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비평]
<120BPM>의 운동하는 사랑은 절대적이며 운명적이다
2018-04-03
글 : 이지현 (영화평론가)
고통 위에 선 품위

이렇게 말한다면 어떨까. 첫 장면이 좋은 영화는 많았지만, 이 정도로 강렬했던 적은 없었다고. 90년대 초의 파리, 에이즈에 감염된 사람들의 권리를 보호하기 위해 만든 행동주의 단체 ‘액트업’에 새로 가입한 멤버들이 소개되며 영화 <120BPM>이 시작된다. 마치 다큐멘터리 같은 건조하고 소란스런 주간회의의 풍경을 거쳐서, 동성애에 대한 공권력의 시선과 거대 제약회사의 대응, 그리고 무관심 안에서 사라져가는 젊은이들의 모습이 차례로 화면에 비친다. 이들을 에워싼 준엄한 공기는 쉽사리 바뀌지 않는다. 오늘날처럼 이미지를 대량 확산시킬 수 없는 과거의 세월에, 영화 속 세대들은 서로 만나서 대면해야 했다. 그들이 행동하며 보여주는 의사소통의 구조를 영화는 직접 소개하고 있다. 제목이 말하듯 평범한 사람들의 70bpm 맥박 수가 아닌, 하우스음악의 비트가 그들의 심장을 지배한다. 시한부 삶을 산다는 인식에 얽혀서 그들은 스스로를 더 긴박한 상황으로 내몰고 있다. 대화보다는 행동을, 협의보다는 충돌을, 그리고 위로보다는 현실을 즐길 것을 소리 높여 외친다. 다소 충격적인 플래시백과 플래시포워드 화면이 융합되면서 불협화음의 목소리가 점차 커진다.

색채가 다른 화면들이 차례대로 변주되어 등장하기에, 언뜻 영화의 전체적 목표를 가늠하기 어렵다. 하지만 분명한 점은 영화가 멀리서 관망하는 태도를 취한다는 것이다. 이를테면 병원 장면 이전까지 시점숏은 거의 등장하지 않는다. 비극적 사랑이 주축을 이루지만, 공적 영역의 사건과 합체되어 내면의 이야기는 가려진 채 소개된다. 그럼에도 과거 활동이 단순히 배경에 그치지는 않는다. 극단적 강도의 낭만성과 상충되어 묘사되는 단체의 모습을 통해, 영화는 단순한 사실주의 극으로부터 벗어난다. 어쩌면 감독의 자전적 이야기이기에 더 정교해진 것인지 모르겠다. 감독의 경험이 상당수 포함되었을 것으로 짐작되는 ‘나톤(아르노 발로아)’ 캐릭터를 중심으로, 영화의 화면 구상은 크게 네 가지 방식으로 구분된다. 비록 영화가 개념화를 회피하지만, 이러한 분석을 통해 작품이 표현하는 감정을 말할 수 있게 된다. 행복부터 낙담까지, 영화의 분위기는 끊임없이 변화한다.

다큐멘터리 톤이 주는 현실감

우선 영화가 사용한 화면 구상의 첫 번째 방식으로 ‘주간회의 장면’을 살펴야 한다. 이 장면은 모두 다큐멘터리 톤으로 채색된다. 그 때문에 로랑 캉테의 방식을 떠올리게 된다. 예를 들어 <클래스>(2008)가 그러하였듯, <120BPM>은 매 순간 관객을 향해 돌진하듯 다가오는 현실감을 가진 영화라 할 수 있다. 생생한 대사의 불규칙성을 통해 관객은 마치 직접 현장을 목격하는 기분을 느낀다. 로뱅 캉피요 감독은 프레임을 컨트롤하기를 포기한 채, 캐릭터를 놓아주고 어느 때보다 자유롭게 그들을 지켜본다. 일부 화면이 예상을 벗어난 채 흩트러져 부각될 때가 있다. 하지만 이 군더더기 숏들을 통해 평행적 토론의 장이 완벽하게 재현된다. 그 과정에서 ‘힘의 상승’에 관한 일반론이 아닌, 유동성의 사례가 증명된다. 한마디로 이 영화의 회의 장면은 구태의연한 기존 구조의 성립을 파괴하기 위해 사용된다. 이 전략은 성공적이다. 영화가 끝난 뒤에 돌이켜보면, 첫 장면의 사실성은 그 자체로 그리운 과거가 되어 있다. 심지어 이 멜랑콜리한 기분을 전달하기 위해 ‘션(냐우엘 페레즈 비스카야트)’의 캐릭터가 필요했던 것 같다. 그는 우리 모두에게 찬란한 첫사랑의 모습으로 각인돼 있다. 일종의 페티시즘이 되어버린 아고라를 향한 그리움과 함께.

다음으로 영화가 구상하는 화면의 양상으로 ‘활동하는 모습’ 자체를 살펴야 한다. 토론 장면 사이에 삽입되는 교차편집의 장면들은 당대의 액트업을 증언함과 동시에 자칫 흩어지기 쉬운 인물들의 목적의식을 상기시켜준다. 제약회사 침입이나 고등학교 잠입 장면, 거리 데모 신이 모두 여기 속한다. 분홍빛 꽃가루를 날리며 자유롭게 길거리를 뛰어다니는 션과 동료들의 클로즈업 화면, 그리고 ‘죽음’을 직접 언급하는 플래카드 행진이 귀결하는 목표는 다름 아닌 (후반부 영화가 설명하는) ‘정치장례’의 절차에 있다. “에이즈로 26살의 삶을 마감한 션 달마조”라는 제목을 단 글귀가 결코 부고처럼 들려서는 안 된다는 것이 모든 이들이 교감하는 암묵적인 전제다. 그런 면에서 영화는 극단적으로 냉정한 자세를 취한다. 개인에 대한 집단의 균형이 개별 죽음의 상실감을 압도한다. 자전적 이야기이기에 더욱 성실하게 관조적 자세를 보이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로뱅 캉피요는 전체적 드라마의 속도를 인위적으로 늦추고 있다. 상실의 행위에서조차 감정은 절제되고 심지어 왜곡된다.

설사 한발 뒤로 물러서서 제한된 표현을 보이더라도, <120BPM>은 복합적이고 역설적인 열린 결말로 마무리되지 않는다. 감독의 전작이나, 그가 직접 시나리오에 참여했던 여타의 작품들과도 다르다. 한마디로 캐릭터를 봉인시키기 위해 영화는 부단히 애쓰고 있다. 언뜻 집단적 맹세를 위해 희생된 듯 보이지만, 모든 사건의 진짜 (숨겨진) 목표는 개인이며 낭만적인 곳에 오히려 더 집중된다. 단언컨대 이 작품은 ‘로맨스영화’다. 세 번째 구상을 이루는 ‘나톤과 션의 관계’가 앞선 두 부류의 장면들을 상회하는 이유가 여기 있다. 앞선 화면의 부류들처럼 다큐멘터리적 요소가 행동력을 강화하고, 카메라가 개별 인물의 내적 욕망에서 멀어져 있어도, 나톤과 션의 은밀한 장면이 객관화된 모든 장면들을 돌파해낸다. 그들은 서로 말하거나 토론하는 것에서 나아가 ‘행동하는 과정’을 보이며 관객을 설득한다. 과거 나톤이 에이즈에 대한 공포로 평범해야 할 삶의 과정을 회피했다면, 이제 그의 내적 억압은 션과의 관계를 통해 치유될 것이다. 그렇기에 이 사랑은 절대적이며 또한 운명적이다(비교하자면 나톤에게 에이즈는 운명이 아니다). 언뜻 현실에 존재하지 않기에 이상적으로 채색된 듯 느껴졌지만, 그 관계는 진심을 담는다. 죽음의 사랑, 존재하지 않는 사랑, 그리고 현실에 도전하는 사랑, 혹은 도전하는 행동으로서 말이다. 그러한 정신의 움직임이 육체적 결합을 넘어 현실적 이미지로 변화해서 영화 속 사회를 점령한다. 상상 장면인 ‘센강을 흐르는 붉은 피의 흐름’은 그 사랑의 연장선상에 놓인다. 동시에 정체된 사회에 대한 외침을 담는다. 그런 면에서 네 번째 구상인 ‘클럽에서의 파편화된 이미지’와 세 번째의 로맨스 장면은 서로 연관된다고 보아야 한다.

살아남은 자들을 위한 영화

밤을 부유하는 공기의 흐름이 바이러스 가닥으로 변모하는 순간에, 액트업의 모든 구성원들은 클럽에 모여 전투하듯 춤추고 있다. 더이상 잃을 여유조차 없는 한정된 시간이 쾌락을 위한 춤의 과정에 할애된다. 마침내 그 흐름이 피의 이미지와 합치되는 순간, 모든 움직임은 절망으로 변한다. 설사 스크린 앞에서 눈물 보이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영화를 생각하는 모든 순간이 몹시 아프게 느껴진다. 변화하고자 하는 처절한 율동이, 사라진 사랑에 대한 기억이, 영화를 ‘살아남은 자들을 위한 영화’로 장식하게 만든다.

로뱅 캉피요가 투명하게 가공한 크리스털의 공기를 들이마시면서, 이 작품을 최고의 멜로드라마라고 결론짓기로 한다. 현실과 기억, 사라진 역사와 사랑, 그리고 공감과 반동이 묘하게 균형을 맞추어 동성애에 대한 완벽한 서사시를 구성해낸다. 이 멜로드라마의 은밀한 매력은, 우리의 삶이 거기에 녹아들고 또한 우리의 시선을 여전히 끌어당긴다는 데서 발견된다. 나르시시즘에 비견되는 내적인 매혹으로부터 떨어져나와, 영화는 고통 위에 품위 있게 선다. 그 기묘한 아름다움에 감탄할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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