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예르모 델 토로 감독의 <셰이프 오브 워터: 사랑의 모양>(이하 <셰이프 오브 워터>)의 한국어 부제는 ‘사랑의 모양’이다. 사랑에 모양이 있을까? 사랑하는 대상과 내가 하나가 되려고 하는 절절한 움직임이 아마 사랑의 모양일 것이다. 하지만 그 모양이 무엇인지 말하기는 쉽지 않다. “내가 얼마나 당신을 그리워하는지 당신은 결코 모를 거예요”라는, 이 영화 속 노래가 전하듯, 사랑의 모양은 알 수가 없다.
어쩌면 이 영화에 등장하는 사랑의 모양은 원제인 ‘물의 모양’일지도 모른다. 물은 어떤 곳에 들어차느냐에 따라 달라지고, 들어가는 곳의 모양이 곧 물의 모양이 된다. 이것이 이 영화의 핵심이다. 물은 모양이 없으며, 또한 모든 것의 모양이기도 하다. 주인공인 엘라이자에게 물은 그녀의 정체성을 나타내는 도구다. 물에 잠긴 아파트에서 잠을 자고 있는 엘라이자를 보여주는 첫 장면은 그녀의 꿈이자 그녀의 미래이기도 하다. 아침에 일어나 욕조 속에서 자위를 하는 그녀의 습관은 엘라이자의 성적 판타지가 물과 관련됨을 드러낸다. 무엇보다 물속에서는 말을 할 수 없다는 점은 듣기는 하되 말은 못하는 엘라이자의 현실 자체다.
물의 속성이 모양이 없다는 데 있다는 건 다시 말해 물이 경계를 알지 못한다는 것이다. 물 바깥의 세상, 엘라이자가 사는 세상은 경계로 가득하다. 정상인/장애인, 남자/여자, 연구직/청소부, 백인/흑인, 미국인/소련인, 이성애자/동성애자, 인간/비인간 등 영화 속 세상은 이항대립적 코드들로 이루어져 있다. 보안담당자인 스트릭랜드가 이 이항대립적 경계들 바깥으로 빠져나올 수 없는 전형적 인물이라면, 그가 고문하는 아마존의 ‘괴물’(creature) 그리고 이 괴물과 사랑에 ‘빠지는’ 엘라이자는 경계를 위협하는 존재다. 물의 모양이란 뭔가? 경계를 위협하는 모양이다. 엘라이자가 괴물과 사랑을 나누기 위해 자신의 욕실을 물로 채우는 장면은 이 영화에서 가장 인상적인데, 가득 찬 물은 인간과 비인간을 결합시키고, 그 물은 아래로 새어나가 극장 천장 위에서 떨어지며, 욕실 문틈으로 삐져나간다. 경계를 나누는 문들에도 언제나 ‘틈’이 있으며, 물은 그 틈을 놓치지 않는다.
<셰이프 오브 워터>는 1960년대 초 냉전시대 미국이 배경이지만, 영화 속 이미지와 이야기 자체는 매우 동화적이고 몽환적이다. 현실적이라기보다 사랑의 본질이 가진 한 속성을 매우 전형적이고 단순한 이야기 속에 녹여낸다는 느낌이다. 사랑의 한 본질은 그것이 언제나 나누어진 경계를 뒤흔들고, 틈을 통해 빠져나가며, 결국에는 경계를 무너뜨리기도 한다는 점이다. 이 영화가 연상시키는 <미녀와 야수>가 야수를 끝내 인간으로, 그것도 잘생긴 왕자님으로 만들어 다시금 인간 중심적 경계를 짓는다면, <셰이프 오브 워터>는 괴물을 끝내 괴물로 남겨두며, 오히려 인간의 상식과 과학을 무화시킨다. 그를 통해 시간은 앞으로 가는 게 아니라 뒤로 가고(대머리에 머리카락이 나고, 상처가 아물 듯), 말 못하는 이가 소통을 하며, 목의 상처가 아가미로 변함으로써 엘라이자의 꿈은 이루어진다. 괴물과 인간의 사랑을 통해 이 영화는 인간을 낯설게 만들어버린다.
영화가 그리듯, 사랑이 모든 것을 구원해주지는 않는다. 사랑은 나의 모든 것이 구원되는 어떤 ‘순간’만을 선사할 뿐이다. 하지만 엘라이자가 그렇듯이, 한순간의 변화는 사실 모든 것의 변화일 수도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