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 만났다. 류승룡과 심은경은 9년 전 <불신지옥>(2009)에서의 인연을 시작으로 <퀴즈왕>(2010), <광해, 왕이 된 남자>(2012)에서 만났고 <서울역>에서는 함께 목소리 출연을 하기도 했다. 연상호 감독의 <염력>에 이르러서는 못난 아빠와 억척같은 딸의 정을 나누게 됐다. 상상력이 가미된 SF 소재의 염력, 즉 초능력을 다루고 있지만 지극히 현실적인 이야기를 해보고 싶었던 연상호 감독은 심은경이 <부산행>에서 깜짝출연을 할 때 이미 <염력>의 젊은 창업가 신루미라는 캐릭터에 관한 구상을 처음 그녀에게 들려줬다. 당시엔 구두계약만 맺은 상태였는데, 시나리오를 펼쳐보니 “멋있고 화려한 영화가 아니라 투박한 액션과 현실적인 주제를 담고 있는 이야기가 시각적으로 어떻게 구현될지 상상하기 힘든 작품”이었다고.
그래서 특히 프리 프로덕션 단계에서 마음고생을 많이 했다. 반면 류승룡은 상대역이 심은경이라는 말에 일단 안심했다. “티격태격하는 부녀관계는 처음이지만 경험 많은 배우이기 때문에 마음이 편했다.” 캐스팅 자체로 어느 정도 예상은 했겠지만 두 사람이 연기할 아빠 석헌과 딸 루미는 그리 돈독한 관계가 아니다. 루미는 아빠 없이 오랫동안 엄마를 의지하며 살았고 나름 요식업계에서 자리 잡아가는 젊은 창업가였지만 힘겹게 이뤄왔던 것들이 한순간에 물거품이 되어버린다. 가족도 버리고 홀로 살아가던 석헌은 어느 날 갑자기 자신에게 생겨버린 어떤 변화 때문에 당황해하지만 그 순간에 딸을 떠올린다. 류승룡은 석헌을 “주변에서 만날 수 있는 철없는 아빠, 딸을 통해서 뒤늦게 자기반성을 하고 그러면서 성장하게 되는 아빠”라고 생각하며 연기에 임했다. 외형적으로는 “평소 몸 관리를 하지 않고 사는, 이를테면 연상호 감독 같은 신체로 준비했다. (웃음)” 심은경은 루미를 표현하기에 앞서 “지금껏 연기해왔던 캐릭터와는 조금 다른 톤을 보여줄 수 있는” 역할을 고민했고 지난 어떤 영화에서보다 장르가 아닌 현실적인 상황이 먼저 다가오는 차분한 연기를 보여주기 위해 고심했다. 연상호 감독은 두 사람에게 일본 애니메이션 <아키라>를 토대로 한 블랙코미디에 일상적인 이야기가 가미된 연출을 해보고 싶다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대런 애로노프스키 감독의 <더 레슬러>에 등장하는 부녀관계, 혹은 <스포트라이트>의 마크 러팔로가 연기했던 사실적인 연기 톤을 참고 삼아 보여주곤 했다. “어떻게 하면 이 세상에 있을 법한 평범하고 다를 바 없는 인물들로 그려낼 것인지”에 대해 배우와 감독의 생각하는 바가 일치했다.
거기에 더해 류승룡과 심은경은 캐릭터의 관계 해석뿐만 아니라 또 하나의 어려운 숙제를 해결해야 했다. 먼저 류승룡은 어느 날 갑자기 염력이 생기는 석헌을 연기하기 위해 촬영현장에서 수많은 와이어에 몸을 실어야 했다. 어쩔 수 없이 CG의 도움을 받아야 하는 장면 외에 “아날로그 액션을 위해 직접 몸을 날린” 장면이 상당히 많다. 게다가 <부산행>에서 좀비의 움직임을 만들어냈던 안무가 전영이 창조해낸 염력 동작도 숙지해야 했다. “전영씨가 오랜 고심 끝에 준비해온 걸 내가 열심히 따라하면 자꾸 어색해 보이더라. 그런데 잘 안 되는 그 모습 자체가 오히려 석헌다웠다. (웃음)” 액션에 있어서는 일반인인 루미 역시 석헌 못지않은 거친 장면을 소화해야 했는데 “다른 어떤 캐릭터보다 더 주체적이면서 몸이 먼저 움직이는” 성격이기에 의외로 상당한 액션을 선보인다는 것이 심은경의 설명이다. 루미가 정성껏 일궈놓은 가게가 강제철거당하는 장면 등에서 루미와 심은경이 만들어내는 거친 액션을 보게 될 것 같다. “걱정부터 앞서면 모니터에 그 모습이 그대로 담기더라. 그런데 연상호 감독님은 워낙 짜인 콘티 안에서 연기할 수 있게 만들어주는 분이라 사실적으로 싸우는 장면 등에서 과감하게 와이어 없이 할리우드 액션을 펼치는 장면도 찍을 수 있었다. (웃음)”
우리가 절대 겪을 수 없는 상상의 소재인 염력을 가지고 누구든, 언제든 겪을 수 있는 지금 이 사회의 현실 문제를 이야기하고자 하는 연상호 감독의 <염력>에서 석헌과 루미, 류승룡과 심은경이 만들어 낼 기발한 감동의 색깔은 뭘까. 무엇이 됐든 상상한 그 이상을 보여줄 거라는 기대를 품게 하는 조합임엔 틀림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