라도 줄여요’ 신을 촬영할 당시의 모습이 담긴 컷을 골라서 보내왔다. “문소리 감독이 장준환 배우에게 연기 디렉션을 주는 아주 희귀한 상황”이라면서. 당시 촬영장 분위기에 대해 문소리 감독은 “배우의 연기에 매우 만족해하며 오케이를 외쳤는데, 장준환 배우가 계속 한번만 더 가자고 연기 욕심을 부리는 것을 스탭들이 다 같이 말렸다”고 전한다. 영화제에서 처음 단편영화가 공개되던 당시 인터뷰에서 문소리 감독은 “촬영 전날까지도 출연을 고민하기에 잘 찍을 수 있을지 속으로 걱정했다. 그런데 막상 촬영장에 가보니 장준환 배우가 등만 나오는데도 정말 열심히 메이크업을 받고 있어서 놀랐다”는 감독만 느낄 수 있는 고충을 들려줬던 기억이 난다. 따로 스틸 작가를 고용하기 어려웠던 현장이라 이날 촬영은 제작부 스탭이자 타이틀 영상까지 만든 이상훈씨가 맡았다.

<불한당: 나쁜 놈들의 세상>

사진 노주한 스틸 작가

그의 총구는 어디로 향하고 있는 걸까. 올해 수많은 ‘불한당원’들의 심장을 저격한 배우 설경구, 아니 한재호가 자신의 정체를 드러내는 마지막 장면을 찍던 순간, 노주한 작가는 서둘러 셔터를 눌렀다. “연기에 관해서는 워낙 베테랑이라 촬영장이 추웠던 것 빼고는 다 좋았던” 이 장면에서 가장 인상 깊었던 것은 설경구가 쥔 권총이 향하고 있는 위치였다. 예를 들면 “상대의 머리를 겨눌지, 심장을 겨눌지에 따라 느껴지는 미묘한 뉘앙스를 모두 잡아내려고 노력했던 순간”이었던 것이다. 오래전 <공공의 적>에서 처음 만나 오랫동안 그와 함께했던 노 작가 역시 “왜 그동안 배우 설경구에게서 이런 매력을 끌어내지 못 했을까?”라는 의문을 품었을 정도로 설경구의 새로운 매력을 느낄 수 있었던 촬영현장이었다고. “현장에서 찍은 사진을 계속 보여줬다. 팔뚝이 두텁게 나오면 아주 좋아했다. (웃음)” 이 현장 컷에 담긴 또 하나의 숨겨진 사실. 저 날카로운 턱선, 그러니까 한재호의 옆얼굴 라인을 만들어준 것은 숱하게 받았던 경락 덕분이란다.

<장산범>

사진 민성애 스틸 작가

올해의 B컷 중 가장 충격적인(?) 반전이다. <장산범>을 보고 누군가 무섭다고 느낀다면 귀신 들린 분장을 한 배우 이준혁이 거울 뒤에서 튀어나오는 화장실 장면 때문일 것 같다. 그런데 사진에 찍힌 그의 모습은 무서움과는 정반대다. 한편으로는 오랜 시간을 공들여야 가능한 특수분장을 하고도 불편한 기색 없이 카메라를 향해 포즈를 취하는 그의 모습에서 평소 성격이 그대로 묻어나는 것 같기도 하다. 아니나 다를까, “평소 자신이 찍는 것도 좋아하고 찍히는 것도 좋아하는터라 카메라를 갖다대면 호의적이다. 언제나 현장 분위기를 띄우려고 노력하는 개구쟁이 같은 스타일이라 이날도 어김없이 장난을 많이 쳤다”라는 민성애 스틸 작가의 말이 그 사실을 증명한다. 이준혁은 어떤 배우냐고 물었더니 민성애 작가에게서 “늘 웃음을 잃지 않는 배우”라는 대답이 반사적으로 튀어나온다. <늑대소년>과 <미스터 고>의 동물 연기를 거치면서 이제는 한국의 앤디 서키스라 불리는 그의 귀신 들린 깜찍한 포즈는 당시 현장 스탭뿐만 아니라 기사를 준비하는 기자들에게도 훈훈한 웃음을 선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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