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로테르담국제영화제(International Film Festival Rotterdam(IFFR), 이하 로테르담영화제)는 영화제를 다양한 목소리와 감수성이 소용돌이치는 행성에 비유했다. 1월 24일부터 2월 4일까지 열린 올해 로테르담영화제는 그곳의 거주자들을 탐구하자고 제안했다. 도시 곳곳에 나부낀 슬로건은 “IFFR 행성의 주민을 만나보세요”(Meet the humans of IFFR)다. 더불어 인간을 정의하는 다양한 명제가 시내 곳곳을 장식했다. “그들은 어떤 종보다 높은 수준으로 도구를 쓴다”, “그들은 자기들끼리 전쟁을 일으킨다”, “그들은 영화 보기를 멈추지 않는다” 등등. 말하자면 제47회 로테르담영화제는, 영화인과 관객에게 휴먼의 정의는 무엇이며, 인간들이 맺는 관계는 어떤 의미를 가지며, 영화예술은 거기서 무엇을 하는지 다시 생각하자고 권했다. 너무 뜬구름 잡는 원론적 질문 아니냐는 회의가 들 법하다. 그러나 베로 베이어 집행위원장은 개막식 환영사에서 2018년이 왜 원점으로 돌아가야 할 시점인지 최근 폭로된 영화계 권력형 성폭력을 화두로 설명했다. 요약해 옮겨보자. “최근 우리는 영화산업에서 권력을 가진 백인 중년 이성애자 남성이 주로 저지른 성적 비행의 패턴을 알게 됐습니다. 누군가는 이 비행이 젠더보다 권력 문제라고 주장할지 모르지만 이 경우 두 기준은 구별되지 않습니다. 추행 자체를 제외하면 다음 중 무엇이 더 우려스러운지 고르기 어렵습니다. 그 정도는 괜찮다며 방관한 사람이 있었다는 사실, 여전히 여성을 더듬는 자가 백악관에 있고, 일군의 자기 중심적이고 권력에 굶주린 알파메일들이 이 세계의 큰 면적을 지배하고 있다는 사실. 여기는 영화제이고, 우리가 세계를 보는 방식이 패턴을 만듭니다. 우리가 서로에게 하는 이야기들- 좋은 인간을 만드는 것은 무엇인지, 영웅은 어떻게 생겼고, 인간이 자기와 다른 젠더, 인종, 종교를 어떻게 대하는지가 패턴을 만듭니다. 지금 우린 어쩌면 다시 시작해야 합니다. 한발 물러서고 옆으로 비켜나서, 우리가 어떻게 여기에 도달했는지 돌아보고 지금까지 당연하게 여겼던 것들을 신선한 눈으로 검토해 우리가 자연스럽다고 믿어온 뒤틀린 사회질서를 회의해야 합니다. 스토리텔링은 우리를 휴먼으로 만드는 속성 가운데 하나입니다. 또한 반복되는 이야기를 통해 어리석음과 무지가 전통이 되고 문화가 되고 진실로 인정되기도 합니다. 그래서 누가 발화하는지, 스크린에서 어떤 얼굴을 보는지가 중요합니다. 우리는 누구에게 카메라와 마이크를 주고 누구를 스크린에서 봐야 할까요?”
무엇이 인간을 정의하는지 시네마를 통해 새롭게 생각하자는 큰 틀 아래, 올해 로테르담영화제는 패자의 관점으로 역사를 바라보는 작품을 모은 ‘그늘의 역사’, 디지털 시대의 과장된 커뮤니케이션 방식을 반영한 ‘맥시멈 드라이브’, 블랙 시네마를 지난해에 이어 조명한 ‘팬 아프리칸 시네마 투데이’ 등을 테마 섹션으로 마련했다. 로테르담영화제는 매년 첨단 테크놀로지를 활용해 시네마를 체험할 수 있는 참신한 방법을 개발하는 영화제이기도 하다. 상영작을 영화관 없는 아프리카 마을을 포함해 세계 곳곳에서 동시에 관람하고 관객과의 대화에 참여할 수 있게 하는 IFFR 라이브에 이어 2018년 로테르담영화제는 온라인 스트리밍으로 기존 상영작을 세계 곳곳에서 연중 감상할 수 있는 플랫폼 ‘IFFR UNLEASHED’를 론칭했다. 폐막 하루 전 개최된 시상식에서, 한국의 <나와 봄날의 약속>(감독 백승빈)이 초대된 Hivos 타이거 경쟁부문의 트로피는 중국영화 <과부 마녀>(The Widowed Witch)에 돌아갔다. 팔레스타인과 유럽, 멕시코가 합작한 <사라와 살림에 대한 보고서>(The Reports on Sarah and Saleem)가 2등상에 해당하는 심사위원 특별상을, 우수한 아시아영화에 주어지는 넷팩상은 필리핀의 <초조한 통역>(Nerveous Translation)에 돌아갔다. 야간근무 중 납치된 여성의 전화를 받은 경찰관의 이야기를 단일 공간에서 펼친 덴마크 스릴러 <더 길티>(Den Skyldige)는 큰 인기를 누리며 관객상을 품에 안아, 배급에 파란불이 들어왔다.
정치 코미디 <스탈린의 죽음>(The Death of Stalin)을 끝으로 폐막한 제47회 로테르담영화제는 지난해보다 1만5천명이 증가한 연 관객 32만9천명을 동원한 것으로 집계됐다. 20년 만에 수작을 내놓은 폴 슈레이더, <플로리다 프로젝트>(The Florida Project)로 주목받는 숀 베이커, <자마>(Zama)의 루크레시아 마르텔, 배우 샬롯 램플링 등이 나선 토크 프로그램도 만족스런 반응을 이끌어냈다. 국내 개봉관과 영화제에서 관객과 더불어 재회하기를 기대하는 상영작 가운데 일부를 소개한다.
마녀들
2018년 세계 영화계의 중심 이동을 반영하듯 올해 영화제 스크린에는 다양한 ‘마녀’들이 출몰했다. 영화제의 가장 큰 상인 타이거 트로피를 중국으로 가져간 카이쳉지 감독의 <과부 마녀> 는, 세 번째 남편을 잃고 저주받은 여자라는 손가락질을 받는 젊은 여성 얼하오(티안티안)의 여정을 그렸다. 남편을 죽게 한 화재에서 살아남은 얼하오는 일시적 실어상태에서 남편의 형으로부터 강간당한 다음, 말 못하는 어린 시동생을 데리고 집을 떠나 승합차에서 먹고 자는 홈리스 생활을 시작한다. 그러나 얼하오를 불길한 존재로 취급하거나 성적인 야욕만 드러내던 마을 사람들의 태도는, 몇 가지 신비한 사건을 거치며 신통력에 대한 경배로 바뀐다. 희생자의 자리를 거절하고 마을 사람들의 미신을 역이용해 자신이 믿는 정의를 실천하는 얼하오는, 중국 독립영화에서 보지 못했던 매혹적인 여성 캐릭터다. 그는 전남편들과 살았던 동네를 순회하면서 억울한 망자들의 영혼과 소통하며 이승에서 이뤄지는 성폭력, 여아 매매, 탐욕을 저지하고 상처를 치유한다. 허베이성 고향 마을에서 사투리로 영화를 촬영한 카이쳉지 감독은 우화적이면서도 정교한 플롯, 리얼리즘과 초현실적 이미지를 섬세하게 교직한 연출로, 약자를 향한 사랑에서 비롯된 기적과 그 기적으로도 어찌할 수 없는 절망을 공히 아름답게 그렸다. 룽가노 나이오니 감독의 <나는 마녀가 아니야> (I’m Not a Witch)는, 미신적 사회 안에서 마녀로 지목받아 학대와 숭배 사이에 고통받는 8살 소녀의 이야기다. 어느 날 연고자 없이 마을에 나타난 떠돌이 소녀는, 동네에서 발생한 온갖 나쁜 일의 원흉으로 지목되고 정부가 관리하는 마녀 캠프에 수용된다. 이곳의 여자들은 마법을 부려 날아갈 것을 방지하기 위해, 마치 얼레에 달린 연처럼, 흰 리본에 묶여 생활한다. 권력 기관은 소녀를 포함한 마녀들의 시민권을 부정하는 한편, 국민들의 미신을 이용해 가뭄부터 각종 불미스런 일에 관한 책임을 그들에게 떠넘긴다. 소녀를 가엾게 여긴 ‘선배 마녀’들은 고아에게 ‘슐라’라는 이름을 지어주고 학교 부근으로 사역을 나갈 때 또래들의 수업을 엿듣도록 깔때기를 쥐어주기도 하지만 소녀를 보호하기에는 역부족이다. 코미디와 뮤지컬의 요소마저 포함한 이 독특한 영화는 사회 드라마인지 이국적 민족지 연구인지 모호한 입장을 취하지만, 몇몇 순간은 떨쳐내기 힘들다. 극단적으로 무방비한 소녀가 최후의 수단으로 의지하는 침묵의 음향, 등에 매인 끈이 당겨지며 짐짝처럼 끌려가는 작은 몸의 이미지가 그것이다. 슐라의 선례로는 우리가 잘 아는 잔 다르크가 있다. 이미 칸국제영화제 감독주간에서 공개된 <잔 다르크의 어린 시절> (Jeannette)도 로테르담을 찾았다. 브루노 뒤몽 감독은 백년전쟁에 출전하기 몇해 전 자네트가 친구, 가족, 마을 성직자는 물론 종교적 환각과 나누는 대화를 노래와 헤드뱅잉, 나아가 <엑소시스트>식 스파이더 워킹으로 표현한다. 이 헐벗은 록 오페라는 심플함의 극치인 것처럼 보이지만 음악의 흐름에 카메라의 앵글을 매치시킨 세밀함은 <베이비 드라이버>의 그것 못지않다. 미술, 조명, 세트를 제거한, 이 ‘맨발의 뮤지컬’은 형식의 기괴함으로 많은 관객을 중도 퇴장시켰으나 다른 그룹의 관객으로부터는 찬탄을 불렀다. 하긴 우리가 중세인의 집단심성에 대해 무엇을 확언할 수 있을까? 머릿속에서 언제나 신의 목소리가 들려오고 음악이 출렁였던 소녀의 고양된 정신을 그리기 위해 어쩌면 브루노 뒤몽은 가장 사실적인 형식을 고안한 것인지도 모른다.
디바들
영화제라는 광활한 뷔페에서, 배우의 이름에 의지해 작품을 고르는 관객은 이자벨 위페르와 아네트 베닝의 신작에 반색했다. 위페르는 코믹 살인 미스터리인 <팁 톱>(2012)에서 한 차례 공동 작업한 세르주 보종 감독이 <지킬 박사와 하이드>를 변용한 장르 하이브리드 영화 <마담 하이드> (Madame Hyde)의 타이틀 롤을 맡았다. 놀랄 것도 없이 위페르의 극중 성은 제킬. 35년차 교사지만 여전히 학생들에게 무시당하는 물리교사 마담 제킬은 어느 날 실험실에서 감전된 후, 글자 그대로 불타오르는 에너지를 갖게 되고 밤마다 동네에서는 괴사건이 발생한다. <엘르>에서 위페르의 유머감각을 확인한 관객이라면, 연기 스타일을 뒤바꾸는 법 없이 미세한 움찔거림으로 폭소를 자아내는 그의 경제적 코미디를 환영할 법하다. 상영 전후 관객과의 대화에 나선 보종 감독은 <마담 하이드>가 프랑스 고교 실업반 교육에 대한 풍자임을 누누이 강조했지만, 반복해서 메시지를 강조하는 대사와 에피소드들은 후반으로 갈수록 효과가 반감된다. 단 아트하우스의 얼음 여왕 이자벨 위페르를 강력한 슈퍼히어로로 상상해본 관객이라면 충분히 즐길 만하다.
아네트 베닝이 40, 50년대 명성을 누린 실존 배우 글로리아 그레이엄 역을 맡아 제이미 벨과 공연한 멜로드라마 <영화 스타는 리버풀에서 죽지 않는다> (Film Stars Don’t Die in Liverpool)는 영화제 관객투표 톱10에 드는 사랑을 받았다. 오스카 조연상까지 수상했으나 전성기를 뒤로한 글로리아는 네 번째 결혼을 정리하고 1970년대 말 리버풀에서 연극무대에 서던 중 무명 청년 배우 피터 터너와 사랑에 빠진다. 나이 차이는 물론 과거 편력과 성 정체성 앞에서도 흔들리지 않는 글로리아와 피터는 사랑의 달인들이지만, 어느 날 글로리아는 알 수 없는 이유로 피터를 밀쳐낸다. 세월이 흐른 후 피터는 몸을 가누지 못할 만큼 쇠약해진 글로리아의 연락을 받는다. 폴 맥기건 감독은 과거와 현재를 오가는 이야기를 컷하지 않는 장면 전환으로 전개하며 두 배우가 내내 관객을 이끌도록 유도한다. 분장실 거울 앞에서 메이크업을 하는 솔로 연기만으로 시작 5분 만에 관객을 사로잡고 첫 번째 플래시백에 즈음해서는 사랑에 빠뜨리는 아네트 베닝의 아름다움과 유연성은 압도적이어서, <우리의 20세기> 이후 베닝의 커리어 정점을 이어가는 영화로 손색이 없다. 글로리아와 피터의 어머니로 분한 바네사 레드그레이브와 줄리 월터스의 조연도 영화를 탄탄히 감싼다. 고전기 멜로드라마에 대한 예술적 인용이 아니라, 장르의 직접적 리바이벌로서 객석의 눈물을 뽑아낼 오랜만의 로맨스이기도 하다.
오늘의 세계
독립영화가 대세를 차지하는 로테르담영화제에는 현재진행 중인 세계의 이슈들에 발빠르게 감응하는 상영작이 많다. 소셜 미디어의 부작용, 10대의 성장, 백인의 헤게모니, 디아스포라의 현재를 관찰하거나 반영하는 영화들은, 특별히 뒤쫓지 않아도 상영관에서 쉽게 만날 수 있다. 그중 한스 블록, 모리츠 리제비크 감독이 공동연출한 <클리너> (The Cleaners)는 <시티즌 포> 이후 가장 충격적인 개안의 순간을 선사하는 영화다. “1분마다 500시간의 비디오, 45만개의 트윗, 250만개의 페이스북 포스트가 웹에 올라간다. 그러나 그것들이 다 그대로 남는 것은 아니다”라는 메시지로 시작한 <클리너>는, 거대 검색엔진과 소셜 미디어의 포스트를 삭제하고 링크를 차단하는 일을 담당하는 그늘의 인력, 콘텐츠 모더레이터(일명 클리너)의 존재를 소개한다. 처음에는 SF인가 싶지만 <클리너>는 다큐멘터리다. 구글, 페이스북에 직접 고용돼 있진 않으나 아웃소싱 형태로 일하는 필리핀 마닐라의 모더레이터들은 하루 2만5천건의 사진을 리뷰하며 “통과, 통과, 삭제”를 클릭한다. 키워드는 사이버 불링, 아동포르노, 자해, 테러리즘 등이며 참수영상, 자살영상, 어린이 성추행에 일상적으로 노출되는 모더레이터들 중 일부는 자살에까지 이르는 정신적 외상에 시달린다. 실제로 <클리너>는 일을 그만두기로 결심한 콘텐츠 모더레이터들의 제보와 인터뷰로 제작될 수 있었다. 종사자들의 고통은 <클리너>가 제시하는 소셜 미디어 시대 문제의 일부에 불과하다. 풍자와 인격모독은 어떻게 구별할 것인가? 공습의 여파를 보여주는 유튜브 영상은 잔혹물인가 기록물인가? 각국 정부가 불법으로 규정한 콘텐츠를 해당 지역 유저로부터 차단하는 클리닝은 검열인가 아닌가? 가짜 뉴스가 조회수를 타고 부풀려져 혐오를 선동할 때 플랫폼의 운영자들은 책임이 없는가? 혹은 천문학적 양의 콘텐츠를 모더레이터들이 합리적으로 검토하는 일이 물리적으로 가능할 것인가? <클리너>는 <시티즌 포>보다 훨씬 복잡한 딜레마를 관객에게 던진다.
베니스국제영화제 비평가주간에서 월드 프리미어를 가졌던 덴마크 감독 아니카 베르크의 <팀 허리케인> (Team Hurricane)은, 셀프 카메라와 이모지- 영화제 카탈로그에 따르면 2016년 뉴욕 현대미술관 모마는 이모지 세트를 영구 소장 컬렉션으로 구매했다- 로 상징되는 증폭된 자기 표현의 시대에 10대를 통과하는 여덟 소녀의 이야기다. 지역 공동체의 청소년 클럽에서 친구가 된 소녀들은 교류의 공간이 폐쇄된다는 통보를 받고 문 닫을 건물에서 자기들을 표현하는 전시회를 열어 스타일리시한 이별 의식을 치르기로 한다. BFI(British Film Institute, 영국영화협회) 지원 공모에 웹페이지 형식으로 기획을 제출해 화제를 모았던 베르크 감독은, 제작 단계마다 새로운 사고방식을 적용했다. 소녀들을 캐스팅하면서는 “내가 배우를 재미있게 여기는 것뿐 아니라, 아이들이 나를 재밌어해야 한다”는 기준을 세웠고, 배우 전원에게 아이폰을 나눠주고 생활을 찍도록 독려했다. 이 영화를 준비하며 본인이 10대 시절 친구들과 찍었던 비디오를 꺼내 본 감독은 과거 유치한 모습에 이불을 차면서도, 이번 영화로 같은 과정을 경험한다면 예쁘장한 모습뿐 아니라 흉하고 미친 행동도 꼭 포함해야 한다고 결심했다고 한다. 피카추와 고무오리를 갖고 놀고, 총천연색 염색으로 자기를 표현하는 주인공들처럼, <팀 허리케인>은 피어나는 식물을 담은 자연 이미지, 그래픽과 광학효과로 번쩍거린다. 감독 스스로 붙인 이 영화의 장르명은 펑크 칙 플릭(Punk chick flick)이다. 또 한편의 덴마크영화 <더 리턴> (The Return)은 30대에 이르러 생모를 찾아, 이상하고 낯선 나라를 찾아온 한국계 입양아 캐롤린(캐롤린 소피 리)과 토마스(토마스 환)의 한국 체류기다. 여러 입양인들이 숙소로 삼은 서울의 게스트하우스를 주요 공간으로 선택한 말레네 초이 옌센 감독은 <인간극장>류의 접근법을 취하지 않는다. 한국을 어머니의 나라로 미화하려는 욕구도 없다. 사연의 종류는 개인의 수만큼 다양하다. 인종차별을 겪으며 자란 예가 있는가 하면 “내가 보기에 너는 전혀 한국인처럼 생기지 않았어. 우리랑 똑같아”라는 리버럴한 부모에게 단절감을 느낀 경우도 있다. 감독은 흥미로운 이야기들을 선택하되 촬영과 편집으로 대사가 전하지 못하는 이방인의 감각을 전달한다. 예컨대 게스트하우스 거실의 대화가 막힐 때마다 사용된 점프컷은, 인물들이 감지하는 불균질하고 어색한 시간을 공감시킨다.
시네마, 고요한 방
우리를 둘러싼 모든 것이 컬러풀하고 요란한 맥시멀리즘의 르네상스지만 여전히 영화관은 일시적인 단절이 가능한, 정적의 성소다. 미국의 실험적 영화감독 제임스 베닝의 <책 읽는 사람들> (The Reader)은 어떤 내러티브도 없이, 고정된 카메라로 독서하는 인간을 집요하게 응시한다. 10대 여성, 중년 여성, 장년 남성, 노년 여성의 네 인물이 홀로 책을 읽는 정경을 차례로 담아낸 영화는, 책을 읽을 때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는 믿음을 흔들어놓는다. 텍스트에 몰입한 중에도 인간은 연신 리듬을 타고 사고와 감정을 노출한다. 한숨을 쉬거나 건공중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생각을 정리하기도 하고, 속눈썹을 뽑거나 머리칼을 땋고 손마디를 꺾는다. 슬픔 탓인지 눈의 피로 때문인지 눈가에 물기가 어리기도 한다. 80대 이상으로 추정되는 할머니의 독서는 일종의 투쟁처럼 보인다. 그녀는 손을 떨며 행을 짚고 작게 음독하며 문장의 흐름을 놓치지 않으려 애쓴다(그가 읽는 책은 파브르의 <거미의 생활>이다). 연령과 환경에 따라 네 독자의 몸짓은 다르지만 재미있게도 공통된 동작은, 남은 페이지의 두께를 헤아리는 행동이다. 카메라 앞의 사람들은 1초의 생략도 없이 현존하지만 동시에 아주 먼 곳을 떠돌고 있기도 하다. 제임스 베닝 감독은 각 단락의 마지막에 인물들이 읽고 있던 책의 일부 문장을 제목과 함께 화면에 표시해 관객이 지금까지 지켜본 이미지의 의미를 사후적으로 발견하도록 한다. <책 읽는 사람들>은 보는 이를 휘어잡기 위해 격한 감상과 감탄사, 자막을 몇 초 간격으로 쏘아대는 유튜브 영상의 안티테제 같다.
마지막은 역시 영화에 관한 영화가 좋겠다. <갈릴레오의 온도계> (Otermometro de Galileu)는 포르투갈의 극영화 감독 테레사 빌라베르데가 처음 찍은 다큐멘터리로 영화친구인 이탈리아 컬트 감독 토니노 드 베르나르디의 가족과 이웃을 방문한 여행기다. 친근한 마을 사람들을 출연진으로 삼아 소포클레스의 <엘렉트라>를 영화로 각색한 바 있는 베르나르디 감독에게 영화는 삶과 분리되지 않는다. 빌라베르데 감독은 베르나르디가 운전하는 차에 동승해 이 지방에서 대를 이어 살아온 조상들의 일화를 듣고, 이웃 아주머니로부터 달걀과 치즈를 사면서 노감독이 나누는 대화를 엿보며, 마침내 자녀와 손자가 함께한 가족 식사 테이블에 초대받는다. “각본만 쓰고 찍지 못하는 감독이 되고 싶진 않지만, 만들어지지 않는 영화도 적어도 내겐 영화예요”라고 말하는 베르나르디의 태도는 한없이 관대하고 평온하다. 빌라베르데 감독은 베르나르디 일가를 잘 알았기에 그들의 공간에 카메라를 갖고 가면 반드시 찍을 것이 있으리라고 확신했다고 한다. 단 한명의 스탭만 있어도 호텔에 투숙해야 하고 사전에 촬영 계획을 공유해야 한다는 사실을 경험으로 아는 빌라베르데 감독은 본인의 눈과 귀, 카메라만 갖고 촬영 여행을 시작했고 결과는 이상적으로 가볍고 투명한 형태의 에세이영화가 되었다. 시네마가 어디까지 가벼우면서도 숭고한 순간을 포착할 수 있는지 입증하는 이 영화의 알쏭달쏭한 제목은 매우 아름다우면서도 정체를 규정할 수 없는 오브제를 의미한다.
로테르담의 아트 디렉션
꾸준히 타 장르 예술과 영화의 경계에 집중해온 아트 디렉션 부문은 올해 더욱 접근성을 높였다. 관객이 영화 이미지 속에 잠들고 꿈을 기록하도록 설계된 아피찻퐁 위라세타쿤 감독의 ‘슬리프시네마호텔’은 일찌감치 침대가 매진됐고, 영화제 본부 앞 광장에 설치된 사이먼 헤이덴스의 ‘침묵의 방’은 방문자가 홀로 들어갈 수 있는 완벽 방음 상태의 상자로 자신의 호흡과 몸의 음향에 귀 기울일 수 있는 희귀한 기회를 제공했다. 음악과의 협업을 시도한 폴 토머스 앤더슨의 신작 <팬텀 스레드>(Phantom Thread) 특별 상영도 로테르담 시민들과 영화제 참가자들에게 높은 인기를 누렸다. 오스카 6개 부문에 후보 지명된 <팬텀 스레드>를 로테르담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의 라이브 연주로 반주해 영화제의 비공식적 클라이맥스를 장식한 행사는 “오스카와 로테르담은 의견이 일치하는 경우가 드물었는데, 지난해 <문라이트>에 이어 <팬텀 스레드>에 대해서는 합의하는 것 같다”는 집행위원장의 환영사로 시작해, 라이브 관현악이 영화 사운드를 압도하지 않을까라는 우려를 불식시키며 성공리에 끝났다. 주연배우 비키 크립스, 믹싱 엔지니어를 동반해 로테르담을 찾은 폴 토머스 앤더슨 감독도 공연 전후 직접 콘서트홀 무대에 지휘자와 나란히 올라 관객의 갈채를 나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