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비평]
프랑수아 오종이 <두 개의 사랑>에서 보여주는 이미지의 변주
2018-01-04
글 : 이지현 (영화평론가)
아름다움의 극치를 보았다

살바도르 달리가 1960년에 <혼돈과 창조>라는 제목의 비디오영화를 찍을 당시에, 달리는 자신의 친구였던 자크 라캉으로부터 편집증에 관한 정보를 얻었다고 한다. 당시 그가 정리했던 편집증적 비판방식(paranoiac-critical method)은 초현실주의 창작의 발판이 되는데, <혼돈과 창조>에서도 편집증적 비판방식은 사용된다. 영화에서 달리는 스스로가 그리는 창조와 혼돈의 가운데에 다름 아닌 ‘외향적 유사함’이 자리하고 있음을 지적한다. 이때 그가 사용하는 키워드는 다름 아닌 ‘입’의 형태다. 자신의 콧수염 붙은 입매가 주춧돌이 되어서, 이후 등장하는 몬드리안의 작품이 지닌 자의적인 실체가 모습을 드러낸다. 프랑수아 오종의 신작 <두 개의 사랑>(2017)의 시작부에도 흡사 달리의 입모양과 같은 자유 연상의 모티브가 등장한다. 언뜻 보아 이가 달린 입술의 형태를 한 신체의 일부분이 (달리가 사용한 것과 동일한 방식의) 매치컷을 통해 여성의 ‘눈동자’와 연결되는데, 이 첫 장면의 놀라운 발상은 영화를 보는 내내 일종의 무의식이 되어 관객의 머릿속을 파고든다. 장 뤽 고다르에서 클로드 샤브롤까지, 전작을 통해 시네필로서의 시각적 인용을 강조했던 오종의 특기가 이번 작품에서 정점을 찍는 듯 강렬하게 발휘된다.

왜 쌍둥이인가

유독 반복이 많은 영화였다. 그리고 그 반복이 지루해질 즈음 치닫는 강박의 폭발적인 변주가 아름다운 작품이었다. 모든 신이 구속적이고 (특히 오종에게 있어서만큼은) 고전적이었던 <프란츠>(2016)에서 돌아 나와서, 프랑수아 오종은 다시 페드로 알모도바르의 방식으로 관객 앞에 선다. 영화 <두 개의 사랑>을 한마디로 설명하면 장르적 관습에서 <스위밍 풀>(2003)의 경향으로 되돌아간 영화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대체 범인은 누구인가?” 하는 범죄소설의 모티브가 또다시 그의 플롯을 지배한다. 하지만 실제로 영화를 본 거의 모든 관객은 풀리지 않는 의문에 시달린다. 남자는 정말 쌍둥이인가 아니면 한 인물의 두 가지 모습이 분리되어 나타난 것인가? 고양이의 역할은 무엇이며, 두 종류의 다른 고양이는 왜 영화에 등장하는가? 또한 옆집의 기묘한 아주머니는 누구이며, 그녀의 딸은 진짜로 존재하는가? 오종이 선호하던 패스티시의 요소로 설명하면 이 요소들은 각각 브라이언 드 팔마의 <자매들>(1973) 속 쌍둥이 캐릭터, 자크 투르뇌르 <캣 피플>(1942) 속의 에로틱한 동물 혹은 로만 폴란스키의 <악마의 씨>(1968)에 등장하는 이웃집 사람의 방식으로 대치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언제나 그렇듯 오종은 자신의 범죄 스릴러를 결코 전형적인 방식으로 마무리하지 않는다. 중요한 듯 그려졌던 후더닛의 덫이 실제로는 중요하지 않다는 점을 부각시키며 마무리할 뿐이다. 예술적 악덕을 위해 투신하는 이 노련한 창작자에게 장르적인 요소란 영화의 일부일 뿐 전체를 지배하는 법칙이 될 수는 없다. 그렇지만 바로 이 시점에서 우리는 ‘왜 이토록 정교하게’ 그가 관객을 유혹하는지, 그 발상의 출발점에 관해 질문을 던져야 한다. 프랑수아 오종이 이토록 치밀하게 반복에 매달리는 이유를 말이다.

‘더블’(double)이란 제목이 설명하듯 이 영화의 미장센은 건축적으로 대칭되는 반복의 형식에 얽매여 있다. <두 개의 사랑> 속 인물들은 빈번하게 거울에 반사되며, 실제로도 동일한 외향을 지닌 인물들이 등장하기도 한다. 쌍둥이뿐만이 아니라 기하학적 무늬로 점철된 계단이나 미술관의 추상적 문양이 영화의 텅 빈 공간을 메우는 일도 잦다. 이러한 대칭의 형태가 이어지던 중 치료된 듯 보였던 주인공 클로에(마틴 백트)의 히스테리성 복통이 재발한다. 물리적인 검사를 거쳐 의사들은 정신적인 문제라고 결론짓지만 심리치료는 이내 한계를 드러낸다. 그와 동시에 그녀가 직업적으로 지키는 미술관의 작품들도 동일한 맥락으로, 클로에의 내면적인 상황을 따라 점차 강렬한 그로테스크의 색채로 바뀌어간다. 애초에 심미적으로 보였던 미술 작품들은 후반부로 향할수록 더 난해한 형태를 취하는데 아마도 이 과정은 주인공의 심리상태와 무관하지 않은 것 같다. 미술관 프레임 속의 클로에는 자신이 지키는 작품의 괴물적인 성향을 유기적으로 자연스럽게 흡수한다. 피폐해지는 정신 공황의 상황과 더불어 쌍둥이에 대한 이미지 역시 동일하게 더욱 나빠진다. 그리고 이 모든 악순환에 가속도가 붙는다. 후반부로 갈수록 주인공은 점점 더 극심한 공포에 빠져든다. 결론에서 드러나듯 그녀의 트라우마는 어머니의 뱃속에서 시작된 것이다. 자신이 알지 못하는 사이에 내부로 침투한 무언가가 그녀로 하여금 ‘유니크한 사랑’을 갈망하게 만든다. 이처럼 모든 원인이 그녀의 내부에 있었다는 점이 드러나면서, 과연 왜 ‘쌍둥이’가 필요했는지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된다.

파라노이아와 페티시즘의 영화

영화가 끝난 후 극장을 나서면서까지 나는 끝내 폴(제레미 레니에)의 쌍둥이 형제로서 루이(제레미 레니에)의 실제가 어디까지 진짜 세계에 속한 것인지 단정짓지 못했다. 대신 작품에서 주인공의 시선을 통해 발생되는 모든 형상들의 공통점에 대해 생각하려 했다. 돌이켜보면 클로에가 쌍둥이의 존재를 알게 된 그 순간에, 금단의 열매를 발견한 듯 모든 혼돈은 시작되었다. 자신을 치유하는 남성의 실체가 실은 쌍둥이였다는 점이 드러나자 그녀 속의 불안은 폭발한다. 버스를 타고 지나다 우연히 ‘눈’으로 발견한 동생의 존재를 통해, 그녀는 낙원에서 쫓겨난 이브의 신세로 전락한다. 금기를 깨트리고자 하는 불안감도 이때부터 형성된다. 쌍둥이의 등장 이후 거의 모든 장면에서 폴이 노력해서 이룩한 (심리치료를 위한) 팔루스의 형태가 덩달아 부서진다는 점은 흥미롭다. 영화 초반부에 클로에와 폴이 동거를 시작했던 ‘고층 아파트’는 끝내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서 과감하게 깨어지고 만다. 공간 역시 예외가 아니다. 영화 속 거의 모든 상황이 형태적으로 대치된다. 외향적 유사성을 가진 오브제의 나열은 행동뿐 아니라 공간까지도 영화의 모든 것을 지배한다. 달리가 입의 형상을 통해 설명했던 것처럼 오종의 이번 영화는 눈의 형상을 통해 ‘깨달음’의 만족에 집중하고 있다. 평범한 현실세계가 아닌 (편집증적 비판방식에 따른) 망상이 중심이 된 세계의 재정리 과정이다. 그런 맥락에서 영화 속 타이틀 시퀀스의 매치컷은 상징적 팔루스의 완성을 의미하는 ‘의학기술’의 시각화라 설명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여전히 왜 하필 ‘눈’인가에 대해서는 의문이 든다. 오이디푸스 신화를 통해 알려진 바와 같이 눈의 상징은 ‘앎’과 깊이 연관돼 있다. 아마도 오종의 영화는 오이디푸스의 깨달음을 차용하려 했던 것 같다. 그런 의미에서 <두 개의 사랑>은 파라노이아(편집증)와 페티시즘의 영화라 말할 수 있다. 고통의 원리로서 쾌락적 앎(知)에 대해 이 작품은 진지하게 성찰한다. 대부분의 창작자들이 타협하는 처절한 혼돈의 과정에서도 오종은 자신의 목적을 끝까지 밀어붙이는 괴력을 발휘해 보인다. 그 과정을 지켜보는 것은 혼란스럽지만 동시에 통쾌하기도 하다.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이어지는 정교하고 사실적인 반복을 거쳐, 오종은 자신의 작품 전체를 왜곡되게 만드는 데 성공한다. 어쩌면 클로에의 치료를 도왔던 완벽한 심리치료사 폴의 의중을, 영화의 연출자는 공간을 넘어 미술과 캐릭터, 상상의 가시적 장치를 통해 드러내려 했던 것 같다. 과거 피에르 파올로 파졸리니의 영화들이 그러했듯, 아름다움의 역사에서 추(醜)를 향한 미학의 이해는 여전히 불안감을 동반한다. 하지만 이토록 개인적이고 진보적인 작품을 현재의 극장에서 만나는 일은 더없이 기쁘다. 궤적과 흔적의 삭제가 부르는 유혹, 그야말로 현대적인 아름다움의 극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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