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의 시작, 밀드레드(프랜시스 맥도맨드)는 광고 회사의 창가에서 뒤집힌 채 버둥거리는 벌레가 되살아나도록 도와준다. 그런 그녀의 귀에 웰비(케일럽 랜드리 존슨)의 말이 날아와 꽂힌다. 광고 기간은 부활절 전까지입니다. 전남편 찰리(존 호킨스)는 빌보드를 세운들 죽은 안젤라(캐서린 뉴턴)는 돌아오지 않는다고 말한다. 광고의 내용은 딸을 죽인 범인에 관한 것이건만, 어째서인지 영화는 자꾸 무언가의 ‘부활’을 언급한다. 그러므로 이 글은 하나의 질문에서부터 시작하려 한다. <쓰리 빌보드>는 무엇의 부활을 기다리는가.
언어의 엄중함
대답에 닿기 위하여 먼저 영화를 회상해보자. 빌보드 앞에 처음으로 등장하는 것은 딕슨(샘 록웰)이다. 그는 “마오!” 같은 소리를 내며 다가오고 질문을 제대로 전달하지 못해서 쩔쩔맨다. 그는 늘 서툴고 어눌하게 말하지만 간혹 젠체하며 ‘환경보호법’ 혹은 ‘유색인종’ 같은 단어들을 언급한다. 이때 딕슨이 서툴게나마 어려운 용어를 구사하는 이유는 그가 다름 아닌 경찰이기 때문이다. 이 영화에서 경찰서는 언어 권력의 공간이다. 민간인이 경찰서에서 욕을 하면 그들은 크게 화를 낸다. 이곳의 서장 윌러비(우디 해럴슨)는 마을에서 좋은 사람으로 정평이 나 있지만 실상 그의 언어 사용 방식은 의뭉스럽다. 그는 규칙을 내세우며 실체를 가리고 이를 우아한 언어로 포장하길 좋아한다. 범인 추적에는 ‘인권법’을, 딕슨의 고문 혐의에는 ‘확증’을 운운하는 식이다. 그의 캐릭터를 단면적으로 드러내는 것은 낚시 게임에 관한 장면이다. 윌러비는 담요를 벗어나선 안 된다며 아이들이 발음하지도 못하는 어려운 용어들로 규칙을 설명하고, 뒤에서는 아내와의 은밀한 섹스를 즐긴다. 그가 죽기 전 뇌까리는 “오스카 와일드”의 실상은 음담패설에 다름 아니다. 밀드레드는 이런 위선적인 언어들을 파헤쳐서 그 속에 숨겨진 실체를 찾으려고 한다. 암에 걸렸다고 하면 알고 있다고 받아치고, 낯선 남자가 던지는 폭력적인 질문에는(“내가 그 강간범일까?”) 진실을 따져 묻는다(“진짜야?”). 그녀의 곁에는 늘 진실의 말을 감당하는 자의 비애감이 감돈다. 그녀의 유일한 실수는 언어의 엄중함을 더 일찍 깨닫지 못한 것이다. 그녀가 딸에게 내뱉은 실언은 잔인한 현실로 되돌아온다.
그런 면에서 밀드레드는 딕슨의 어머니와도 만난다. 여자친구(woman)가 없다는 딕슨의 말에 딕슨의 엄마는 알고 있다(yeah, I Know)고 짓궂게 대답하고(이는 딕슨이 동성애자임을 알고서 조롱하는 모습으로 보인다) 유독 깔깔대며 오래 웃는다. 집을 떠나는 아들의 모습 위로 그녀의 웃음소리가 오버랩된다. 그 후 딕슨은 폭행을 당한 채 피를 흘리며 집에 되돌아온다. 무심코 던진 폭력의 언어는 현실의 폭력으로 되살아나 그녀들을 오열케 한다. 이런 아비규환 속에서 언어의 순수성을 지키는 것은 어린 여자들이다. 페넬로페(사마라 위빙)는 자신을 비하하는 맥락을 모른 채 동물원에서 해고된 사정을 열심히 설명하고, 광고사 여직원은 잘했다는 빈말에 진심으로 기뻐한다. 원뜻 그대로 언어를 구사하는 그들의 천진난만함은 밀드레드의 분노를 누그러뜨린다. 이런 맥락에서 나는 사건의 범인으로 서장 윌러비를 의심한다. 밀드레드가 딸 안젤라에게 강간을 언급하는 장면 뒤에 윌러비는 아내의 엉덩이를 더듬고 있다. 윌러비가 딸들을 재우는 장면과 아내에게 키스하는 장면은 너무 긴밀하여 당황스럽고, 아내는 윌러비를 두고 “아빠”라고도 부른다. 영화는 자꾸만 어린 여자들과 윌러비를 성적으로 연결 짓는다. 그는 결국 언어의 권위가 배제되는 마구간에서 죽음을 맞이한다.
복수의 수단이 광고 언어인 이유
언어의 냉혹함을 온몸으로 깨우친 밀드레드가 복수의 수단으로 광고를 택한 것은 당연한 일이다. 빌보드는 공중에 떠다니는 실체 없는 언어를 단단히 붙잡아서 그것을 붉고 거대한 실체로 돌려놓는다. 온 마을은 혼비백산한다. 그 이유는 그것이 품위 있는 언어 뒤로 도피한 마을 사람들을 끌어내어 사건의 진실을 똑똑히 목도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이때 빌보드의 붉은색은 진실을 까발리는 외설의 색인 동시에 안젤라의 몸에 붙었던 불의 귀환이다. 이때부터 빌보드의 붉은 이미지는 마치 주술처럼 차례로 다른 것에 옮겨간다. 윌러비는 빌보드가 언급될 때마다 피를 흘리고, 결국 얼굴의 메모지를 피로 붉게 물들이며 마치 빌보드가 얼굴을 덮친 것 같은 형상으로 죽음을 맞는다. 붉은 이미지는 빌보드에 붙은 불로 되돌아온다. 여기서 우리는 하나의 결정적 장면과 마주한다. 까맣게 타버린 빌보드와 활활 타오르는 다른 빌보드. 밀드레드는 그 사이를 온몸으로 내달린다. 위선과 권위의 언어에 맞서 저항하던 그녀의 힘겨운 싸움은 이제 거대한 불길을 향해 질주하는 실루엣으로 드러난다. 그 무모하고 치열한 움직임은 뭐라 형언할 수 없을 만큼 비장하고 아름답다. 밀드레드는 경찰서에 불을 내고, 마침내 경찰서는 붉은색의 ‘안젤라 파일’을 세상 밖으로 토해낸다. 그 후 화상을 입고 입원한 딕슨은 웰비와 마주친다. 이때 딕슨의 시선을 오래도록 담아내는 시선 숏을 기억해보자. 이 영화에서 폭력을 응시하는 자들은 주로 흑인이며 딕슨은 과거 흑인을 고문하기도 했다. 따라서 그는 지금 본인이 고문한 자의 자리에서 본인이 폭행한 자를 응시하고 있다. 이 잔인한 자리바꿈은 끝내 딕슨을 변화시키며 그로 하여금 피해자의 자리를 생각하게 만든다. 이것은 밀드레드가 문구멍을 통하여 흑인 제롬을 내다보던 자리에 딕슨이 서서 인사하는 장면에서 다시 한번 확인된다. 딕슨은 범인을 잡기 위하여 온몸으로 폭력을 받아내고, 마침내 자신의 피 묻은 손 사이에서 단서를 찾는다. 그러나 결과는 비극으로 끝이 난다. 영화는 진실을 폭로하던 붉은색은 이제 잠들어버렸음을 보여주며(붉은 조명 아래 잠든 딕슨의 어머니와 붉은 티를 입고 잠든 아들 로비) 길었던 여정의 끝을 맺는다.
그렇다면 이 완연한 실패 앞에서 마침내 부활한 것은 무엇인가. 나는 딕슨이 되찾은 배지에 힌트가 있다고 생각한다. 그는 피 흘리며 범인을 찾고 나서야 잃어버렸던 경찰 배지를 되찾는다. 이것은 밀드레드가 빌보드를 통하여 마침내 회복한 것이 무엇인지를 알게 한다. 영화는 무너지는 언어 속에서 몸을 던져 실체를 찾는 자만이 새로운 길을 떠날 수 있다고 말한다. 이 영화에서 유일하게 부활하는 것은 아마도 그 길을 떠날 수 있는 자격일 것이다. <쓰리 빌보드>는 교묘한 말들로 실체를 옭아매는 세상에 대하여 마틴 맥도나가 선사하는 언어의 서부극이다. 그들은 쏟아지는 언어 속에서 자신만의 정의를 향하여 뚜벅뚜벅 나아간다. 떠나가는 밀드레드와 딕슨의 모습 뒤로 빌보드가 보이지 않는 이유는 그들이 더이상 언어를 필요로 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를 증명하듯 자신이 경찰서에 불을 질렀다는 밀드레드의 고백에 딕슨은 뻔한 소리라고 응답하고 밀드레드는 환한 미소로 화답한다. 그들은 이제 남자를 죽이는 것에 확신이 없다. 아마도 남자의 공허한 말들을 의심하는 것이리라. 밀드레드는 천천히 생각해보자고 하지만 그들의 답이 무엇인지 우리는 이미 알고 있다. 영화는 잠자코 길을 가는 그들의 마지막을 지켜보며 끝이 난다. 영화의 영향인가. 내게 <쓰리 빌보드>는 무수히 나부끼는 언어들 속에서 처절하게 빛나던 단 몇 장면으로 남았다. 그러므로 어찌하여도 이들을 언급하며 글을 끝낼 수밖에 없을 것 같다. 불붙은 빌보드 사이를 내달리는 밀드레드, 피 묻은 손을 떨며 글씨를 새겨넣는 딕슨, 마지막에 그들을 감도는 무심하고 평온한 공기. 두말할 것 없는 걸작의 탄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