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의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목가적인 풍경을 헤집어 흩뜨리는 데 마틴 맥도나만큼 뛰어난 재능을 보여주는 감독은 없었던 것 같다. <킬러들의 도시>(2008)에서 벨기에의 중세도시 브루게를 난장판으로 만들었던 그는, 전작인 <세븐 싸이코 패스>(2012)에 이르러 사이코패스의 얼굴을 할리우드의 작가 세계와 겹쳐놓았다. 어쩌면 역설적인 이유 때문에 조용하고 틀에 박힌 배경을 선호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이번 영화 <쓰리 빌보드>에서도 아름다운 미주리주의 작은 마을은 완전히 파괴되고 헤집어진다. 마크 트웨인의 소설을 통해 각인됐던 미국 중서부의 풍요로운 자연풍광은 이 작품을 거쳐 ‘끔찍한 사건으로 딸을 잃은 어머니의 복수극’이 펼쳐지는 배경이 된다.
드라마투르기를 따르지 않는다
생각해보면 단 한번도 맥도나의 영화에서 주요 캐릭터들이 감정에 휩싸여 불타오르거나, 관객이 이입할 만큼 자신의 내면을 정확하게 드러낸 적은 없었다. 프랜시스 맥도먼드가 연기하는 밀드레드 역할은 이번 영화에도 냉정하게 표리부동한 채로 서 있다. 처음부터 끝까지 그녀는 분노하지만, 불필요한 내적 갈등을 드러내지 않는다. 언뜻 ‘밀드레드의 복수’로 초점이 맞춰진 듯 보이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다. 해결되지 않은 분노가 불합리한 지점에서 충돌하여 관객을 괴롭힐 뿐이다. 이후 어머니의 복수가 아닌 ‘죄의식의 문제’로 극의 관심사는 옮아간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 밀드레드의 표정은 여전히 냉정하고 거침없다. 병에 걸린 월러비 서장(우디 해럴슨)과 대화할 때도, 심지어 자신으로 인해 다친 경찰과 논의할 때도 마찬가지다. 어쩌면 마틴 맥도나의 작품이 독특하다고 말하는 가장 큰 이유는 이처럼 영화 속 캐릭터가 지닌 감정의 사용방법에서 오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의 영화는 캐릭터의 장점을 최대한 부각하되 그 효과를 당연한 듯 소비하지 않는다. 그리고 동시에 장르적 외관을 강하게 붙잡고 있다.
얼마 전 맥도나의 이번 세 번째 영화가 아카데미상 주요 부문에 노미네이트된 후로, 그의 심도 있는 재기발랄함에 대한 분류의 문제는 영화 팬 모두에게 일종의 숙제가 되었다. 연극에 이어 영화의 주요 부문까지, 이제 ‘거장’이란 칭호가 아깝지 않는 행보를 그는 보이고 있는 중이다. 어린 시절 아일랜드계 부모를 지닌 잉글랜드 출신의, 매끄럽지 않은 과거를 자랑하는 이 40대 중반의 젊은 영국인 감독에 대해 ‘코언식 누아르’냐 ‘블랙코미디의 요소’냐 혹은 ‘현대 미국 문화에 대한 형이상학적 접근’이냐 하는 식의 방식으로 그가 속한 영역을 설명하는 노력은 한계를 보인다. 오히려 그의 영화 세계를 지배하는 아이러니하고도 그로테스크한 세계관은, 삶에서 체득한 비극의 본질과 연관되어 있다고 생각해야 할 것이다. 스스로 <뉴욕타임스>에 자찬했던 것처럼 “셰익스피어보다 몇 천배 더 나은 작가”라는 과장된 표현 또한 자신의 과거사와 비견한 승승장구한 행보에 대한 보상심리로 보인다. 만일 이처럼 사회적 환경 안에서 발생된 불합리의 지점들을 실제의 ‘생존’과 연관되어 있다고 해석한다면, 예를 들어 <세븐 싸이코 패스>에서 보여주었던 ‘폭력적이지 않은, 삶에 관한 사이코패스 영화’와 같은 맥도나의 이중적 장치들은 그야말로 ‘비극의 (실질적) 변주’라는 작가적인 관점에서 설명될 수 있다.
넓은 의미에서 마틴 맥도나를 셰익스피어 비극의 정통적 후계자라고 바라본다면 예를 들어 <쓰리 빌보드>를 <햄릿>에 대한 현대적 변주로, 그리하여 무수하게 주변을 떠도는 ‘햄릿 왕’의 유령에 대한 재배치로 읽는다면, 영화에서 형사 사건의 시발이 되는 ‘살인사건’은 ‘모성애로 출발한 복수’와 전혀 다른 의미로 읽히게 된다. 실제로 월러비 서장은 자신이 암에 걸린 것을 밀드레드가 알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곧장 그녀에게 이렇게 되묻는다. “당신은 내가 아프다는 것을 알고도, 그 전광판에 내 이름을 올린 거요?” 그녀의 대답은 간단명료하다. “더 효과적이기 위한 장치”이기 때문에 그녀는 스스로 정당하다 말한다. 무심한 듯 섬세한 계산의 행동을 ‘딸을 잃은 슬픔’ 혹은 ‘엄마의 용기’ 정도로 완벽히 방어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자신이 불러오는 타인에 대한 상처를, 이 작품의 여주인공은 완벽하게 무감각하게 받아들인다. 매우 유머러스하지도 혹은 사회적 메시지를 던지지도 않는 이러한 상황을 블랙코미디의 장치로 읽기도 힘들다. 애초부터 밀드레드 캐릭터는 <파고>풍의 취향이 워낙 강한 데다 극 안에서 무언가를 쌓아서 관객에게 내미는 것이 아니라, 이미 가지고 있는 역할을 난데없이 드러내는 데 더 골몰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이는 마치 맥도나의 지난 영화들에서 보았던 배경의 사용 방식과 흡사하다. 과거 중세도시를 난장판으로 만들었던 킬러들의 행보를 지켜보았듯, 이번 영화는 미주리주의 자연환경과 상반되는 사회적 사실을 발견하는 점이 다를 뿐이다. 한마디로, <쓰리 빌보드>의 드라마투르기가 지닌 세세한 상황들은 ‘전체 사건(혹은 배경)’을 향해 스스로를 내던지지 않는다. 명시된 선언에 대해 개별적으로 접근할 따름이다.
셰익스피어의 후예
과거 거장들이 보였던 드러내기 방식, 비견컨대 마틴 스코시즈풍의 대위법적 나열을 이 영화 역시 사용하고 있다. 하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마틴 맥도나가 극을 지배하는 방식은 이전과 구별된다. 코언식 누아르 코미디 장르와 비교해도 마찬가지다. 오히려 그는 좀더 본질을 뒤집어 흔든다. 영국 혹은 더 과거로 거슬러 올라가야 하는 이유다. 현대사회의 내부적 문제나 장르의 요소가 아닌, 다른 어딘가에 숨겨진 지점을 향해 극은 간접적으로 끊임없이 부유한다. 이 극작의 목적지는 다름 아닌 고전적 비극에 있는 것 같다. 익숙하지만 인공적인 기존 시나리오의 도식들, 말하자면 <햄릿>을 발판 삼아 그는 그곳을 벗어나려 애쓴다. 그러던 중 마치 연극에서 행하듯 ‘스스로 발설하고 말하는 과정’을 통해서 사건들은 표면화된다. 심지어 범인이라 추정되는 인물마저도, 맥도나는 스스로의 행위를 말하도록 유도한다. 그 과정에서 등장인물 중 하나가 우연히 ‘꿈을 꾸듯’ 범인들의 대화를 엿듣는다.
죽은 왕이 햄릿의 꿈에 등장하여 자신의 죽음에 대한 비밀을 발설하듯, 어린 딸의 환영과 월러비의 환영은 각각 밀드레드와 딕슨(샘 록웰)에게 영향을 주는 꿈의 지표로 작용한다. 이들 각각의 관계도가 파편화되고 파헤쳐져 있더라도, 죽음의 진상을 알리며 복수를 부탁하는 셰익스피어의 환영은 영화 곳곳에 숨어서 이 극을 지탱한다. 설령 마틴 맥도나가 의도하지 않았더라도, 고전의 환영은 마치 브루게라는 도시처럼, 그리고 할리우드영화계처럼 작품의 발단이 된 것이다. 그러니 우리는 캐릭터의 개별 감정에 큰 의미를 부여해 해석할 필요가 없다. 처음부터 <쓰리 빌보드>는 냉철한 현상 드러내기가 목표인 작품이었다. 돌이켜보면 마틴 맥도나의 이전작에 있어서도 플롯 전개의 주요 사건들은 모두 ‘영화 프레임의 바깥’에 놓여 있었다. 이번과 같다. 겉보기와 일치하지 않는 부조리한 배경으로 캐릭터들이 뛰어든 뒤, 서스펜스가 자취를 감춘 복수극의 빈자리를 과장된 현실의 아이러니가 채워간다. 이 과정에서 상황적 변수에 대한 유동적 대처는 의도적으로 회피된다.
돌이켜보면 <쓰리 빌보드>에서 진짜 비극적 인물은 스스로 ‘죽음’을 선택한 인물인 윌러비 서장, 단 한명뿐이다. 의문의 시작점이었던 ‘딸의 복수’라는 키워드는 상황을 반전시켰을 뿐 밀드레드를 온전한 비극의 주인으로 만들어주지 못한다. 이 복잡다단한 변주의 과정, 손쉬운 메커니즘을 거부하는 블랙유머의 터치가 마틴 맥도나의 손길을 거치며 고전을 바꾸어놓는다. 그의 말처럼 셰익스피어보다 몇 천배 뛰어나지는 않더라도, 적어도 그가 셰익스피어의 후예라는 점은 분명해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