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때는 그것이 마지막 인사인 줄 몰랐겠지만 여자친구 현지(류현경)가 경유(이진욱)를 집에서 내보내며 한 마지막 인사말은 “호랑이 조심하고”였다. 호랑이 한 마리가 동물원을 탈출한 날, 경유는 집(얹혀살던 여자친구 현지의 집)을 잃고 거리를 헤매는 환영받지 못하는 겨울손님이 된다. 앞으로 경유가 마주할 곤경에는 호랑이보다 성가신 겨울의 진상 대리운전 손님들도 있고, 자신이 못 이룬 소설가의 꿈을 이룬 전 여자친구 유정(고현정)과의 만남도 있다. 한때는 소설을 썼지만 현재는 대리운전 일을 하는 경유는 집도 없고 직장도 없고 야망도 없고 욕망도 잊은 채로 살아간다. 경유에겐 “실패의 지속”을 경험한 남자의 무력감과 패배감이 스며 있다. 무례한 손님들을 상대하고 돌아선 뒤에도 욕 한마디 내뱉지 않고, 가까운 친구에게조차 제 상황을 설명하고 이해받으려 하지 않는 식물성 남자의 체념과 분노. 이진욱은 “실패와 좌절에 익숙해지면 더이상 희망이나 용기가 생기지 않는다”면서도 “경유의 어그러진 삶은 어쨌든 경유의 탓”이라고 말한다.
경유를 끌어안기로 한 2016년, “대중 앞에 선뜻 나서기 힘든 시기”에 이광국 감독의 <호랑이보다 무서운 겨울손님>을 만났고, 시나리오를 읽자마자 “지금의 나에게 꼭 필요한 작업이란 생각이 들었다”. <호랑이보다 무서운 겨울손님>은 이진욱의 첫 번째 저예산 독립영화 출연작이며, 경유는 이진욱이 연기한 가장 보통의 현실 남자 중 한명이다. 훤칠한 외모에 ‘공기 반 소리 반’의 분위기 있는 목소리를 지닌 덕에 영화적인 순간과 극적인 감정을 표현할 일이 잦았던 이진욱으로선 일상을 연기하는 생활밀착형 캐릭터에 대한 갈증이 컸다. “‘너는 평범한 역할이 어울리지 않는다. 대중이 너에게 기대하는 것도 그런 모습이 아니다’라는 이야기를 많이 들었다. 그런데 (경유 같은 캐릭터도) 꽤 잘어울리지 않나? (웃음) <호랑이보다 무서운 겨울손님>이나 드라마 <리턴>에서처럼 평범하고 일상적인 캐릭터를 연기하면서 개인적으로는 재미와 희망을 느꼈다.”
이진욱이 가진 실제 생활에서의 리듬과 호흡을 어떻게 하면 카메라 앞에서도 그대로 가져가 표현할 수 있을까에 대한 고민도 계속되고 있다. 고현정과의 작업은 그 고민을 더욱 깊게 만들었다. <호랑이보다 무서운 겨울손님>에서 어떻게든 글을 쓰고 싶어 하는 욕망의 인물인 유정은 고현정의 생동으로 완성되는 데 비해 무욕의 경유는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서도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게 아니라는 것을 표현하는” 이진욱의 정적인 연기로 완성된다. 이진욱은 고현정을 보면서 작품을 풍요롭게 만드는 자기 반영적 연기, 상대의 연기에 자신을 맞출 줄 아는 탁월한 완급조절 능력에 감탄했다고 한다. “고현정 선배와는 추구하는 연기의 방향이나 삶의 태도가 닮았다. 나만 그렇게 느끼는 걸 수도 있지만, 아무튼 고현정 선배는 내가 추구하고 싶은 나의 완성형이다.”
경유를 만난 때로부터 1년이 조금 넘은 지금, 이진욱의 연기에 대한 열망은 한껏 예열된 상태 같았다. “생활의 느낌이 묻어나는 연기도 곧잘 하는구나, 그런 얘기를 듣고 싶다. 속에 뜨거운 불덩이가 있었지만 지금까지는 그걸 드러내지 않고 쌓아온 것 같다. 이제는 그걸 효과적으로 잘 꺼내야 할 때가 된 것 같다. 전에는 천하태평하게 살던 사람이다. 이런 욕심과 열망이 처음으로 생겼다. 이렇게 그 마음이 충만한데, 감독님들이 어떤 역에든 나를 좀 데려다 쓰셨으면 좋겠다. 분명 나를 좋아하게 될 거다. (웃음)” 고개를 들지 못하고 쓸쓸히 겨울 거리를 헤매던 경유에게, 그리고 이진욱 앞에 봄이 성큼 다가온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