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파트 개발과 그로 인한 지형의 변화. 중산층의 욕망이 잠재된 잠실이라는 거대 지역 한편에서 (시험을 앞둔 고시원과 도서관의) 청춘들은 꿈틀거리며 ‘누에’처럼 살아가고 있었다. 언젠가 바라던 바를 이루어 화려한 ‘나비’가 되기를 꿈꾸는 그들 곁에서 유일하게 손을 내밀어주는 사람은 서로 거울처럼 같은 고민을 비치는 단짝들뿐이었다. 이완민 감독의 <누에치던 방>은 그때의 소중했던 친구들에 관한 이야기다. 어쩔 수 없는 시간의 흐름과 급박한 현실 속에서 어쩌면 우리 모두 헤어진 채 잊고 산 존재들일 수도 있다. 그러나 이완민 감독은 심호흡을 하고 그 친구들을 현재로 소환해낸다. 제각각 다른 이유로 튀틀린 관계를 정리해보고자 말을 건다. 마치 불쑥불쑥 떠오르는 기억처럼 영화는 정렬되지 않은 채 과거와 현재를 부지런히 오가는데 그 행보를 따라가는 동안에 어떤 깊은 슬픔이 한꺼번에 밀려온다. 아, 내게 한때는 무엇이든 나누고, 그렇게 평생을 함께할 것 같던 친구들이 있었지! 하는 그 깨달음.
근 10년을 매달린 고시에 낙방한 채미희(이상희)는 남자친구 오두민(이선호)에게 “너 원래 이런 사람 아니었잖아”라는 소리를 듣고 자신을 돌아본다. 한때 문화를 좋아하고 감성이 풍부했던 자신이 스스로 안에 가두어진 채 피폐해져버린 이유를 찾아 나서는데, 그때 25년 전 자살한 고등학생 김유영과 똑 닮은 학생(김새벽이 1인2역을 연기한다)과의 우연한 만남이 과거를 여행하는 단서가 될 ‘문’을 제공한다. 그렇게 그 학생을 쫓아간 미희에게 과거 유영의 단짝이었던 조성숙(홍승이)은 미희가 잃어버린 소중한 것을 찾아 나설 문을 흔쾌히 열어준다. 유영과 미희의 고민은 어쩌면 같은 농도일지 모른다. 이들은 다른 시대의 같은 인물처럼 보이기도 한다. 혼재된 시간 속, 미희를 통해 성숙과 익주(임형국), 또 두민과 성숙도 서로 새로운 관계를 형성해나간다. 엉킨 실타래로 시작해, 이 관계 맺음은 놀랍게도 실타래가 자연스럽게 풀어져나가는 결말로 조금씩 전진한다. 잔뜩 지친 미희의 발걸음이 처음에는 한 걸음 움직이기도 힘들 만큼 무거워 보이지만, 현실과 환상이 교차한 이후 다시 만난 현재는 그래도 조금은 희망적이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상실의 시대>의 배경을 잠실로 옮겨놓은 듯한 허우적대는 몽환 속에서 짙었던 숲의 안개가 걷히는 기분이 든다.
거꾸로 뒤집으면 ‘희미’라고 해서 미희로, 유영하는 듯한 이미지를 주고자 ‘유영’으로, 각각 의미를 두고 감독이 지었다는 캐릭터의 이름을 한명씩 자꾸 소리내어 불러본다. 어쩌면 오래전에 운동장에서 무릎베개를 하고 함께 온갖 이야기를 나누었던 친구였지만, 지금은 기억 한켠으로 밀쳐둔 내 친구들의 이름이 아마 미희이자 유영이자 성숙이 아닐까. 이완민 감독과 함께, 영화에서 각각 채미희와 이유영을 연기한 이상희, 김새벽 배우의 이야기를 들어보았다. 두 배우는 독립영화계에서 단짝으로 알려져 있지만, 둘의 관계를 처음 맺어준 건 2년 전 <누에치던 방> 촬영이었다고 한다.
-시간의 흐름에 따른 관계의 단절은 흔한 경험일 수 있지만, <누에치던 방> 주인공들이 지나온 25년 세월에는 잊을 수 없는, 끌어안고 가야 하는 ‘죽음’이 주변을 뱅글뱅글 맴돌고 있다. 혹 어떤 특정한 경험에서 출발한 이야기가 아닐까 하는 생각을 떨칠 수 없었다.
=이완민_ 30대가 되니 어릴 때 받은 편지 같은 것을 버려야 하나, 가지고 있어야 하나 고민되는 때가 오더라. 어릴 때 친구 중 지금까지 관계를 유지하는 친구도 있지만 잃어버린 친구들이 더 많다. 현대인은 나이 먹고 바쁘게 살아가다보면 각자도생하다가 어떤 소중한 것을 잃어버리는 구조에 놓여 있지 않을까. 이런 생각이 이 영화의 시작이었다. 무엇보다 고1 때 기억이 크게 차지했다. 어느 날 한 친구가 잠깐 이야기 좀 하자고 했는데 무엇 때문엔가 바빠서 다음에 하자고 했다. 그런데 일주일 후에 그 친구가 자살을 했다. 그때 상황이 아직도 내 머릿속에 강렬한 이미지로 남아 있다. 영구차가 운동장을 돌아 나가고, 같은 반 아이들이 창가에 몰려 그 모습을 보고 있었다. 그 순간이 기억의 창고에 처박혀 있다가 시간이 흘러 의식으로 떠오르면서 마주하게 된 거다. 내 이야기에서 시작할 수밖에 없는 프로젝트였다. 어쩌면 그 기억은 당연히 흐르는 시간 속에 놓아주고 현재 새로 만나는 사람에 집중해야 하는 게 아닐까. 생의 주기에서 한번쯤 맞닥뜨리게 되는 문제지만, 확실한 답을 구하기 힘든 문제를 들여다보고 싶었다.
=이상희_ 나도 그렇게 단절된 친구가 있다. 사소한 일로 관계가 소원해졌고, 난 그 관계를 회복하려고 미희처럼 노력했지만 결국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감독님과 이야기를 하다보니 나한테도 그 단절이 상처로 남아 있더라. 관계가 이렇게 망가질 때까지 그냥 두었고, 그 실수로 친구를 잃어버렸다는 사실이 아픔으로 남아 있었던 거다. 이 영화를 하면서 어쩌면 상대의 마음을 헤아려보고, 또 내 아픔도 어느 정도 치유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가 컸다.
=김새벽_ 마치 영화에서 미희와 유영이 지하철에서 우연히 만나는 것처럼 나도 <누에치던 방>을 하기 전에 감독님과 지하철에서 만난 적이 있다. 최근 개봉한 <파란입이 달린 얼굴>(2015)의 김수정 감독님을 통해 서로 얼굴 정도만 알던 사이였는데, 그렇게 우연히 만난 거다. 이후 페이스북 메시지로 만나고 싶다는 연락을 받았다. 짧은 글을 봐도 그 사람이 느껴지지 않나. 그 짧은 메시지에 감독님에게 궁금증이 생겼다. 뭣보다 남긴 감독님 전화번호 뒷자리가 내 번호랑 같았다. 알고보니 나처럼 자기 생일로 번호를 지정한 것이었다. 단서를 찾듯이 그 짧은 메시지에서 공통점을 끌어냈다.
왜 사람들은 분노할까
-영화의 중심인물인 두 캐릭터 미희와 유영은 다른 듯 닮아 있다. 어쩌면 평행이론처럼 서로 다른 시대를 살고 있지만, 각 시기에 같은 영혼을 가진 사람이 등장하는 건지도 모르겠다. 자유롭고자 했던 유영은 부모의 억압으로 마음의 병을 얻어 죽음을 선택한다. 미희 역시 억압적인 부모에 대해 토로한다. 둘은 모두 어떤 이유로 단짝과 결별하게 된다. 이상희, 김새벽 두 배우에게서 미희, 유영이라는 인물과 비슷한 지점과 차이점을 동시에 발견했을 텐데, 어떻게 캐스팅하게 됐고, 캐릭터와 연기에 대해 어떤 대화를 나눴나.
이완민_ 대화를 나누다보니 어떤 역을 할지 답이 나왔다고 할까. 상희씨가 더 미희에 가까웠다. 걸음걸이며 대담한 성격 같은 부분이. 새벽씨는 지금과 달리 그때는 고등학생을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웃음) 새벽씨한테 벨라 타르의 <사탄탱고>(1994)에서 고양이를 때리고 죽이는 소녀가 내뿜던 이미지를 주문했다.
김새벽_ 나이가 아니라 상태를 말하시는 걸로 알겠다. (웃음) 처음 감독님이 어떤 역할을 하고 싶으냐고 물으셔서 미희를 하고 싶다고 했다. 그런데 감독님은 그때 내 분위기가 유영과 닮았다고 했고 그 말에 설득 당했다. 유영은 현재의 친구들에게 그리운 존재다. 그걸 잘 표현하려고 노력했다. 내가 잘해내지 못하면 이 친구들이 현재 왜 이렇게 소원해졌는지 설명되지 않는 구조라 그걸 놓치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이완민_ 미희, 유영 두 캐릭터 모두 정념적인 인물이다. 그럼에도 둘이 대비되는데, 새벽씨한테는 최대한 잠을 푹 자고 오라고 주문했다.
이상희_ 반면 나한테는 좀 바싹바싹 마른 장작 같은 건조함을 보여달라고 하시더라.
이완민_ 맞다. 그랬더니 상희씨가 핸드크림이나 로션 같은 걸 안 바르고 오더라. (웃음) 미희는 뭔가 절박한 사람이다. 시쳇말로 멘붕에 빠진 거다. 남들이 보기엔 좀 ‘맛이 간 것 같은’ 상황이다. 미희가 지하철에서 내려 무작정 유영을 따라가는 장면에서는 루키노 비스콘티의 <베니스에서의 죽음>(1971)에서처럼 나이가 어린 사람(고교생)한테 자기를 투영하는 마음을 보여주고 싶었다. 현재 고통을 겪고 있는 미희가 10대 고등학생을 쫓아가면서 자신의 과거를 돌아보는 문을 찾게 되는 거다.
이상희_ 미희는 어느 시점부터 자기 의지가 아니라 타의에 의해 강압적으로 살게 된 인물이다. 긴 시간 고시 공부에 매달렸고, 거듭 실패했다. 그러다보니 정서가 바싹 마른다. 환경에 적응하지 못하고 삐져나올 때 남들에게는 그게 일탈로 비친다. 나는 절박해서 손을 내미는 건데, 다른 사람들은 전혀 그렇게 생각해주지 않는 거다. 미희의 이런 상태를 어떤 모습으로 구현해야 할까 고민이 많았는데 감독님을 보면서 힌트를 얻었다. (웃음) 작업을 하다보면 목표치에 도달하기 위해 싫은 말을 전해야 할 때도 있는데, 감독님은 그때 상대의 눈을 보지 않고 이야기하신다. 그런 모습을 미희의 행동에 반영해 조금 따라 했다. 나중에는 스탭들이 나보고 감독님과 너무 닮았다고 하더라. (웃음)
이완민_ 어느 순간 상희씨가 나를 유심히 관찰하고 있는 걸 알겠더라. (웃음) 이 영화를 찍으면서 많이 좋아지긴 했는데, 내가 원래 사람들과 눈을 잘 마주치지 못하고 그런 게 심하다. 미희는 늘 눈을 내리깔고 사람들을 대하는 걸 힘들어한다. 가령 옷을 사러 갔을 때 계산을 서두르는 점원에게 폭발하는 장면에서 단적으로 드러나는데, 나는 많은 사람이 실은 이 사회에서 이해받지 못해 분노하면서 살아가는 것이 아닐까 싶다.
이상희_ 부모님이 자신을 이해해주지 못하는 부분에 대해 폭발하는 장면에서는 폴커 슐뢴도르프의 <양철북>(1979)의 꼬마 오스카처럼 소리 지르는, 악쓰는 연기를 해보라고 하셨다. 애정결핍에서 나오는 것 같은 모습을 미희가 극명하게 표현했으면 좋겠다고. 맘껏 소리 질렀던 것 같다. 연기를 하면서 좀 힘들었던 지점은 미희는 고시 준비를 근 10년간 한 설정인데, 나는 그 길게 누적된 시간을 못 채울 것 같더라. 나한테는 없는 경험이라 지금 보면 한 3년 정도 준비한 사람처럼 구현된 것 같다. (웃음)
이완민_ 영화를 하기 전에 대학에서 법학을 전공했다. 주변 사람들이 미희처럼 다 그렇게 고시에만 몰두하고 있었다. 법대를 졸업한 후 바로 영화를 하려고 했기 때문에 실제로 고시를 준비한 경험이 있는 건 아닌데, 법대 재학 당시 주변에서 본 모습을 극대화시켜봤다. 당시에 내가 느끼던 고립감이 고시 준비 같은 것으로 인한 거였다면 나는 영화를 만나서 그 고립에서 빠져나온 게 아닐까 싶다.
한 시대와의 결별 혹은 솟구치는 정념의 사라짐
-유영의 죽음은 25년의 시차를 둔 이 영화의 과거와 현재를 이어주는 유일한 끈이다. 불의를 참지 못하는 혈기왕성하고 정치적으로 깨어 있는 과거의 유영. 그녀는 자살로 생을 마감했지만, 현재에 그 유영과 똑같이 생긴 고교생이 미희 앞에 나타나고, 결국 과거 단짝이던 성숙, 익주와 만나게 된다. 김새벽이 1인2역을 맡아 마치 25년 전 죽은 그 친구가 다시 나타난, 유령 같은 존재라는 생각이 짙어진다.
이완민_ 유영의 죽음을 사실적이 아니라 추상적인 것이라고 생각했다. 한 시대와의 결별, 혹은 솟구치는 정념의 사라짐 같은 것들. 그래서 굉장히 몽환적으로 그려져도 상관없겠다 싶었다. 그런 정념이, 마치 유영의 유령처럼 되살아나도 좋겠다 싶었다. 1인2역이지만 한명은 판타지적으로, 또 다른 한명은 사실적으로 해석할 수도 있는 것 같다.
이상희_ 극중 미희는 유영을 몇번 만나지 않는다. 모호한 대상이었는데, 나는 연기를 하면서 유영이 과거의 미희의 모습이라고 생각하려고 노력했다. 과거의 내 모습이지만 현재는 잃어버린 모습이라고 할까. 미희가 유영과 만나는 것이 마치 거울을 보는 것과 비슷한 것이라고, 찍으면서 내내 그렇게 생각했다.
김새벽_ 유영은 그렇게 불쑥불쑥 나온다. 나는 그 존재가 그렇게 툭툭 튀어나왔을 때의 느낌을 표현해야 했다. 등장할 때마다 유영이 친구들에게 확실하게 영향을 끼치고 있다는 것을 과거 장면에서 보여줘야 했다. 무엇보다도 유영은 결국 좌절을 맛보고 자살하는 아이다. 생기 있던 아이, 그 찬란한 사람이 꺾이는 순간을 표현해야 했다.
이상희_ 언젠가 한 동료 배우가 “좋은 연기는 시간을 압축하는 연기”라고 했다. 잠깐 등장해도 그 상황이 고스란히 보이는 연기 말이다. 새벽이가 그렇게 압축하는 연기를 보여주더라. 이 영화에서 새벽이의 파편들이 좋았다. 그 파편들이 현재의 내게 영향을 주고, 인물들이 내게 동력이 돼주었다.
이완민_ 과거와 현재가 빈번하게 교차하니 비주얼적으로 표현하는데도 신경을 썼다. 영화 전체가 현실과 비현실로 나뉜다. 현실은 채도를 낮추어 그렸고, 비현실은 누런 톤으로 그렸다. 비현실에는 각 인물의 어린 시절 꿈도 있고, 현재에서 과거를 바라보는 노스탤지어도 반영돼 있다. 그걸 보면서 우리가 생각하는 과거가 결국 환상이라는 걸 느끼게 된다. 그 부분을 확실하게 구분하고 싶어서 후반작업 색보정 단계에서 그 차이가 더 극명하게 드러나게 했다. 또 가령 꿈 장면에서 꽃을 던졌는데 주워 드는 건 종이와 펜인 것 같은 장면도 연출했다. 논리적으로 생각하려고 하기보다 신과 신이 붙었을 때 뭔가 발생하는 것 같다. 대본 쓸 때와 비슷한 마음으로 편집할 때도 그렇게 간 것 같다.
-이 영화에서 과거와 연결하게 만드는 ‘유령 같은’ 존재는 인물만이 아니다. 영화에 등장하는 잠실의 벼락맞은, 그래서 죽었지만 용케 남아 있는 뽕나무 그리고 그 뽕나무가 있는 잠실 지역이 주는 상징성도 크다.
이완민_ 어릴 때 거의 2년에 한번씩 이사를 다녔었는데, 고등학생 시기를 잠실에서 보냈다. 잠실은 원래 누에밭이었는데 주공아파트가 들어서면서 도시화됐다. 롯데월드타워가 들어서고, 학원가도 늘고 있다. 잠실은 중산층의 욕망을 대변하는 공간이다. ‘누에치던 방’은 뽕나무를 심고 잠실을 두었던 데서 유래한 이름인 ‘잠실’ (蠶室)의 한자의 뜻을 풀어서 쓴 것이기도 하다. 그 공간은 누군가의 마음일 수도 있고, 과거 미희나 유영이 각각 고시원이나 독서실에서 지내던 공간일 수도 있다. 영화에서 묘사한 잠실의 ‘벼락맞은 뽕나무’는 실제로 아파트 단지 내에 팻말과 함께 있다. 평소에 나무에 관심이 많은 편인데, 오래된 나무들이 사람들을 지켜보고 있지 않을까, 그 많은 나이테에 글자가 새겨져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항상 한다.
김새벽_ 잠실은 촬영 때문에 가봤는데 밝은 느낌은 못 받았다. 1∼2월에 촬영했고 그래서 너무 추웠던 게 기억난다. 잠실 하면 늘 높은 타워, 화려한 도시, 이런 걸 생각하게 되는데, 우리가 촬영 때문에 찾아간 곳은 오래된 아파트가 대부분이었다. 닫혀 있고 폐쇄돼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이완민_ 잠실에서 보낸 시기의 분위기도 반영된 것 같다. 굳이 세대론까지 끌어들이지 않더라도 1997년 IMF 외환위기 이후에 사회상이 많이 바뀐 것 같다. 다 각자도생하자는 마음으로 바뀐 것 같고, 그 심리적 피폐함이 도시의 풍경을 삭막하게 만드는 것 같다. 사람들이 왜 이렇게 배타적일까, 왜 이렇게 외로울까 하는 고민도 그 풍경에서 출발했다. 그리고 그게 나 혼자만의 문제는 아닌 것 같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그 질문으로 채미희, 조성숙이라는 외로운 인물을 도출해내게 됐다.
여성들의 행동을 반영하는 일
-관계의 접착과 단절의 진행 과정에서 도드라지는 것은 ‘여성’이다. 유영과 성숙의 학교 내 친밀도는 여성이기에 공감할 수 있는 여러 에피소드를 바탕으로 하고 있다. 성숙이 낯선 유영의 ‘유령’을 따라와 대뜸 친근함을 요구할 때도, 성숙은 여자친구끼리의 포용심으로 미희를 밀어내지 않고 받아들인다. 얼핏 이해하기 힘든 여성들 간의 끈끈한 정서적 연결고리에 놓여 있다.
이완민_ 나 역시 여성이고 자매애에 관심이 많다. 성차별주의에 대항하는 일에도 관심이 많고. 특히 유영과 성숙이 학창 시절 이에 고춧가루가 낀 것을 아무렇지 않게 지적해준다거나 운동장에서 해를 보면서 존재에 대한 고민을 나누는 장면은 그런 면에서 나왔다.
이상희_ 굳이 여자끼리가 아니더라도 이런 친밀감은 가능하다. 물론 남자들이 유영과 성숙처럼 무릎베개를 하진 않겠지만. (웃음) 그럼에도 내가 여성이고 내 경험 중 일부가 대본에 써 있는 거 같아서 이해되는 부분이 많았다. 여자친구들끼리 당연하게 행동하는 모습을 담은 장면들인데 그 사소한 장면이 기존 영화에서 흔히 보지 못한 여성들의 행동이고, 그 반가운 장면이 많아서 감사했다.
이완민_ 학창 시절 겪었던 것을 많이 반영했다. 거울을 보지 않고 친구끼리 서로의 모습을 봐주는 것도 퍽 상징적이라고 생각했다. 내가 잘하고 있는지 비쳐보는 기준이, 10대 시절에는 다른 누가 아니라 가장 친한 단짝이다.
-성숙은 25년 전 단짝 유영의 모습을, 현재 고통받고 있는 미희에게서 발견한다. 미희는 과거 단짝 이근경(정원)과 소원해진 기억이 있고, 현재까지 풀지 못했다. 이 영화에서 보이는 작은 희망은 그런 상실의 아픔을 가진 성숙과 미희가 만나 새로운 둘의 관계를 형성한다는 데 있다. 미희는 성숙에게 늘 기대고자 하지만, 마지막에는 일방적이지만은 않도록, 그가 성숙을 도와줄 여지를 준다. 유영을 따라와 과거의 문을 연 미희가 무겁고 가라앉은 현재의 분위기에 마치 새로운 문을 열어주는 것 같은 결론이다.
이상희_ 성숙은 현재에 미희가 하지 않았던 일을 하는데 가장 큰 동력을 주는 인물이다. 미희는 언제나 다른 사람들에게 배척당하고 틀렸다는 말을 듣고 사는데, 성숙만은 미희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인정해준다. 그러다보니 막상 성숙을 연기한 홍승이 배우가 지쳤던 것 같다. 익주 역시 성숙에게는 짐 같은 존재니까. 그래서 딱 한번 촬영 중에 승이 언니와 싸운 적도 있다. (웃음) 감정적인 싸움이 아니라 영화 속 인물간의 싸움같은 느낌이었고, 나는 그것이 촬영하면서 소모적이지 않고 중요한 시간이라고 생각했다. 싸움이 나쁜 것만은 아니지 않나. 성숙이란 인물은 왜 영화의 모든 사람을 다 받아주기만 해야 하나 브레이크를 걸었던 것 같다.
이완민_ 홍승이 배우가 꺼낸 말을 듣고보니 아, 어쩌면 내가 인물을 대상화하고 있었구나 싶었다. 그래서 미희와 성숙이 함께 막걸리를 마시는 장면을 연출했다. 처음에는 역할 생각하지 말고 이상희, 홍승이로 이야기하다가, 채미희, 조성숙으로 이야기를 나누어도 좋겠다고 했다. 영화에는 결국 이 장면이 안 쓰였지만, 이들의 마음을 아는 데 중요한 계기가 된 촬영이었다. 이런 순간 때문에 영화를 하게 되는구나, 해소되는 기분이었다.
이상희_ 승이 언니의 브레이크가 아니었다면 그런 순간을 마주하지 못했을 것 같다. 미희는 끝까지 모두에게 질척거리면서 아름답지 못한 진상이 되어버렸겠지. 그러니 승이 언니에게 고맙다는 생각이 든다. 연기뿐만 아니라 실제에서도 나는 내 기억이니 확신하고 살았었다. 그런데 어쩌면 지난 관계에 대해 내가 일방적일 수도 왜곡하고 있을 수도 있겠구나 싶다. 아주 큰 상처라고 생각했던 일이 시간이 지나서 마주했을 때 그때만큼은 큰 상처가 아니길 바란다.
김새벽_ 나도 계속 피하던 과거의 친구가 있었다. 그런데 상희 언니를 매개로 그 친구한테 연락이 왔다. 나는 과거의 어떤 걸 지금에 마주치고 싶지 않아 연락을 피했다. 그런데 언니가 “연락했니?” 하고 재차 확인해 결국 만나게 됐다. 어쩌면 만나고 나면 아무 일도 아닐 수 있었는데 대면하지 않으면 상처든 기억이든 점점 불어나고 커질 수밖에 없다. 영화에는 결국 나오지 않은 대사인데, “이렇게 우리 헤어지면 난 너한테 넌 나한테 서로 영향을 미칠 수 있는데 못하잖아”라는 대사가 있었다. 처음에 난 그 대사 때문에 이 영화가 하고 싶었다. 촬영 후 시간이 흐르는 동안 이 영화에서 힘을 받고, 생각나는 장면이 무척 많았다. 촬영할 때는 이만큼은 몰랐던 것 같다. 이렇게 절실하게 마음으로 와닿은 상태에서 찍었으면 연기가 좀더 달라졌을 텐데. (웃음)
이완민_ 늘 과거의 환상에, 노스탤지어에, 다른 사람에게 매어 있는 시간들이었다. 한번쯤은 과거를 직면하면 좋겠다. 다른 이야기를 하려면, 지금 가진 왜곡부터 바로잡자는 데서 이 이야기를 시작했다. 내겐 그래서 이 영화가 일종의, 과거와 인사하기 위한 푸닥거리였다. 이제 다음 작업은 환상 없이 사는 일에 대해, 그래서 완전히 다른 영화에 대해 생각해보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