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환절기> 배우 배종옥, "새로운 계절을 준비하는 시간"
2018-03-01
글 : 장영엽 (편집장)
사진 : 손홍주 (사진팀 선임기자)

배종옥을 만나기 하루 전, 드라마 <라이브>의 티저 영상을 보았다. 노희경 작가와 5년 만에 재회한 이 드라마에서 경찰로 분한 배종옥은 용의자의 손에 수갑을 채우며 “열정은 너희한테만 있는 게 아냐”라고 말하고 있었다. 배우 배종옥의 행보를 이보다 더 함축적으로 보여줄 수 있는 말은 없을 것이다. 여자와 엄마 그리고 할머니. 한국 여성배우들에게 주어진 제한적인 선택지 속에서, 배종옥은 영화와 연극, 드라마를 치열하게 오가며 변화를 모색해왔다. 2월 22일 개봉한 영화 <환절기>는 그렇게 안주하지 않는 배우, 배종옥의 현재를 확인할 수 있는 작품이다. 그녀가 연기하는 미경은 교통사고로 아들이 식물인간이 됐다는 소식과 더불어 그동안 알지 못했던 아들의 정체성을 깨닫고 혼란에 빠지는 인물이다. 하지만 미경은 인생의 환절기에 찾아온 시련의 늪에 빠지기보다, 어쩔 수 없음을 인정하고 미래를 향해 작은 한 걸음을 내딛는 편을 택한다. 쿨할 수 없다는 걸 알기에 정말로 쿨한 여자, 그녀가 미경이고 곧 배종옥이다.

-얼마 전 드라마 <라이브>의 티저 영상을 봤어요. 카리스마 넘치는 모습이 인상적이던데요.

=보셨어요? 요즘 드라마 하느라 정신이 없어요. 경찰 캐릭터는 <천하일색 박정금>에서도 했었죠. 정금이 ‘아줌마 형사’에 가까웠다면, <라이브>의 안장미는 훨씬 더 시크해요.

-영화 <환절기>도 이제 막 개봉했어요. 촬영한 지 2년이 지난 셈인데, 개봉을 맞아 다시 돌아보는 <환절기>는 어떤 작품으로 기억되나요.

=영화를 보니 시나리오보다 훨씬 더 잘 나온 것 같아요. 요즘 한국영화들이, 물론 안 그런 영화도 있지만, 강렬하고 자극적이고 ‘저런 일이 가능해?’ 싶을 정도로 현실과 동떨어진 내용이 꽤 많았어요. 그에 비해 <환절기>는 잔잔하면서도 ‘만약 나라면?’이라는 질문을 던져보게 하는 따뜻한 영화로 기억돼요.

-이 작품을 왜 해야 하는지에 대한 명확한 답이 나와야만 비로소 출연 여부를 결정한다고 말한 적이 있어요. <환절기>는 어떻게 선택한 작품인가요.

=저는 이 영화의 관점이 굉장히 마음에 들었어요. 성소수자 이슈를 다룬 많은 영화들이 그들 자신의 사연에만 집중하는 반면 <환절기>는 성소수자인 아들을 바라보는 엄마의 입장으로 이야기를 풀어나간다는 점이 독특하다고 생각했어요. 또 한편으로는 중년의 시기를 넘어서며 인생이 변화하는 과정 중에 있는 여성을 조명한다는 점이 좋았어요.

-이동은 감독을 처음 만났을 때 “시나리오를 보니 감독님 되게 쿨한 성격일 것 같아요”라고 하셨다면서요? (웃음)

=그랬어요. 영화를 보신 분들은 아시겠지만 <환절기>에는 선명하게 상황을 보여주지 않고 그대로 컷 되는 장면들이 꽤 있어요. 저는 이런 선택이 신예 감독으로서 내리기 힘든 결단이라고 생각하거든요. 감독들은 뭔가 설명해주고 싶어 하잖아요. 이 사람은 지금 이런 감정이야, 그래서 이렇게 된 거야, 라는 식으로요. 그런데 <환절기>의 시나리오는 그런 부분들을 힘 있게 쭉 밀고 나가더라고요. 참 담백했어요.

-신인감독이 연출하고 신인배우들이 출연하는 영화이다보니, <환절기> 현장에서 가장 선배였을 것 같아요.

=제일 선배였죠. 선배가 되니 내 것만 하면 안 되더라고요. 내가 가만히 있어도 괜히 나 때문에 분위기가 어려워지고 힘들어지고 그렇게 되는 것 같아요. 선배가 된다는 게 쉬운 일이 아니구나 새삼 느꼈어요. 선배로서 현장에서 해야 할 일은 방향성을 제안하는 것인 듯해요. 연기는 젊은 친구들이 더 잘하죠. 현장 분위기를 어렵지 않게 만드는 것도 중요한 것 같아요. 후배들에게 가장 선배지만 친구같이 느끼게 하는 것. 그게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영화의 초반부 미경은 혼자서 무언가를 하는 데 서툰 인물로 묘사돼요. 아들이 운전을 배울 거라는 생각에 면허도 따지 않고, 그 아들이 교통사고로 식물인간이 된 이후에는 필리핀에 살고 있는 남편(박원상)에게 도움을 청하려 하죠. 대중이 생각하는 배우 배종옥의 주체적이고 독립적인 이미지와는 다소 거리가 있는 인물이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다르죠. 하지만 저와 가까운 모습의 인물만 연기할 수는 없는 일이니까요. 작품마다 맡은 인물 속으로 들어가는 게 더 중요하다고 봐요. 그리고 제가 지닌 이미지와는 좀 다르지만, 미경은 결국 어떤 계기를 통해 자신의 삶을 찾게 되죠.

-<환절기>에서는 엄마와 아들의 관계가 비중 있게 묘사되는데, 실제로는 딸이 한명 있으시죠. 아들 키우는 엄마와 딸 가진 엄마는 다르다고들 하잖아요.

=다르죠. 하지만 <환절기>를 찍으며 아들 가진 엄마가 어떻게 다른지에 대한 생각은 안 했던 것 같아요. 그냥 자식을 키운다고 생각했어요. 내가 낳은 자식이니 다 알 거라고 생각했는데 너무나 큰 부분을 몰랐다는 사실을 알게 된 여자의 마음은 뭘까? 이런 질문에 저는 더 집중했던 것 같아요.

-아들 수현(지윤호)보다 아들의 친구 용준(이원근)과 함께 등장하는 장면이 더 많아요. 진실을 알기 전까지 미경은 아들보다 용준에게 더 살갑게 대한다는 생각도 들고요.

=아들들이 보통 무뚝뚝하잖아요. 그런데 용준이는 엄마에 대한 상처가 있는 친구이다보니 아무래도 더 잘해주고 싶고, 내 아들과도 잘 지냈으면 좋겠다는 따뜻한 마음이 미경에게 있었던 거겠죠.

-미경이라는 인물이 흥미로운 점은, 아들의 교통사고와 함께 고통스러운 날들이 한꺼번에 밀어닥치는데도 자신의 일상을 잃지 않는다는 거예요. 이를테면 친구 아들의 결혼식에 간다든지, 예전과 다르지 않은 방식으로 식물인간이 된 아들을 대한다든지. 특히 침상에 누워 있는 아들에게 꿀밤을 먹이고 기울어진 고개를 다시 바로잡아주는 장면이 인상적이었어요.

=‘식물인간이 된 아이를 가진’ 엄마가 아니라 그런 아이를 돌보는 ‘엄마’가 포인트라서 그래요. 언젠가 아이를 보낼 수도 있다는 우울함이 있지만, 설령 아이를 보낸다 한들 미경의 삶은 계속되는 거잖아요. 그 계속되는 삶 속에서 ‘나는 어디로 가야 하지?’라는 질문을 미경은 끊임없이 던지고 있지 않나 싶어요.

-줄곧 방관적인 태도를 취하던 남편과 이혼하고 나오는 길에 미경은 “뺨 한번 때려봐도 되냐”고 말해요. 그런데 남편이 뺨을 내밀자 막상 때리지 않고 그냥 갈 길을 가는데, 그 이유가 궁금했어요.

=이미 남인데요 뭐. 내가 상처받았다면 그에게도 상처가 있었겠죠? 때리고 싶었겠지만 때린들 뭐가 달라질까, 그런 생각을 했었던 것 같아요. 그 장면은 감독님에게 쿨하다고 얘기했던 결정적인 이유이기도 했어요. 남녀가 살다가 아이까지 있는 상태에서 그렇게 깔끔하게 관계를 정리한다는 게 실제로는 쉽지 않거든요. 그런데 그런 대목을 아주 담백하게 처리해서, 감독님이 쿨한 성격인가보다 생각했던 것 같아요.

-용준이 더이상 수현을 찾아오지 않겠다고 선언할 때, 미경은 시원섭섭한 반응을 보이죠. 그런데 이동은 감독의 말에 따르면, 용준의 새 출발을 정말 쿨하게 축하해주려 하셨다면서요? (웃음)

=처음에는 그렇게 연기했어요. 그랬더니 감독님이 “선배님, 그거 아닌데요” 하더라고요. 시원섭섭한 모습이어야 한다고. 그런데 그게 내 성격인 것 같아요. 간다고 하면 저는 굳이 잡지 않거든요. 그래서 쿨하게 보내주려 했는데…. (웃음)

-그 말을 들으니 2016년에 출간한 에세이 <배우는 삶 배우의 삶>의 한 구절이 생각나요. 책의 서문에 ‘진짜 쿨한 것’에 대해 쓰셨잖아요. 쿨함을 긍정적인 삶의 방식으로 지향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어요.

=맞아요. 노희경 작가의 드라마 <굿바이 솔로>에서 영숙이 “진짜 쿨할 수 없다는 걸 아는 게 진짜 쿨한 거야”라고 말하잖아요. 진정한 쿨함은 어떤 상황을 두고 나 나름대로의 감정을 정립하는 데에서 나온다고 생각해요. 그러니까 쿨한 건 참 멋진데, 어떤 모습이 쿨한 것인지는 상황마다 고민해야 할 것 같아요.

-책 이야기를 더 하자면, “여자와 엄마와 할머니의 배역들 틈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역할은 제한적”이라고 말하며 역할에 대한 고민을 지속적으로 하고 있다는 구절이 인상적이었어요.

=아가씨 역할, 결혼한 역할, 엄마 역할, 할머니 역할. 나이에 따라 여배우가 맡게 되는 역할의 분수령이라는 게 있어요. 30대와 30대 중반, 40대와 40대 중반, 50대와 50대 중반, 이런 식으로요. 그런 과정을 겪으며 선배님들은 어떤 길을 가고 있는지 탐색하는 것이 내 과제이자 나의 갈 길이라는 생각이 들어요. 그래서 전 영화를 볼 때도 여배우들이 나오는 영화를 자주 찾아요. 그들이 어떻게 나이들어가고 있는지, 그 모습이 좋은지 나쁜지, 그게 좋다면 나는 저 길로 가야 하는 건지, 나에게 뭐가 필요한 건지. 이런 질문에 대해 고민하고 생각하는 것이 어느덧 일상이 됐어요.

-최근 다른 작품에서 눈여겨본 여배우들이 있나요.

=요즘은 드라마를 하느라고 영화를 통 못 봤어요. 지난해 프렌치 시네마 투어 영화제에서 관람한 <더 미드 와이프>(3월 22일 국내 개봉예정)의 카트린 드뇌브가 생각나네요. 예전의 그 청초하고 예뻤던 배우가 말썽꾸러기 엄마를 연기하더라고요. 그동안 카트린 드뇌브가 연기를 잘한다는 생각을 별로 해본 적이 없는데, 그 영화에서 자신을 있는 그대로 보여주는 모습이 참 좋았어요. 이자벨 위페르도 정말 좋아하는 배우인데, <엘르>(2016)는 워낙 정서적 수위가 높아서인지 보기가 좀 힘든 영화였어요. <45년 후>(2015)의 샬롯 램플링도 좋았어요. 그녀처럼 여성성을 가진 할머니로 나이 들고 싶다는 생각을 해요. 국내에서 인상적인 여성 캐릭터를 꼽으라면 드라마 <디어 마이 프렌즈> 정도? 한국영화에서는 찾기가 어려운 듯해요.

-왜 그럴까요.

=없잖아요. 전무후무. 여자의 이야기를 제대로 다룬 영화가 없어요. 최근의 한국영화를 보면 작품마다 여배우가 한명 정도 나오는 것 같아요. 그것도 젊은 여배우들만. 중년이 넘은 여성의 삶의 궤적을 다룬 작품은 한국에 없다시피하죠. 그러니 여배우들이 어떻게 작품을 해야 하는지 참….

-이렇게 여배우에게 척박한 환경 속에서도 끊임없이 자기 계발을 위해 노력하는 모습이 인상적이었어요. 뉴욕으로 연기 유학을 떠나고, 언론학 박사 과정까지 수료하셨죠. 배움에 대한 열정이 큰 배우인 것 같습니다.

=저는 갈증을 많이 느꼈어요. 현장에 오래 있다보니 출연하는 작품은 달라도 연기 패턴이 반복되는 느낌이 들었어요. 그런 느낌으로부터 때로는 벗어나고 싶었고, 또 새로운 무언가로부터 영감을 받고 싶기도 했었고. 그 탈출구가 저에게는 책을 보거나 공부하는 일이 아니었나 싶어요.

-올해의 목표는 무엇일지 궁금해집니다.

=올해의 목표는 제 건강을 살피는 거예요. 지난해 갑자기 난청과 이명 증상이 생겨 병원에 입원을 했어요. 그 과정에서 건강이 중요하다는 걸 다시 한번 생각했어요. 하나의 기관이라도 고장나면 할 수 없는 직업이 배우라는 걸 새삼 느꼈어요.

-5월 초까지는 <라이브>에 출연할 예정인데, 캐릭터에 대한 더 자세한 이야기를 들을 수 있을까요.

=경찰 역할이에요. 임무를 충실히 수행해도 사회가 변하지 않고, 나쁜 일들은 계속 일어나고, 그 안에서 자신을 돌아보게 되는 인물이에요. 장미는 경찰인 동시에 갱년기를 맞은 여자이기도 하죠. 감정의 기복이 심해지면서 제2의 사춘기라고도 할 수 있는 시기에 위치한 여자인 것 같아요. 그래서 아마 여자, 특히 내 나이 또래의 여자들이 공감할 수 있는 그런 에피소드가 많을 것 같아요. 안장미라는 역할을 준비하며 마음의 준비를 굉장히 많이 했어요. 배우를 오래 하다보니 매너리즘에 빠지고 때로는 쉬운 길로 가고 싶은 생각이 들잖아요. 그러던 찰나 노희경 작가가 새로운 질문을 던졌고, 저도 매너리즘으로부터 벗어나 어떻게 연기해야 하나 계속 고민했어요.

-새로운 질문이라 함은.

=글쎄요. 그건 보는 분들이 알겠죠? (웃음) 시청자분들이 좀 다르게 봐주셨음 좋겠는데. 윤여정 선생님이 늘 하시는 말씀이 있어요. “같은 배우인데 뭐 그렇게 다를 게 있냐”고. 그 말씀처럼 달라도 결국은 배종옥이 되겠지만, 그래도 그 안에서 뭔가 다른 느낌을 만들어 내려고 고민하고 노력하고 있으니까, 달라지겠죠?

-배우로서의 현재를 계절에 비유한다면, 지금은 어떤 계절일까요.

=환절기죠. 새로운 시간을 준비하는. 지금 잘 준비해야 앞으로의 10년을 대비할 수 있을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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