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소 지엽적인 질문 하나를 던져보고 싶다. <셰이프 오브 워터: 사랑의 모양>(이하 <셰이프 오브 워터>)에서 엘라이자(샐리 호킨스)는 왜 영화관에 가지 않을까. 크리처(더그 존스)를 찾기 위해서라는 예외적인 목적을 제외하고 엘라이자는 극장에 가지 않는다. 엘라이자가 영화를 즐기지 않는 것은 아니다. 코너를 사이에 두고 마주한 자일스(리처드 젠킨스)의 집에서 텔레비전을 통해 영화를 보곤 한다. 기예르모 델 토로 감독의 전작에서 텔레비전이 하나의 미장센처럼 활용된 바 있긴 하지만, 이번 작품에서는 단순한 미장센을 넘어 우주탐사, 소수자 차별 등과 함께 1960년대를 반영하는 지표 중 하나로 기능한다. 그렇다면 엘라이자가 영화관에 가지 않는 상황 역시 시대를 대변하는 것일까. 텔레비전이 처음 등장할 당시, TV에 영화 관객을 빼앗기게 된 현실을 우려하는 시각이 팽배했으나, 델 토로가 굳이 지나간 논란을 끌어들여 어느 쪽의 손을 들어주려는 것처럼 보이지는 않는다. 텔레비전을 통해 영화가 일상에 깊이 들어와 있다는 사실을 보여줄 뿐이다.
앞서 물어야 할 다른 질문이 있다. 기예르모 델 토로는 왜 별안간 영화관이라는 공간을 자신의 영화 내부에 새겨넣었을까. 델 토로의 영화에서 영화관을 다룬 적이 없었기에 이는 던져봄직한 질문이다. 질문을 이렇게 바꿔볼 수도 있겠다. 델 토로는 왜 영화관을 그리면서도 이를 전면화하지 않고 바깥으로 밀쳐두었을까. 결론부터 말하자면 영화관은 엘라이자와 자일스의 방이나 엘라이자가 근무하는 항공우주국에 비해 전면화된 공간은 아니지만 빛으로 어른거리거나 음악으로 스미며 구획된 경계를 넘는다. 이것은 감독이 영화관을 사유하는 중요한 지점이기도 하다. 감독은 인터뷰에서 ‘엘라이자의 공간이 시네필에게 최고의 장소’라는 의견에 동의하며 ‘엘라이자의 다락방에는 늘 영화가 상영되는 소리가 새어들어온다’고 설명하는데(장영엽 기자, <씨네21> 1143호), 이것이 공간을 바라보는 감독의 시각을 단적으로 드러낸다. 공간의 연결성은 감독이 언급한 대로 일단은 소리 혹은 빛으로 표현된다. 주목할 것은 순환하고 교환되는 영향의 방향성이다. 영화관이 엘라이자의 공간에 영향을 주는 동시에 때로는 엘라이자의 삶이 영화관으로 흘러들면서 두 공간은 교통한다. 엘라이자의 일상을 보여주는 첫 시퀀스에서 카메라의 움직임은 두 공간이 한축으로 연결되어 있음을 강조한다. 엘라이자가 연한 청록색 욕조에 물을 받는 장면에서 카메라는 직선으로 하강해 층 사이에 놓인 철근과 콘크리트를 지나 영화관까지 하나의 연결된 숏(플랑세캉스)으로 보여준다. 엘라이자의 공간 중에서도 특히 욕실과 영화관을 연결지은 대목은 의미심장하다. 두 공간의 연결은 제목이 말하는 ‘물의 형태’가 영화관 혹은 영화라는 매체와 긴밀한 관련을 맺고 있음을 암시하기 때문이다.
엘라이자가 크리처와 사랑을 나누는 결정적인 장면에 이르러 영화는 카메라 무빙을 통해 두 공간의 연결성을 표현하는 것을 넘어 엘라이자의 공간이 영화관에까지 흘러넘치는 상황을 약간은 코믹한 방식으로 기입한다. 엘라이자는 문틈을 막아 욕실 전체를 물로 가득 채우는 무모한 방식으로 로맨틱한 분위기를 연출하는데, 물은 아래층 영화관까지 흘러들어 입을 벌린 채 잠든 관객의 얼굴 위로 떨어지기에 이른다. 이때 관객의 얼굴은 정확히 천장을 향한 채다. 고개의 방향은 ‘진짜’ 영화가 상영되는 공간이 어디인가를 가리키는 것처럼 보인다. 물이 떨어지는 영화관은 오늘날의 시각에서 보자면 관객 얼굴에 물을 뿜곤 하는 4D 입체영화의 방식과 유사한데, 관객이 혼비백산하는 대목에서는 어쩐지 뤼미에르 형제의 <기차의 도착>(1895)을 보고는 놀라 달아났다는 초기 영화 관객이 연상된다. 다소 과장된 것이긴 하지만, 영화에서 설정한 시대적 배경인 1960년대 외에도 초월적인 시간이 그 순간 장소 안에 기입되며 곳곳에 흘러든다.
영화관을 투과해 흐르는 초월적 시간
영화관은 단지 엘라이자의 공간만이 아니라, 영화 곳곳에 빛을 드리우며 영화적인 것을 상상하고 발견하게끔 만든다. 달리 말해, <셰이프 오브 워터>에서 영화관은 고정된 공간이 아니라 움직이며 생성되는 공간이다. 영화에서 두드러지는 투명한 ‘물’들과 ‘막’들은 그 자체로 스크린과 다르지 않으며, 그것을 독특한 방식으로 화면에 불러들이는 자는 크리처다. 아가미 인간인 크리처의 몸을 감싸는 물은 크리처와 인간을 구분하는 일종의 막이다. 애초에 모양이 없는 물은 어딘가에 담겨야 하므로, 물은 다시 막을 소환한다. 델 토로의 전작에서 막은 괴생명체로부터 인간을 보호하는 데 더욱 효과적인 기능을 발휘했던 것이 사실이다. <크로노스>(1993)에서 달걀 모양의 곤충기계는 접촉된 인간의 신체를 파고들었으며, <미믹>(1997)의 바퀴벌레 인간 주다스와의 접촉은 곧 죽음을 의미했다. 그런데 <셰이프 오브 워터>에서 크리처의 파괴성은 은유적으로 표현되며, 비교적 온순하다. 보안책임자 스트릭랜드(마이클 섀넌)의 손가락을 물어버린 상황이 피투성이가 된 손과 바닥을 뒹구는 손가락으로 생략되는 사이, 엘라이자의 언어를 그대로 습득하는 크리처의 순수성이 빈틈을 메운다. 인간과 변종 사이에 필수적이었던 막은 접촉 가능한 것으로 변화한다. 처음에 단단한 큐브 속에 있던 크리처는 어느 순간 넓은 욕조 속에 몸을 숨기고 있다가 엘라이자를 맞는다. 욕조의 타일을 사이에 두고 두 사람은 조심스러운 대화를 시작한다. 다음 만남에서 크리처는 아예 욕조 바깥으로 빠져나와 있다. 그러나 상황은 그리 긍정적이지 않다. 스트릭랜드의 손가락을 물어버린 일로 물 밖으로 꺼내져 고문당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간 델 토로의 세계에서 괴생명체로부터 인간을 보호하기 위한 것으로 작용했던 막이 반대로 인간으로부터 크리처를 보호하기 위해 필수적인 것이 되었다는 것은 특징적이다. 델 토로는 괴물 같은 것과 인간이 얼마나 비슷한가를 주지시키면서도 끝내 화해할 수 없는 어떤 것으로 묘사해왔는데, <셰이프 오브 워터>에 이르러 그 관계는 뒤집힌다. 이런 상황이 괴생명체를 좁고 어두운 지하도가 아니라 2층 다락에서 누군가의 일상과 조우하도록 만든다.
기예르모 델 토로 감독의 괴생명체들이 인간의 일상을 파괴할 정도로 힘이 셌다는 것을 상기해볼 때, 영화 속에서 크리처는 엘라이자의 일상에 자연스럽게 녹아든다. 엘라이자가 크리처를 떠나보내기로 했던 건 크리처의 유약한 속성 때문이지, 인간계에 스며들지 못하는 파괴적인 속성 때문이 아니었다. 물론 크리처는 고양이의 머리를 뜯어 먹음으로써 그가 인간 생활에 완전히 동화될 수 없다는 것을 표시한다. 중요한 건 크리처의 행위를 대하는 자일스와 엘라이자의 반응이다. 이들은 고양이의 죽음을 애도하긴 하지만, 그것이 그들의 일상을 뒤흔든다거나 크리처를 내몰 정도의 일로 받아들이진 않는다. 섹스에서도 마찬가지다. 엘라이자와 크리처의 섹스가 암시적으로 표현되면서, 규칙적으로 이뤄져온 엘라이자의 자위행위와 크리처와의 섹스를 연속된 것으로 상정할 여지를 마련한다. 크리처와의 사랑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는 바로 ‘물’이었고, 엘라이자의 자위에서도 그랬다. 다만 크리처와의 만남 이후 물은 전보다 훨씬 남용되었고, 그녀의 자위행위 역시 좀더 확장된다는 인상을 준다.
막을 뚫고 들어가는 데 혈안이 된 우주 개발의 욕망과는 대조적으로 환상이 엘라이자의 삶에 침투하는 방식과 이에 관한 엘라이자의 반응은 부드럽고 나직하게 조응한다. 엘라이자가 크리처와 함께 뮤지컬 속으로 들어가는 환상 장면은 이를 잘 보여준다. 이때 환상의 틈입은 일상을 깨고 들어서는 것이 아니라, 조명의 변화를 통해 일상의 자리가 흑백 화면으로 대변되는 환상의 자리로 점차 전환되면서 성취된다. 흑백은 막의 일종으로 환상을 표시하는 경계이자, 엘라이자의 입장에서는 그 환상의 세계를 깨뜨리지 않은 채 그것과 합일되려는 겸허한 태도를 표시한다. 환상을 보존하면서도 그것에 도달하고자 하는 태도가 이 장면의 무드를 통해 강화된다.
환상과 일상의 공존
스크린은 괴생명체의 세계와 인간의 세계를 구획하는 투명한 막일 뿐 아니라 단단한 몸과 그 위를 뒤덮은 끈끈하고 축축한 막으로서 크리처의 신체 그 자체이기도 하다. 해부당할 위기에 처한 크리처를 구출하는 시퀀스를 통해 강조되는 크리처의 예민한 신체와 그 성질은 영화관이라는 공간, 그리고 필름이라는 물질을 연상시키는 데가 있다. 대책 없고 무모하기까지 했던 크리처 구출 시퀀스에서 가장 유효했던 전략 중 하나는 건물 전체를 일시적으로 정전시키는 것이다. CCTV의 시선을 피하기 위한 이 전략은, 영화가 상영되기 위한 필수조건 중의 하나인 어둠을 상기시킨다. 이러한 가정을 밀어붙이자면, 크리처를 위해 적절히 물의 염도를 만드는 장면은 곧 필름을 현상하거나 보존하기 위한 작업을 연상시킨다. 크리처가 이따금 스스로 빛을 낼 수 있다는 것 역시 스크린에 관한 하나의 은유와 맞닿는다.
크리처의 신체는 환상을 보존하는 최소한의 막들과 그 막이 우리에게 되비추는 환영들을 도처에 불러들인다. 영화관에서 브라운관으로, 브라운관에서 모니터로, 모니터에서 모바일 화면으로 환영을 재생하는 창구가 분화되고 쪼개어지는 오늘날의 양상이 영화에서 분기하는 끊임없는 막들의 향연을 통해 예고된다. “여기에 미래가 있다”는 구호와 함께 끊임없이 소환되는 청록 빛깔은 (파이 광고 문구의 녹색, 캐딜락의 청록빛) 실은 엘라이자의 시선이 거치고 간 일상의 막들이 내뿜는 빛을 가리키는 적절한 수식어처럼 보인다. 그중 하나가 엘라이자가 자일스와 함께 보던 텔레비전이다. 엘라이자와의 첫 만남에서 크리처는 투명한 큐브의 막 속에서 손을 뻗으며 존재감을 드러내는데, 이때의 큐브는 엘라이자가 자일스와 함께 보던 텔레비전을 연상시킨다. 어릴 적 텔레비전 속에 진짜 사람이 존재한다는 원시적인 상상을 했던 것을 기억해보면, 크리처가 안쪽에서 반응했을 때의 놀라움은 텔레비전 속에 존재하던 사람이 화면 밖에 존재하는 내게 말을 걸어온 것처럼 섬뜩하고도 기이한 일이었을 거라 짐작된다. 크리처의 신체는 곧 화면 속에 놓여 있던 환상의 대상으로서의 신체이며, 그 신체는 막을 벗어나 엘라이자의 삶에 서서히 스민다.
자일스의 텔레비전을 통해 흑백영화가 상영될 때, 텔레비전이 내뿜는 빛은 묘한 청록색을 띤다. 청록빛은 텔레비전 속 인물들이 마치 물속에 존재하는 것처럼 보이게 한다. 이를 통해 크리처와 텔레비전이 비추는 인물들은 하나의 계열을 이룬다. 물속에 존재하는 것처럼 보이는 인물들은 또 있다. 스트릭랜드의 집무실 한쪽 벽은 CCTV로 채워져 있는데, 나는 종종 영화 속에서 벌어지는 상황 대신 배경에 놓인 CCTV 속 인물들에게 시선을 빼앗기곤 했다. 존재는 보이지만 그들이 내는 소리는 들리지 않는 CCTV 속 인물들 역시 물속에 있는 것처럼 보인다. 소리를 번역하지 않는 CCTV가 정당하게 주장할 기회가 말살된 비주류 인간이 처한 상태를 암시함은 명백하다. 비주얼적인 연관성을 통해 위기에 처한 크리처와 TV 속 흑백영화, 그리고 CCTV 속 감시당하는 사람들, 특히 엘라이자와 젤다(옥타비아 스펜서)를 위시한 하층 노동자들이 비슷한 위치에서 나란히 정렬된다. 자일스에게 자신과 괴물이 다르지 않다고 강변하던 엘라이자의 주장은 이미지를 통해 이미 암시됐던 바다. 엘라이자가 이를 손으로 말하는 동시에 자일스의 입으로 반복시킨 이유는 그것이 관객을 향한 것임을 의미한다. 언어의 번역과 반복을 통해 엘라이자는 관객을 자신과 나란한 위치로 조용하지만, 단호히 끌어온다.
이 모든 것을 흡수하는 것은 다시 영화다. 엘라이자가 크리처를 찾아 영화관에 당도했을 때, 크리처는 영화관 중앙에 선 채로 영화에 몰입해 있다. 이때 영사되던 영화가 무엇이었고, 어떤 장면이었는가는 중요하지 않다. 앞선 인터뷰에서 감독은 ‘영화사적으로 의미 있는 작품이 아니라 작은 규모나 사소한 영화들이 우리에겐 더 중요할 수 있다는 것을 표현하고 싶었다’고 밝혔다. 이를 염두에 둘 때 중요한 것은 ‘어떤’ 영화가 아닌, 그저 영화를 보고 있었다는 상태 자체일 수 있다. 크리처가 영화관에 숨어들기 전 몰두해서 바라보던 것은 자일스가 크리처의 모습을 본떠 그린 몇장의 스케치들이다. 크리처는 그것이 자신의 얼굴임을 인지한 듯 유심히 들여다본다. 영화를 마주한 크리처의 정지된 응시는 그가 자신을 그린 자일스의 그림을 바라보고 있을 때의 정지 상태를 반복한다. 연속된 크리처의 응시를 통해 영화 매체와 크리처간에, 친연성을 넘어선 동일성을 상상할 여지가 마련된다. 인간의 언어를 알지 못하는 크리처는 영화의 내러티브나 캐릭터가 아닌 영화관의 스크린과 대면해 그것이 주는 기운을 흡수한다.
영화를 대면한 크리처의 응시
이제 대구를 이루는 오프닝과 클로징이 보여주는 거대하고도 비밀스러운 장막을 마주할 차례다. 크리처가 쓰러진 엘라이자를 안고 강물에 뛰어드는 마지막 시퀀스를 보고 난 뒤 오프닝 시퀀스를 돌이켜보면, 엘라이자가 물속에 잠긴 이유는 납득된다. 하지만 어째서 그녀의 방 전체가 물에 잠긴 것인가 하는 의문은 남는다. 델 토로는 <판의 미로: 오필리아와 세개의 열쇠>(2006)에서도 첫 장면의 비밀이 마지막에 이르러 풀리며 대구를 이루는 방식으로 극을 여닫은 바 있다. 오필리아가 피 흘리며 쓰러진 가장 결정적인 장면이 처음에는 역재생의 방식으로, 마지막에는 원래의 흐름대로 반복된다. 이와 대조적으로 <셰이프 오브 워터>의 오프닝은 결정적인 순간이라기보다 엘라이자가 잠에서 깨기 직전의 일상이다. 오프닝이 결말에 비추어 과거인지 미래인지조차 불분명한 이 시간은 그저 한순간 속에 정지한 채 보존되어 있다. 이때 물은 시간의 흐름 속에서 보존된 기억, 혹은 기억-물질로서의 영화라는 매체를 다시 환기한다.
물은 과거의 한순간으로 다가가기 위해 기억을 더듬는 양상을 시각화한 물질로도 보인다. 공간의 측면에서 보자면 카메라 워크에 의해 관계성이 내내 강조되었으나 분리된 것으로 존재했던 엘라이자의 방과 영화관이 그 순간 합일된다. 확장하면 그 순간 속에 일상과 환상이 더는 분리되지 않는 오늘날의 삶이 포개진다. 공간의 합일은 확고한 반면, 엘라이자와 크리처의 결합은 위태롭다. 특히 오프닝에서 왜 결합의 삶을 그리는 대신 엘라이자의 일상을 떼다놓은 것인지 의문스럽다. 오프닝과 클로징 장면에서 흘러나오는 자일스의 목소리는 하나의 설화로서의 ‘이야기성’을 강화하는 동시에, 어딘지 누군가의 죽음 이후 그의 삶을 기억하고 애도하는 것처럼 들린다. 특히 마지막에 시를 읊는 장면은 <악마의 등뼈>(2001)에서 카사레스가 죽음을 앞둔 캐서린에게 시를 읊어주던 장면과 겹친다. 그렇다면 자일스는 애도와 추모의 시를 읊은 것일까.
마지막 시퀀스의 환상을 동화처럼 믿을 것인가, 아니면 환상 이전에 벌어진 참혹한 광경에 마음을 둘 것인가. 델 토로는 관객에게 비슷한 질문을 한 적이 있다. <판의 미로: 오필리아와 세개의 열쇠>는 환상의 안과 밖을 고루 보여주며, 현실의 참혹함과는 대조적인 환상의 승리를 동시에 그린다. 다만 이번에는 환상과 현실이 대조된 채 분리된 것이 아니라, 현실과 환상의 체제가 점프하지 않고 하나의 흐름 속에 포개진다. 엘라이자가 크리처를 만난 뒤 홀로 욕조에 물을 받으면서 걸터앉아 슬쩍 욕조쪽을 바라볼 때, 그녀가 바라본 것은 물이자 환영이자 크리처였고 그것은 분리되지 않는다. 델 토로는 마치 모든 분리에 저항하기라도 하듯 현실과 환상은 서로 다르지 않다는 것을 그 순간 말하고 싶어한다. 시각적으로 감지할 뿐 잡을 수 없는 환영의 감각은 <셰이프 오브 워터>에서 크리처라는 살갗을 통해 육화되고 감각된다. 정말 크리처가 존재했는지 한낱 신기루였는지 알 수 없다. 신기루에 불과할지라도 이들의 포옹을 힘껏 믿을 수밖에 없는 건, 우리가 영화와 사랑에 빠지는 방식이 대개 그러하기 때문인지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