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패터슨>의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패터슨>의 패터슨(애덤 드라이버)이 통근하는 시인이라면 아내 로라(골쉬프테 파라하디)는 재택 종합예술가다. 특히 로라의 열정은 페인팅에 집중된다. 방 벽부터 도시락에 넣는 귤껍질까지 그의 캔버스니 말 다 했다. 흑백을 편애하는 로라의 과감한 화풍은, 색과 패턴이 대범한 핀란드의 디자인 브랜드 마리메코를 연상시키는가 하면 짐 자무시 감독의 흑백영화 사랑이 변형된 결과 같기도 하다. 실존 아티스트 가운데 로라에게 영감을 줬을 법한 인물은 장 뒤뷔페. ‘아르 브뤼’ (Art Brut)의 옹호자였던 뒤뷔페는 훈련받은 프로 예술가보다 어린아이나 정신질환을 가진 사람 등 소박한 정신이 자발적으로 그린 그림이 위대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로라가 그린 반려견 마빈의 초상 중 한점이 유난히 뒤뷔페풍이다. 뒤뷔페의 이름은 영화 말미에 언급도 된다. 아마추어 예술을 예찬하는 <패터슨>과 어울리는 선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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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일기에서 반복되는 노동 안에 존재할 수 있는 예술적 영감에 대해 말했지만, 모든 노동자의 조건이 창작에 우호적일 리는 없다. <패터슨>이 선택한 노선버스 기사라는 직업은 그런 면에서 시인에게 최적으로 보인다. 일단 패터슨의 일과는 틀려서는 안 되는 시간표에 맞춰져 있다. 단순한 출근 복장은 전날 밤에 개켜져 있다. 몇시에 어느 장소로 가야 할지, 무엇을 입을지를 고심할 시간이 절약된다. 패터슨은 생활의 운영에서 이니셔티브를 쥐지 않는다. 집에서는 가족인 아내와 반려견이, 그가 무엇을 언제 먹고 몇시에 산책 나갈지를 정해주고 일터에서는 말하기보다 듣는다. 자동항법으로 일상이 돌아가는 와중에 패터슨의 마음은 시의 씨앗을 찾아 수집하고 싹을 틔운다. 직장까지 도보로 출근한다는 점도 도움이 된다. 버스 차고지와 집 사이를 터벅터벅 걷는 동안, 버스를 운행하는 동안 패터슨은 세상의 흐름을 조용히 내면에 들인다. 휴대전화도 없고 MP3도 듣지 않는 패터슨의 감각은 세계와 매개 없이 직접 접촉한다. 시의 창작은 그가 비밀 공책에 펜을 놀리는 시간에만 이루어지지 않는다. 영화의 제 1연인 월요일 아침 일어나서 시야에 잠든 아내의 모습을 담을 때, 시리얼을 먹다 말고 성냥갑의 디자인을 물끄러미 들여다볼 때부터 시는 지어지기 시작한다. 그러고 보면, 투명한 아크릴판으로 부분적으로만 승객들과 분리된 버스 기사의 자리도 적당하다. 사람들은 그를 없는 존재처럼 여기며 의식하지 않고 대화하지만 패터슨은 리액션의 강박 없이 귀기울일 수 있다. 매일 귀로 흘러드는 승객들의 수다에 패터슨은 흠칫 놀라기도 하고 염려도 했다가 미소 짓는다. 애덤 드라이버가 액션이 아니라 온전히 리액션을 통해 패터슨이라는 인물을 구현했다는 짐 자무시 감독의 칭찬을 실감하게 만드는 순간들이 버스 안 장면에 있다. 저녁 산책길에 겪은 소동을 이튿날 아내가 맥주 향을 맡으며 물었을 때에야 주섬주섬 털어놓는 장면은, 그가 아내를 지극히 사랑하면서도 자기가 들어앉아 있는 비눗방울을 터뜨리지 않는 남자임을 암시한다. 요컨대 패터슨은 사람들로부터의 영향에 자기를 열어두면서도 내밀한 세계를 지키는 예술가다.
거리에서 버스를 몰면서 패터슨이 엿듣는 말 가운데에는 정치적 급진주의에 대한 젊은 남녀의 대화가 있다. 그들은 미국 최초의 계획도시로서 1830년대에 이미 노동자들이 파업투쟁을 경험한 패터슨시의 역사를 이야기한다. 웨스 앤더슨 감독의 <문라이즈 킹덤>에서 사랑에 빠진 샘과 수지로 분했던 재러드 길먼과 카라 헤이워드가 부쩍 성장한 모습으로 승객 역을 연기해서 반가운 탄성을 자아낸다. 이 카메오는 자연스럽게, 비슷한 ‘힙스터’로 통하고 미국 인디영화의 대명사로 간주되는 웨스 앤더슨과 짐 자무시의 비교로 우리의 생각을 이끌어간다. 두 작가는 공히 자기만의 소우주를 영화 속에 창조하는 데 발군인데 웨스 앤더슨의 영화가 부르주아적인 정제된 미학으로 세공된 세계라면, 짐 자무시의 그것은 블루칼라 계층에 속하는 사람들이 우연히 만났다 헤어지는 거리의 삶에 친화적이다. 어쨌거나 고독한 예술가의 초상이라는 점에서 <패터슨>은 같은 테마로 두편의 성공작을 내놓은 신예 데이미언 셔젤 감독의 영화도 나란히 돌아보도록 부추긴다. <위플래쉬>와 <라라랜드>에서 주인공인 남성 뮤지션들에게 사랑과 우정은 최고 경지의 예술과 양립하기 어렵다. <위플래쉬>와 <라라랜드>에는 뛰어난 재능을 타고난 개인이 철저한 고독 속에 자기를 가두고 삶의 나머지를 얼마간 포기해야 결실을 얻을 수 있다는 전제가 잠재적으로 깔려 있다. 그리고 영화 속 성취는 세상의 인정으로 완수된다. 반면 짐 자무시의 시인 패터슨은 자기를 둘러싼 환경과 이웃 사람들로부터 예술의 재료와 형상화의 영감을 구한다. 그는 시를 인쇄하는 일조차 주저한다. 명성과 불멸은 패터슨이 예술을 통해 얻는 희열과 멀리 떨어져있다. 자무시에게 예술가의 고독은 훨씬 개방적이고 겸허한 무엇이다. 동시에 장세니즘 수도자가 추구할 법한 금욕과 정진에 가까운, 오히려 한층 완고한 예술관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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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저지 패터슨시는 수많은 미국 소도시 가운데 임의적으로 선택된 배경이 아니라 영화 내용과 불가분의 관계를 맺는다. 우선 짐 자무시는 패터슨 출신의 윌리엄 카를로스 윌리엄스가 쓴 5권 길이의 서사시 <패터슨>의 도입부에서 영화를 착안했다고 밝혔다. 윌리엄스의 시에는 퍼세익강(Passaic River)의 폭포 옆 바위에서 사람의 형상을 발견하는 표현이 있는데 여기서 감독은 도시와 같은 이름을 가진 남자를 떠올렸다고 한다. 그리고 소아과, 산부인과 의사로서 평생 3천명의 아기를 받고 서민들을 치료하며 시 쓰기를 멈추지 않았던 윌리엄스처럼 일상과 예술을 병행하는 시인 캐릭터를 만들어냈다. 윌리엄스와 그를 잇는 뉴욕 스쿨 시인들의 이상 역시 패터슨처럼 주변의 평범한 사물에 대한 감흥을 묘사하고, 불특정 다수가 아닌 가까운 특정인에게 말을 걸 듯 쓰는 시였다고 한다. 비중 있는 백인 캐릭터가 주인공을 포함해 두세명에 그치는 인물 구성도, 중동계 아프리카계 인구가 미국에서도 손꼽히게 많은 패터슨시의 실제를 반영하고 있다(물론 짐 자무시의 영화는 항상 다인종 캐릭터로 채워지긴 한다).
역사와 현실을 배제하지 않은 만큼, 영화 속 패터슨의 삶도 무풍지대일 수는 없다. 실제 패터슨시는 경기 악화로 범죄 및 사건사고가 자주 신문 헤드라인에 오르내리는 도시가 됐다고 한다. 짐 자무시는 리얼리티를 제거하지는 않되 어디까지나 영화의 중심을 인물 내면에 두고 현실의 위협은 노이즈 수준으로 제어한다. 패터슨의 생활에도 위험이 있지만 그것들은 물새처럼 수면에 파문만 남기고 스쳐간다. 예컨대 힙합풍으로 차려입은 청년들이 밤길에 차를 세우고 개가 납치될 가능성에 대해 떠드는 장면은 긴장을 야기하지만 폭력으로 이어지지 않는다. 운전하던 버스가 고장을 일으켰을 때 휴대전화를 쓰지 않는다는 패터슨의 방침은 잠깐 도전받는다. 같은 날 저녁 패터슨이 매일 들르는 동네 바에서는 총을 든 청년이 소동을 일으키지만 흉기는 장난감으로 판명된다. 이때 패터슨은 반사적으로 청년을 제압하고 영웅다움을 칭찬받는데 본인이 더 당황한 기색이다. 침실에 놓여 있던 군복 입은 사진이 관객에게 상기되면서 시인의 삶에 있었던 이질적 시기를 짐작하게 만드는 순간이기도 하다. 그러나 거기까지가 전부다. <패터슨>은 무엇보다 현실의 잦은 바람 속에서 자기 안의 고요를 확보하는 사람의 이야기이고, 이상하고 슬픈 세상을 견디게 만드는 언어가 시를 포함한 예술이라고 믿는 영화이기 때문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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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금별 전투
<스타워즈: 라스트 제다이>의 라이언 존슨 감독이 연출한 액션 신들은 세부적 동선보다 전경이 인상적이다. 영화의 마지막 전투는 오래전 반군의 은신처였던 은하계 외곽의 광산별(crait)에서 벌어진다. 희게 반짝이는 소금으로 덮인 표면은 반군 전투기들이 발진하자 긁혀 붉은 토양- 혹은 변색된 소금- 을 드러낸다. 이 핏빛 평행선은 퍼스트 오더에 비해 절대적으로 전력이 열세인 저항군의 죽음을 불사한 결의를 표현한다. <고질라>(2014)의 군인들이 공중에서 낙하하는 롱숏을 수놓은 붉은 연기의 수직선들에 비할 만하다. 하지만 라이언 존슨 감독의 직접적 영감은 구로사와 아키라 감독의 후기작 <란>(1985)으로 알려졌다. 양 진영의 기병대가 맞붙을 때 붉고 노란 깃발과 병장기가 색의 충돌을 빚는 장면이다. 조지 루카스 감독은 첫 <스타워즈>(1977)에서 구로사와 아키라 감독의 <숨은 요새의 세 악인>(1958)을 노골적으로 인용하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