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버스타]
<호랑이보다 무서운 겨울손님> 고현정 - 나의 호랑이는, 나
2018-04-10
글 : 김혜리
사진 : 오계옥

<호랑이보다 무서운 겨울손님>은 글쓰기를 포기하고 근근이 밥벌이를 하던 남자 경유(이진욱)가 애인에게 버림받고 재회한 옛 연인에게 실망한 다음, 낯선 여자를 도움으로써 새로운 전기(轉機)를 맞는 여정이다. 교묘한 구조를 갖춘 이광국 감독의 전작 <로맨스 조>(2011), <꿈보다 해몽>(2014)과 달리, 남성주인공이 여성이 게재된 세 차례 시험을 거쳐 성장하는 서사는 사뭇 고전적이기까지 하다. 그러나 <호랑이보다 무서운 겨울손님>을, 창작의 벽에 부딪힌 두 ‘작가’의 평행선으로 보이게 만들고, 급기야 멜로드라마라는 착시까지 일으키는 요인은 과거 애인 유정 역을 연기한 고현정이다. 고현정 특유의 강력한 존재감과 숱 많은 감정표현이 영화에 이중의 무게중심을 부여하는 것이다. “좋은 건지 나쁜 건지 모르지만, 어떤 시나리오를 받아도 비중에 무관하게 내 인물의 이야기로 읽는다. 주인의식이 지나쳐. (웃음) 딱 한 장면에만 나온 <북촌방향>조차 보이는 부분이 작을 뿐 내 인물에겐 온전한 스토리가 있다고 생각했다. 역으로 이번 영화를 하면서, 만약 남의 인생에 들어갔다 나온다고 접근법을 바꾸면 다른 연기를 경험할 수도 있겠구나 확실해지더라.” 고현정이 연기하는 유정은, 신춘문예로 덜컥 등단했으나 문단에 안착하려면 필히 써야 하는 단편 진도가 나가지 않아 알코올에 의존하고 우연히 만난 옛 애인 경유를 붙드는 신인 작가다. 6년 전 <미쓰GO>(2012)에서 대인기피증을 가진 인물을 연기했을 때 고현정은 자신의 강한 인상을 알기에 강한 사람이 여린 척하는 듯 보여 작품에 폐가 되지 않을까 하는 염려가 있다고 했다. “이번엔 전혀 걱정 안 했다. 유정은 절대 약하거나 착한 여자가 아니니까. 더듬이 세운 달팽이처럼 살아남을 방도를 탐색하지만 질퍽대지는 않고 들키면 바로 인정한다. 남자의 뮤즈 역할이 아니라 자기쪽에서 뭔가 얻으려고 꾀하는 여자라 마음에 들더라.” <호랑이보다 무서운 겨울손님>에서 쓰지 않으려 발버둥치던 캐릭터는 “써도 괜찮아”라는 결론에, 쓰려고 쥐어짜던 사람은 “쓰지 않아도 괜찮아”라는 각성에 도착한다. 고현정이 보기에 유정은 위너다. 영화가 끝난 후 가망 없는 길을 정리해도 잘된 일이고, 뜻밖에 호된 겨울을 지나 진짜 글을 쓸 수 있는 사람이 됐을지 알 게 뭔가? 대다수 장면에서 취해 있는 유정을 고현정은 느즈러진 동작, 희미한 교태, 모호한 말끝으로 표현한다. “하지만 유정은 중독자라기보다 더 좋은 보상을 기대할 수 있게 되면 바로 술을 끊을 수 있는 실리적이고 뻔뻔한 애라고 봤다. 경유의 현재 애인 현지(류현경)처럼 남자에게 아침상 차려줄 캐릭터는 아니다. 뭘 그리 반찬을 많이! 버릇 된다. 그래도 경유가 글을 쓸 만한 순수한 남자인 건, 소설 도와줍네 눌러 앉아 밥 차려오라고 하진 않지 않나? 많은 남자들이 그럴 텐데.” 경유의 재능과 일관성은, <해변의 여인> 연출부 시절부터 이광국 감독에게서 고현정이 느낀 미덕이기도 하다. “전작들의 시나리오는 내게 어려웠는데, 이번 영화는 어떤 느낌이 확 와서 한달음에 쓰여진 것 같았다. 느닷없이 바다 가고 싶은데 용케 용기내서 연락한 친구들이 바쁘다 그러면 풀죽어 포기하잖나? 그럼 언제 기회가 올지 기약 없고. 캐스팅이 늦어지면 시나리오를 만지작거리다 최초의 좋은 느낌이 사라질 것 같았다. 곧장 영화가 만들어지도록 힘을 보태고도 싶었다.” 찬찬히 생각한 추천사가 뒤따랐다. “특히 시나리오 쓰고 연출하고 연기하고 싶은 분들은 꼭 보셨으면 좋겠다. 방만하지 않으면서도 이 안에서 나라면 어떤 방향으로 틀어서 갈 수 있을까 혼자 여행하듯 볼 수 있는 영화다.”

동물원을 탈출한 호랑이는 필사적으로 도망치고 싶지만 만나면 꼼짝 않고 눈을 맞춰야 하는 공포의 은유다. 그럼 지금 고현정의 호랑이는? “나 자신이다. 오늘 매니큐어도 찧은 손톱의 멍 가리려고 칠한 거다. 잘 넘어지고 다치고 성한 날이 없다. 나만 잘 다스리면 편안하다.” 억울한 상황을 도무지 보아넘기지 못하는 성정의 이 배우는 이내 호랑이의 입장으로 건너갔다. “근데 도망친 호랑이야말로 얼마나 무섭겠나. 인간들이 다 쥐고 있는 세상에서 갇혀 살다가, 먹이도 없는 밖에 나와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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