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2]
<레이디 버드> 사랑하고 사랑하는 세상의 모든 소녀들에게
2018-04-02
글 : 장영엽 (편집장)
그레타 거윅의 감독 데뷔작, <레이디 버드>가 보여주는 평범한 소녀들의 경이로운 우주

“네명의 남성감독과 그레타 거윅.” 제90회 미국 아카데미 시상식 무대에 오른 배우 에마 스톤은 올해의 감독상 후보자들을 이렇게 소개했다. 감독상과 더불어 작품상, 여우주연상, 여우조연상, 각본상 등 아카데미의 주요 부문 후보에 대거 노미네이트된 그레타 거윅의 <레이디 버드>는 2018년 아카데미 시상식의 다크호스였다. 아쉽게도 주요 부문 수상은 불발됐지만 이 영화가 아카데미의 다양성을 보여주기 위한 제스처에 불과했다는 짐작은 하지 않길 바란다. <레이디 버드>는 올해의 베스트영화 중 한편으로 꼽기에 손색없는 성장영화이자 또 한명의 재능 있는 미국 여성감독의 탄생을 알리는 보석 같은 작품이다. 보고 나면 사랑에 빠질 이 영화는 당신의 마음 또한 훔칠 것이다. 4월 4일 개봉을 앞둔 <레이디 버드>에 대한 글과 그레타 거윅 감독, 배우 시얼샤 로넌과의 만남을 전한다.

새크라멘토라는 곳을 아는가. 아마 누군가는 이름쯤 들어보았을 테고, 누군가는 그보다 조금 더 많은 것들을 알고 있겠지만 미국인을 제외한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새크라멘토는 낯선 장소다. 이곳 출신의 미국 작가 존 디디온은 “캘리포니아의 쾌락주의를 말하는 자는 새크라멘토에서 크리스마스를 보내봐야 한다”고 말했다(이 말은 영화 <레이디 버드>의 오프닝에 등장한다). 그녀의 말대로, 미국 캘리포니아주 한복판에 위치한 이 동네는 같은 주에 있는 도시 샌프란시스코만큼 유명하지도 않고, 로스앤젤레스처럼 화려하지도 않다. 더할 것도 없고, 그렇다고 덜할 것도 없는, 말 그대로 사람 사는 동네. 영화의 극적인 배경이 되기엔 어딘가 지나치게 평범한 도시. 그곳이 바로 새크라멘토다.

영화 <레이디 버드>는 새크라멘토에 사는, 새크라멘토만큼이나 평범한 17살 소녀의 이야기다. 그녀의 이름은 크리스틴 ‘레이디 버드’ 맥퍼슨(시얼샤 로넌). 누구라도 알아볼 수 있도록 머리를 붉게 물들이고, 부모가 지어준 이름 대신 ‘레이디 버드’라 불리길 원하는 소녀의 꿈은 특별한 존재가 되는 것이다. 하지만 2002년이 2로 시작해 2로 끝난다는 게 가장 흥미로운 ‘사건’일 만큼, 그녀의 일상은 특별함과는 거리가 멀다. 지금, 이곳에서 크리스틴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곤 새크라멘토 저 너머에 있을 특별한 미래를 꿈꾸며 자신의 정체성을 온몸으로 부정하는 것뿐이다. <레이디 버드>의 오프닝 신에서, 차를 운전하는 엄마에게 건네는 크리스틴의 첫마디는 “내가 새크라멘토 사람처럼 생겼어?”다. 딸의 푸념을 가볍게 제압하는, 엄마 매리언(로리 멧커프)의 심드렁한 대답이 더 압권이지만. “그래, 네 인생이 최악이다. 네가 이겼어.”

<레이디 버드>는 뉴요커가 되고 싶은 새크라멘토 소녀의 성장담이다. 영화는 가톨릭 고등학교 졸업을 앞둔 17살 소녀 ‘레이디 버드’의 한해를 조명하며 그녀를 중심으로 공전하는 세계의 풍경을 애정어린 시선으로 담아낸다. 가족과의 갈등, 친구와의 우정과 질투, 이성에 대한 호기심과 좌절, 진로에 대한 고민, 미래에 대한 갈망…. <레이디 버드>는 그야말로 성장영화의 공식을 충실히 따르는 영화다. 하지만 동시에 이 작품은 그 어떤 성장영화와도 같지 않다. 한사람의 청춘이 다른 누구의 그것과도 같지 않듯이. 언뜻 익숙해 보이는 <레이디 버드>의 서사를 좇다보면, 처음과 비슷하지만 결코 같지 않은 경유지(종착지가 아니다. 삶은 계속되기 때문이다)에 도달한 자신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저마다의 모험에 임하는 영화 속 등장인물들에 대한 애틋한 마음 그리고 그들의 영화 속 현재가 일깨우는 관객 각자의 추억도 함께다. 우리가 성장영화를 사랑하는 이유가 이 한편의 영화에 담겨 있다. 이 작품이 그레타 거윅의 감독 데뷔작이라는 점이 놀라울 따름이다.

<레이디 버드>를 둘러싼 가장 흥미로운 비하인드 스토리는 새크라멘토에서 자라 ‘뉴요커’가 된 여성감독 그레타 거윅이 각본과 연출을 맡았다는 점일 것이다. 하지만 <레이디 버드>는 그레타 거윅의 자전적인 이야기인 동시에 그녀의 실제 삶과 일정 거리를 유지하는 영화다. 영화 속 ‘레이디 버드’와 마찬가지로 새크라멘토에서 가톨릭 고등학교를 졸업했으며 뉴욕에서 대학을 다녔고 어머니가 간호사였지만, 거윅은 스스로를 다른 이름으로 부르지 않았으며 학창 시절 내내 규칙을 무척 잘 따르는 아이였다고 한다. 그런 그녀에게 <레이디 버드>의 시나리오를 쓴다는 건 자신과 사뭇 다른, 엉뚱하고 용감한 소녀의 마음을 알아가는 과정이었다. “처음 <레이디 버드>의 각본을 쓸 때, 뭔가 하나가 안풀린다는 느낌에 그것에만 매달려 있던 때가 있었다. 다른 건 모두 멈추고 빈 종이 위에 이렇게 썼다. ‘왜 날 레이디 버드라고 부르지 않아? 그렇게 하겠다고 약속했잖아.’ 모두에게 이 이상한 이름으로 자신을 부르게 하는 이 소녀를 난 꼭 이해하고 싶었다.”

엄마가 자신을 레이디 버드라 부르지 않자, 항의의 제스처로 달리는 차 문을 열고 뛰어내린 소녀. 이토록 극단적인 방법을 택하면서까지 온전히 자기 자신이 되고 싶었던 17살. <레이디 버드>는 결국 이 소녀를 이해해나가는 과정의 영화다. 그레타 거윅은 레이디 버드의 목소리를 빌려 그녀의 내면을 드러내는 대신, 소녀가 세계와 맺는 관계를 통해 그녀의 성장을 보여주는 방식을 택했고 이러한 선택이야말로 <레이디 버드>를 특별한 성장영화로 만든다. 무엇보다 그레타 거윅은 17살 소녀에게 가장 중요한 영향을 미치는 ‘세계’는 엄마와 동성 친구라는 점을 분명히 한다. “10대 소녀에 대한 영화라면 으레 이야기의 중심에 한 소년이 놓여야 마땅할 거다. 잘생긴 학급 남자친구가 인생에 산적한 모든 문제의 해답이라는 식으로 말이다. 하지만 내가 생각하는 인생이란 그런 것과는 전혀 상관이 없다. 내가 아는 대부분의 여성은 청소년 시절 각자의 어머니와 그 무엇보다 아름답고 헤아릴 수 없이 복잡한 관계를 맺었다고 한다. 나는 그 모녀 관계를 영화에 중심에 두고 싶었다.” 오랫동안 <레이디 버드>의 가제를 ‘엄마와 딸’로 염두에 뒀다는 그레타 거윅은 엄마 매리언과 레이디 버드의 관계를 극의 중심부에 놓는다. 딸이 매 순간 최고의 모습이길 바라는 엄마와 그런 엄마가 더 너그러운 사람이길 바라는 딸은 늘 격렬하게 부딪히지만 서로를 열렬히 사랑한다. 영화의 후반부, 고향을 떠나게 된 딸에게 따뜻한 말 한마디 하지 못한 채 공항 주변을 몇번이고 맴도는 매리언의 모습은 아버지와 남자친구를 경유하지 않는 모녀 관계가 얼마나 강렬한 드라마를 가지고 있는지에 대한 좋은 사례다. 한편 센 성격조차 판박이인 모녀를 오가며 티나지 않게 다독이는 조력자의 역할은 이번 영화에서 아버지(트레이시 레츠)의 차지다. 레이디 버드와 그녀의 베스트 프렌드 줄리(비니 펠드스타인), 학급의 ‘잇 걸’ 제니(오데야 러시)가 이루는 삼각 구도도 흥미롭다. 부모보다 더 많은 것을 공유하는 친구 줄리와, 레이디 버드가 가지지 못한 모든 ‘특별함’을 지닌 것처럼 보이는 제니는 모녀 관계와는 또 다른 방식의 강렬한 드라마를 만들어낸다. 특히 우여곡절 끝에 줄리의 소중함을 깨닫게 된 레이디 버드가 프롬 드레스를 입고 줄리의 집으로 향하는 장면은, 미국 10대 성장영화에 반드시 등장하는 프롬 파티의 전형성을 영리하게 비튼 이 영화의 명장면이다. 질풍노도의 시기를 겪는 세명의 소녀가 등장함에도 매력적인 이성친구를 두고 경쟁하거나 특정 여성 캐릭터를 설득의 여지 없는 악녀로 만들어버리는 자극적인 설정이 없다는 것도 이 영화의 인상적인 점이다.

“여성을 위한 <보이후드> 같은 영화는 없는 걸까? 여성을 위한 <400번의 구타>는?” 지난해 10월 뉴욕영화제에 참석한 그레타 거윅은 관객에게 이런 질문을 던졌다고 한다. 여성의 시각으로 바라본 세계, 여성이 주체적으로 맺는 관계망을 조명한 ‘걸후드’ 영화의 필요성을 그녀는 인지하고 있었고 이 작품으로 그 대답을 대신했다. <레이디 버드>는 지극히 생동감 넘치는 여성의 언어와 영상으로 다시 쓴 소녀 성장담이자 세상의 모든 ‘소녀’들에게 바치는 러브레터다. “그녀가 내 삶도 연출해줬으면 좋겠어요.” 그레타 거윅이 <레이디 버드>를 연출하는 영상이 인터넷상에 게시되자 한 네티즌이 남긴 댓글을 보았다. 이 말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굳이 부연설명을 하지 않아도 될 것 같다.

사진 UP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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